사랑 많은 할머니가 된다면 좋겠어
일요일 아침이면 부엌에서는 늘 도마 소리가 들렸다. 퉁퉁, 퉁퉁퉁. 늦잠을 깨우는 할머니의 느린 도마 소리. 그 소리는 잠결에 사그라들기도 하고 잠이 깨면 더 선명히 들렸다.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 습관처럼 식탁으로 향하면, 식탁에는 불에 그을린 자욱이 켜켜이 쌓여 세월을 짐작게 하는 작은 스테인리스 냄비가 놓여 있었다. 냄비 뚜껑을 열면, 칼칼한 냄새와 함께 김이 모락 퍼지고 냄비 안에는 네모반듯한 두부가 굵은 고춧가루를 이불처럼 덮고 나란히 포개어 누워있었다. 우리 집 단골 메뉴, 두부조림.
"할매, 또 두부조림이야?"
나는 냄비 뚜껑을 탁 덮고선 식빵을 찾아낸다. 할머니는 커다란 밥그릇에 두부조림을 두어 점 올리고 자작하게 졸은 두부조림 국물을 조심스레 긁어내어 밥 위에 슬슬 뿌리고는 비비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밥그릇을 부엌 바닥에 놓은 채 한쪽 무릎만 세우고 앉아서 다른 반찬도 없이 한술.
"식탁에 앉아서 드셔."
"됐다, 나는 이게 버릇이 돼서 편해."
우리 집 단골 메뉴에 단골 대화. 늘 먹던 할머니의 집밥, 늘 그 자리에 있던 것들. 나는 평생을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할머니는 셋이나 되는 손주들을 돌보며 살림을 하셨다. 할머니 덕분에 집에는 항상 따뜻한 밥과 국, 반찬이 있었다. 학창시절부터 사회생활할 때까지도 나는 한 번도 아침을 거른 적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식탁에는 항상 따뜻한 밥상이 차려져 있었고 언니가 먹고 나면 내가, 내가 다 먹고 나면 동생을 위한 밥상이 새롭게 차려졌다. 늦어서 밥을 거른다고 하면 할머니는 나갈 준비를 하는 우리를 쫒아 다니며 딱 한 숟갈만, 하고 먹여주신 적도 있었다. 그런 할머니 덕에 우리는 잘 자라났다. 우리와 함께 자랐던 강아지, 병아리들까지도 할머니의 '밥심' 덕분에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라났다.
서른이 되어서야 처음 독립을 하고, 그리고 결혼을 하고 나서 가장 그리웠던 것은 할머니가 해주신 집밥이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당연히 있던 집밥, 한 번도 배를 곯은 적 없이 풍족했던 식탁. 늘 그 자리에 있어서 소중함을 몰랐던 것들. 부엌을 매일 쓸고 닦지 않으면 금세 기름때와 먼지가 쌓인다는 사실을, 내 부엌을 처음 갖고 깨닫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 집밥을 챙겨 먹으려고 하니 간단한 음식 밖에는 할 줄 몰라 막막했다. 우리 집 단골 메뉴였던 할머니의 두부조림조차 나는 제대로 할 줄 몰랐다. 매일같이 먹어서 시큰둥했던 두부조림 생각이 간절했다. 할머니의 두부조림이 먹고 싶었다. 유튜브에서 두부조림 레시피를 검색해 천천히 따라 만들어 보았다.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었나.
양념장을 만들고 두부를 먹기 좋게 썰어서 살짝 구워둔다. 납작한 냄비에 살짝 구운 두부를 포개어 쌓고 파와 양파를 얇게 썰어 두부 위에 살살 펼쳐놓고 만들어둔 양념장을 고루 얹어둔다. 생수를 조금 두르고 양념이 졸아들 때까지 자작하게 끓인다.
직접 만든 두부조림은 할머니가 해주시던 그 맛과는 너무 달랐다. 두부조림이 이렇게 달짝지근할 수 있었단 말인가. 할머니의 두부조림은 양념장 맛이 전부였다. 고춧가루와 간장, 고추장, 그리고 다진 마늘이 조금 섞인 게 다였다. 그리고 아주 오래 졸여서 양념장이 약간 눌은 맛도 함께.
얼마 후 친정에 갔을 때, 할머니께 호기롭게 요리를 해드린답시고 유튜브 레시피대로 두부조림을 해드렸다. 내가 만든 두부조림은 할머니에게도 낯선 맛이었던 것 같다. 몇 숟가락 뜨시더니, 동생이 오면 맛 보여주신다며 남은 두부조림을 따로 덜어두었다. 외식도 거의 하지 않고 반찬도 손수 만들어 먹는 우리 집에서 '두부조림'이란 할머니의 레시피로 만든 게 전부였다. 그러나 정작 할머니의 두부조림 레시피는 아무도 알지 못했고.
한 번은 할머니의 채 써는 솜씨가 현란해서 감탄한 적이 있었다. 열 살 무렵부터 칠십 년을 부엌에서 일했는데 이것도 못하면 되겠니. 지난 세월에 대한 약간의 푸념과 체념이 섞인 말투로, 할머니는 큰 무를 순식간에 채 썰어 내셨다. 부엌에서 두부 한 모를 바라보며 할머니의 두부조림을 떠올린 나는 휴대폰으로 유튜브 앱을 켜고 '두부조림 만드는 법'을 검색했다. 5분짜리 영상 하나만 보면 살림 경험도 없는 이도 뚝딱 만들 수 있는 달짝지근한 두부조림인데 할머니는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 하나 없이, 한때는 직접 두부를 만들기도 하면서,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수고와 시간을 들여 두부조림을 만드셨을 것이다. 그 수고와 시간이 쌓여 어느덧 칠십 년이 흘렀다.
"접때 두부조림, 뭐 넣구 만들었어? 아주 잘 팔리던데."
오랜만에 다시 친정에 갔을 때, 내가 만들어두고 간 두부조림을 아빠와 동생이 아주 잘 먹더라며 할머니는 내게 두부조림 만드는 법을 물어보셨다. 인터넷에서 속성으로 배운 레시피로 할머니의 오래된 레시피를 바꾸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게 알려드리면서 할머니의 레시피를 배우고 싶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두부조림 레시피, 그러나 우리 할머니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그 두부조림 레시피.
"응 할매, 꿀 넣었어요, 꿀. 조릴 때 여기 양파도 조금 올리시고."
얼마 후 맛 본 할머니의 두부조림은 조금 단맛이 돌기는 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단골 메뉴, 그 두부조림 맛은 변하지 않았다. 늘 식탁에 올라와 당연했던 두부조림, 늘 부엌에 계신 모습이 당연했던 할머니. 그 당연함 속에는 따뜻하고 뭉근한 두부와 오래 졸여 깊은 맛이 나는 양념장 같은, 할머니만의 사랑이 담겨 있었다.
그 사랑을 먹고 자란 나는 할머니와 이제 함께 두부조림을 만든다. 할머니표 양념장을 만들고 두부는 굽지 않고 냄비 바닥에 엇갈려 쌓아 올린다. 파를 송송 썰어 양념장에 섞어주고 두부 위에 살살 올려준다. 내가 알려드린 대로 꿀을 조금 섞고 채 썬 양파를 조금 더해서 자작하게 졸여준다. 할머니와 함께 만든 두부조림은 조금 더 포근하고 따뜻한 맛이었다. 가정을 꾸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던 내가, 언젠가 나의 손주에게 맛있는 두부조림을 만들어주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해본다. 한때는 억척스럽다고만 생각했던 할머니의 사랑, 할머니가 내게 주셨던 그 사랑의 감정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