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마모토 1일차, '마스다 미리'의 커피타임을 기대했는데...
퇴사하고 공식 백수가 된 월요일 아침, 출근할 필요가 없는데도 매일 일어나던 시간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오전 시간에 사무실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 너무 훤하게 알고 있어서 아홉시에 억지로 나가서 운동을 하고 왔다. 운동을 하고 나오니 점심시간. 회사에서 유일하게 친하게 지냈던 동기가 사무실에 내가 없는 게 익숙하지 않다면서 연락을 해왔다. 그러면서 지금은 무슨 일을 하고 사무실 분위기가 어떻고, 마치 나도 회사에 있는 것처럼 문자로 수다를 떨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인간은 적응이 빠르다. 출근 안 한지 며칠만에 백수시절의 생활패턴으로 돌아갔다. 사무실 분위기가 별로 궁금하지 않았고 손에 익어서 눈감고도 했던 일들이 어색해졌다(역시 회사는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간다).
정기적인 수입이 끊겨서 불안한 것보다는 평일에 해가 떠 있는 시간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은행에 가서 여유롭게 환전도 하고 엄마와 마음껏 산책을 했다. 가을 하늘은 홀가분한 마음만큼 청량했다. 짧은 여행에 앞서 오랜만에 여행 캐리어 가방을 꺼냈고 그 속에 여름옷을 채웠다. 여행 가기 전 날 밤이면 왠일인지 방청소가 하고 싶어진다. 또 자정을 넘기고 공항 리무진 운행시간을 확인 한 후 잠이 들었다.
여행친구 J와 일본 쿠마모토로 며칠 간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몇 년 전 J가 미국에서 지낼 때 함께 미서부여행을 일주일 정도 해본 적이 있지만 한국에서 떠나는 해외여행은 처음이었다. J와 나는 독서 동호회에서 알게 된 사이인데 마침 같은 동호회 선배가 쿠마모토로 취항하는 항공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여행 겸 선배도 볼 겸해서 떠나는 여행이었다.
오후 한시 비행기였건만 새벽 여섯시 반에 리무진을 탔다. 출근시간에 차가 막히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정체가 없어서 도착시간은 무려 오전 여덟시. 시간에 느긋한 나와 달리 J는 시간에 촉박한 상황을 매우 싫어해서 일찍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공항에서 오전 아홉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나는 한시간 일찍 도착했고 J는 (역시) 삼십분 일찍 도착했다. 꽤 오래 함께 지낸 친구이고 취향이 비슷하지만 알면 알수록 나와 다른 면이 정말 많다. 그런데도 잘 지내는 걸 보면 신기할 따름.
공항에서 여유롭게 아침을 먹고 누구보다 빠르게 수하물을 부치고 탑승했다. 한시간 반 정도 비행 후 쿠마모토에 도착했다. 쿠마모토 공항에서 일하는 동호회 선배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쿠마모토는 꽤 큰 도시였다. 쿠마모토라는 지역명을 처음 들어봐서 지난 겨울에 다녀온 유후인 정도 되는 마을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인구가 70만명에 육박하는 꽤 큰 도시였다. J도 나도 여행 가기 전에 최대한 정보를 찾아보지 않고 가는 편이라서 막연히 생각하던 모습과 달라 놀랐다.
공항에서 숙소 앞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쿠마모토 시내에 도착했다. 시내 한 가운데 쇼핑 아케이드가 있었는데 규모가 대단했다. 서울 명동 거리보다 더 넓직한 거리가 불투명한 천장 지붕으로 높이 덮인 아케이드였다. 숙소 체크인을 하고 쇼핑 아케이드로 무작정 나왔다. 서울은 초가을이 한장이었는데 쿠마모토는 아직 한여름이었다. 그것도 기온이 많이 낮아진 거라고 했다.
쿠마모토에는 유럽 트램처럼 노면전차가 운행되고 있었다. 도로 가운데 전찻길이 있고 전차들 모양은 제각각이었다. 서울 지하철 한 칸 정도의 길이랄까. 평일 오후인데도 전차 안에 양복을 입은 직장인과 교복 입은 학생들이 가득했다. 옷 차림새까지 다 보일 정도로 전차 속도는 매우 느렸다. 아케이드는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가 않았다. 가운데 세로로 큰 길이 아케이드 형식으로 되어 있고 가로로 그보다는 좁은 샛길이 죽죽 뻗어 있었다. 아케이드 거리는 명동이나 신촌 같은 분위기로 전형적인 쇼핑 거리였다. 옷가게와 잡화점, 식당, 술집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하지만 가로 샛길은 길마다 분위기가 좀 달랐다. 바로 주택가로 이어지는 길도 있고 이자카야만 있는 길, 마사지샵이 많은 유흥거리도 있었다.
노면전차의 갖가지 디자인을 보면 일본에 왔구나 싶었지만 아케이드만 봐서는 일본이라는 느낌이 많이 나지 않았다. 서울에도 일본어를 간판으로 쓰는 일식집이 많아서 이질감이 적었고 전형적인 쇼핑거리는 서울에도 많았기 때문이다.
아케이드를 좀 더 걷자 (아케이드는 끝이 없었다. 걷다가 큰 교차로가 나왔는데 건너편 길도 아케이드였다) 일본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백 미터 마다 어김없이 자판기가 나왔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게다가 차도에는 깍두기 모양의 경차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본이라면 아기자기한 분위기나 장인이 오래 운영한 카페가 있을 줄 알았는데 쿠마모토 시내에서는 찾기 어려웠다. 우리나라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 격인 카페에 들어갔는데, 크루아상이나 샌드위치 같은 베이커리를 팔고 있어서 트레이에 빵을 담으면 카운터에서 커피와 같이 주문하는 형식이었다. 샌드위치와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는데 맛은 기대보다 못했다. 샌드위치에는 채소도 없고 마요네즈와 감자를 함께 으깬 속이 들어있었다. 대부분 마요네즈였지만. 커피는 맥도날드 커피보다 못했다. 패스트푸드점 라지사이즈 콜라 컵 같이 큰 플라스틱 컵에 작은 조각 얼음이 가득한 커피색만 나는 물 같았다. 원두로 뽑은 것인지 원두 색과 향만 첨가한 것인지 정체도 불분명했다. 술을 잘 못마셔서 여행 가면 카페 다니는 재미가 전부인데 쿠마모토에서의 첫 커피 맛이 이러해서 정말 속상했다. 일본 여행 가기 전에 마스다 미리의 <차의 시간>을 읽고 갔기 때문에 더 실망이 컸다. 마스다 미리는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에 맛있는 케익을 먹는 모습을 많이 그려서 나는 그런 카페를 기대했다. 카페를 잘못 선택한 탓이라고 생각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나왔다(다음을 기약하지 말았어야 했다. 기대를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음식 맛은 별로였어도 카페 구조는 재밌었다. 금연석보다 흡연석이 더 컸고, 2층 자리는 다락방 같이 좁고 천장이 낮아서 아늑했다.
첫날은 동호회 선배를 만나 저녁을 먹었다. 이자카야에 가서 쿠마모토 특산물 말 회와 겨자연근을 먹어보았다. 말고기는 참치회맛이 났고 겨자연근은 연근을 단면으로 얇게 썰어 구멍마다 겨자를 넣은 요리여서 꽤 매웠다. 이자카야에는 담배를 피는 사람들이 많았다. 도쿄는 몰라도 쿠마모토는 실내 비흡연이 아직 일반화되지 않았다고 한다. 식당은 물론 심지어 맥도날드에서도 담배를 피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고 했다. 동창회인지 회식인지 옆 테이블 한 무리는 매우 큰 소리로 웃고 떠들었다. 낮에 만난 일본 사람들은 조용하고 조신하고 예의있었는데 술집에서 본 일본 사람들은 꽤 다른 모습이었다. 시끄럽게 난동을 부리는 게 낯설지 않았다. 술에 취하면 나오는 만국공통국민성인가 보다. 선배는 쿠마모토 사람들이 도쿄나 일본 타지역 사람들에 비해 흥이 많고 괄괄한 편이라고 했다. 일본에서도 약간 아래 쪽, 좀더 더운 쪽에 위치해서일까.
선배를 만나서 쿠마모토 현지 특성을 사는 사람 입장에서 들을 수 있었다. 일본 대리운전은 운전사 옆에 보디가드 격으로 남자 한 명이 더 동승한다고 한다. 쿠마모토에는 택시가 무척 많다. 택시회사만 몇 십여 개라고 하는데 운영도 다 잘 되는 것 같다고 한다. 그만큼 쿠마모토 인구도 많고 이용객도 많은 것 같다. 카페에 가려는데 스파게티 같은 식사류도 팔고 있어서 카페가 아닌가 보다하고 돌아섰었는데 일본에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혼용된 식당이 많다고 한다. 들어가서 커피류만 마셔도 되고 식사만 해도 된단다. 그만큼 커피전문점이 없다는 뜻인 걸까.
이자카야를 나오니 낮에 봤던 쇼핑센터와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금요일이기도 해서 거리에 사람이 정말 많았다. 주변에 보험회사가 많다고 하더니 정장차림의 무리들이 회식을 나왔는지 거리에 무척 많았다. 여기저기서 술이 거나하게 취한 고성방가도 많이 들렸고 그들을 붙잡는 호객행위도 많았다. 굉장히 익숙한 광경. 신호등이 없는 길을 건널 때 속도를 줄여주는 자동차에다가도 고개를 꾸벅 숙이고 조용하고 예의바르게 길 안내를 해주던 낮에 만난 쿠마모토 사람들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