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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녕 Sep 24. 2020

나는 그의 올곧음이 부러웠다

넷플릭스 <우산 혁명>: 홍콩 보안법은 남의 일이 아니다

무기력 속에서 몸부림칠 때


요즘 난 바쁘다. 작년과 비슷하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바쁘다. 드라마 교육원을 다니면서 동시에 공채 철이라 필기와 면접 등이 쉴틈 없이 잡혔다. 그러나 ‘이 길이 맞는 건가’라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아니, 오히려 정식으로 취직하기 전인데도 가끔 회의감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드라마 업계의 대표급 정도 되는 사람들이 연사랍시고 와서 여전히 너무나 낡은 사고방식을 보일 때, 필기든 면접이든 무례한 태도를 접할 때. 내가 이 곳을 바꿀 수 있을까? 그리고 이 곳이 내가 이렇게 몸부림 칠 정도로 바꿀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고는 한다. 


그런 무기력이 들 때, 요즘 내가 찾는 콘텐츠는 드라마나 예능이 아니다. 오히려 요즘은 가감 없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가 묘하게 위로가 되더라. 기후 위기의 시대에 자연을 아름답게 보여주며 역설하는 <우리의 지구>나, 팩맨부터 닌텐도와 스트리트 파이터 2까지 게임의 역사를 보여주는 <하이 스코어>를 감탄하면서 보았다. 다큐멘터리에서 이런 연출을 선보일 수 있는 넷플릭스가 참 부럽기도 하였다. 넷플릭스 <우산 혁명> 역시 그렇게 넷플릭스를 떠돌다가 보게 된 다큐멘터리였다. 계속 봐야지 봐야지 하다가 본 <우산 혁명>은 좋은 다큐멘터리인 만큼 씁쓸했다. 다큐멘터리 <우산 혁명>이 촬영된 시기보다도 홍콩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럴  다큐멘터리 <우산 혁명>를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거리에서 정치까지


<우산 혁명>의 원제는 <JOSHUA>다. 부제가 <소년과 제국>인 만큼, 우산 혁명을 이끈 조슈아 웡 개인이 부각되는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그가 우산 혁명의 주역인 만큼 조슈아의 서사를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홍콩 우산 혁명이 어떻게 시작하고 끝났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다. 한국 현대사를 배운 사람들에게는 홍콩 우산 혁명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홍콩에서 중국의 국민교육을 거부하는 고등학생들의 모임이 확산되어 어른들을 일깨우고, 편의점 어디서든 살 수 있는 우산이 운동의 상징이 되는 일. 홍콩 사람들이 일국양제, 홍콩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길거리를 점거하고 길 위에서 자는 일. 



우산 혁명에서는 광주가 보이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저항하던 촛불시위가 보인다. 그래서 조슈아 웡 등 학민사조-데모시스토당에서 활동한 이들 역시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한국의 도움을 요청했던 조슈아 웡의 목소리를 한국 정부가 무시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많은 민주주의 운동이 그렇듯이, 고등학생들의 모임으로 시작해 길거리를 점거한 우산 혁명은 정치로 이어진다. 길거리는 영원히 점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길거리 시위와 단식 투쟁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고, 학민사조의 고등학생들 역시 어른이 되어 선거에 출마한다. 이에 대해 한 사람은 “조금 슬프지만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죠.”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선거에 나가는 일은 타협이 아니다. 오히려 운동을 계속해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에 가깝다. 홍콩 보안법이 통과된 지금은 그마저도 쉽게 허용되지 않는다. 


나는 얼마나 희생할 수 있는가


사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포인트는 우산 혁명 자체가 아니다. <우산 혁명>은 민주주의 운동의 흐름을 굉장히 잘 담은 다큐멘터리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바로 운동가 개개인들의 용기였다. 21세기에 일어나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일들이 홍콩과 중국에서는 벌어진다. 홍콩 투표권을 주장한 책의 저자들이 중국으로 끌려가 실종되고, 조슈아 웡과 아그네스 차우는 출국 금지 처분과 함께 체포되었다. 국민교육을 한번 막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한 걸음 앞으로 가면 두 걸음 후퇴하는 게 대부분 민주주의 운동의 지난한 과정 아니던가. 


아그네스 차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조슈아 웡, 학민사조, 데모시스토 당의 올곧음이 부러웠다. 내가 그들만큼 올곧음을 유지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내 트라우마를 시험장에서 마주쳐도, 자유를 말하는 이곳의 앞뒤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설 수 없는 나 자신을 알기 때문이다. 촛불시위에 참가할 수는 있어도 내 위치를 포기할 수 없음을 안다. 조슈아 웡은 “홍콩이 홍콩다워질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같은 방법을 선택할 수 없다.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그렇지. 또, 조슈아와 학민사조는 처음 운동 시작할 때 고등학생이었잖아. 우리는 부모가 우리에게 투자한 대학 등록금과 더 많은 것들이 생각나겠지.”


나는 내 안락함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 물론 모든 사람이 투쟁을 지속할 수는 없지만, 

작년에 나를 구원점이 사라져 갈 때 크게 나서지 못한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각자의 용기만큼


그래서 다시 다짐을 했다. 내 모든 안락함을 포기할 용기는 없을지라도, 하루하루 투자할 수 있는 용기 정도는 가져야지. 환경 운동 기부를 지속하고, 내가 있는 자리라도 바꾸려고 노력해야지. 그렇게라도 살아야지. 모든 게 너무 복잡하다고 신경을 꺼버리고 소시민처럼 살려고 노력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러기에는 내가 선택한 길이 외면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그래서 <우산혁명>을 보면서 느낀 마음속의 바늘을 유지하려고 한다. 


이 바늘을 갖고 살아야 조금은 덜 부끄럽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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