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책 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ongsoo Jung Jul 08. 2016

투명사회, SNS

한병철의 투명사회

한병철의 투명사회

  페이스북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상륙하기 전,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우리나라의 SNS는 싸이월드가 대표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인터넷 상에 자신만의 공간을 꾸민다는 것의 신선함과 더불어, 내 삶과 생각을 전달하고 다른 이들의 일상과 가치관을 바라볼 수 있는 대안적 소통의 기능에 열광했다. 그렇기에 싸이월드는 근 6~7년 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선도적인 SNS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싸이월드가 가졌던 국내 SNS 점유율은 이제 페이스북이라는 미국발 SNS가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싸이월드와 페이스북의 가장 가시적인 차이점은 개방성이다. 싸이월드는 나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 나의 미니홈피로 찾아들어 온 후에야 나의 생각과 삶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페이스북은 내가 쓴 글과 댓글, 내가 클릭한 ‘좋아요’, 내가 공유한 게시물 모두를 나의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보여준다. 페이스북 시스템은 내가 하는 페이스북 내의 활동 전반을 공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과와 가림 없는 시스템은 페이스북이 들어오자마자 많은 사람들의 노출욕과 관음욕을 함께 자극했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페이스북에 리젠되는 유저의 게시물은 크게 줄었다. 개인적인 철학과 가치관, 사상을 공유하던 공간은 사라지고, 스스로의 값어치를 높이려는 전략만이 존재한다. 기업의 클립영상을 통한 직접적 광고나 다양한 컨텐츠를 통한 간접적 홍보가 판치고 있다. 한마디로 페이스북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던 소통의 매개에서, 기업과 소비자를 이어주는 일방향적인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시스템의 강압이나 통제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페이스북 유저들의 정보의 개방과 공유가 극대화된 ‘투명사회’를 위한 자발적인 활동에 의해 이루어졌다. 흥미롭고 유용한 정보를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널리 알리겠다는 선한 마음은, 우리의 구미에 맞게 제작된 여러 홍보 컨텐츠를 우리 스스로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공개하도록 이끈다. 이러한 선한 마음의 발로는 점차 소통과 관계를 위한 공간이었던 페이스북을 이윤추구를 위한 공간으로 변질시켰다. 누군가의 억압과 통제가 아닌 우리 스스로의 손으로 우리 사회의 인간성을 위한 공간을 순응적으로 말살해가고 있는 것이다.  


  SNS에서 본 이러한 현상은 우리 사회 전반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명사회의 단편일 뿐이다. 모든 것을 공유하고, 공개하려는 선한 마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투명성을 장려한다. 모두가 투명할 때에야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회라고 여긴다. 모든 정보를 언제든지 얻을 수 있을 때에야 부정과 부패가 해결되고, 어떠한 통제도 없는 사회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살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따라서 투명성은 찬양된다.


  그러나 한병철에 의하면 이는 착각이다. 투명성은 인간을 잠식하고, 투명사회에서의 인간은 즉흥성과 개별성을 잃게 된다. 따라서 거대담론과 여론에서 벗어난 의견을 갖는 것,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 등은 힘들어진다. 남들의 눈에 자신을 가두고 그 안에서만 행동하게 되며, 개성을 표현하기보다는 우월성을 표현하려고 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투명사회가 무서운 것은 사람들이 투명사회에 자발적으로 복종한다는 것과, 투명사회를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확산시키는 데 있다. 


  투명한 사회는 많은 이들에게 긍정적으로 인식된다. 이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전시함으로써, 모든 것을 명명백백하게 만들기 위한 시도가 이어진다. 하지만 이는 지속하기에는 지나치게 포르노적이고 폭로적이다. 모든 것을 언제든지 알 수 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알아가기 위한 모든 것이 상실되어가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특정인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묘한 친밀감을 주지만 이는 인간관계에서의 긴장감을 상실시킨다. 나의 모든 것을 누군가가 알고 있고, 나 또한 누군가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그 와의 관계에서는 어떠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이런 사회는 무채색의 사회이고 나와 타인의 구분이 희미해지는 사회이다. 


  아름다운 그림이 존재하려면 여러 색이 섞이지 않고, 저마다 고유한 색을 유지해야 한다. 모든 색이 섞인다면 나올 수 있는 색은 검은색뿐이다. 모두를 위한 투명성은 모두를 상실케 한다. 모두를 위한 개방과 전시는 모두를 잠식한다. 모두를 위한 사회는 개방과 전시, 공개가 아니라 주체가 스스로의 색을 유지하고, 여러 색들이 조화롭게 존재할 때 이루어질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표현의 기술과 ‘표현장이’ 유시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