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과 여름 사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깨달은 내 요즘의 문제점이 있다. Feierabend가 없다는 것 (독일어를 잘 못해도, 독일어를 사랑하기 힘들어도 이 단어만은 내가 참 아낀다. 일이 끝난 저녁을 의미하는데 한국어로는 퇴근 후 삶이라는 말이 좀 비슷할까). 누가 보면 일주일에 72시간 일하는 줄 알겠지만 그건 아니다. 기록을 찾아보니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매주 약 45+시간을 일하고 있네. 그럼에도 눈 뜨고 일을 시작하고 이런저런 업무와 미팅을 하고 나면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고 부엌과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어느새 컴퓨터를 접을 시간이 된다. 물론 그 와중에 폰도 체크하고 장을 보러 나가기도 한다. 요리를 하는 날도 있지만 거의 간단 조리나 조합에 가까운 메뉴로 갈음한다. 그리고 나면 저녁엔 일주일에 두 번 독일어 코스가 있다. 어학원까지 걸어가는 시간 왕복 40분, 총 수업시간 3시간을 투자하고 나면 그 이틀은 특별히 뭐가 없이도 끝나 있다. 원래대로면 하루는 테니스 레슨을 두 시간 받는 날이 있는데 스케줄이 잘못되어서 한 번 레슨 받고는 멈춰있는 상태다. 요가 수업도 시작하고 싶었는데 매번 오후가 되면 등록하러 가기가 귀찮아 피했다. 그렇게 절대적 시간과 관계없이 나는 Feierabend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며 살고 있었다.
나는 업무의 ideation과 prototyping 부분을 가장 좋아한다. 이때가 가장 설레고 재미있다. 지금 하는 일은 거기를 한참 지났다. 테스팅하고 피드백을 받고 수정하면서 완성도를 높여가는 기간이라, 회의와 의견 조율, 그리고 내가 볼 때 대세에 지장 없거나 원래 콘셉트와는 맞지 않는 유저 니즈를 붙여가는 과정이라 그저 지난한 퇴고의 연속이다. 가끔씩 미팅을 녹화 혹은 녹음해서, 테스팅 때 오류를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처음 리콰이어먼트를 줬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들려주고 싶은 순간도 많고, 실제로 예전 그들의 이메일에 적힌 내용을 하이라이트 해서 보내며 두 이야기가 상충되는데 무엇이 맞는 거냐고 물어보는 경우도 제법 있다. 그렇다. 나는 이 과정을 전혀 즐기지 못하고 있다. 만드는 과정에서 즐거움과 만족은 이미 다 얻은 터라, 누가 해주는 칭찬이나 긍정의 피드백도 물론 듣는 순간 좋지만 큰 힘이 되지 못한다.
일은 이렇게 나를 연단하고 있고 Feierabend는 정복당했더라도 주말은 살아있다. 또 밀려서 4주어치의 주말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네. 한 주는 옆 대도시에 놀러 갔다 왔고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기차 왕복 두 시간 동안 책 한 권을 읽었다. 황선우 작가의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를 읽으면서 요즘 했던 고민들이 제법 정리가 되었다. 도심 강물에서 서핑하는 사람들을 봤고 나도 그런 코어와 밸런스를 갖고 싶어졌다. 큰 도시의 북적거림이 좋고 화려한 건물과 멋진 중년들의 옷차림이 맘에 들었다. 무슨 슈퍼마켓에 갔는데 다른 독일 동네에서는 유리 찬장 안에 있거나 몇 병 없을 Moet & Chandon이 계산대 바로 근처에 한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데서 느껴지는, 독일에서 가장 콧대 높고 부유한 도시의 모습이 신선했다. 친구의 친구들이 소개해준 여러 공원들이 맘에 들었고 충분히 팬시하면서도 푸르른 도시가 좋아졌다. 서너 번 다녀온 도시였지만 매번 출장이나 들르는 여행으로 다녀온지라 제대로 도시를 느껴볼 틈이 없었는데, 이번 경험으로 멀지도 않은 도시 자주 놀러가봐야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고 나서 그 도시와 내가 지금 사는 도시 둘 다 살아본 친구, 자신의 친구를 소개해준 친구와 저녁을 같이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월급은 거의 비슷한데 생활비는 지금 수준을 유지하려면 두 배가 들고, A에서 B로 가는 데 드는 시간 또한 항상 30분 정도는 족히 들 거라고. 그렇다고 거기 산다고 매일을 나가 놀진 않을 거고 그렇다면 주말마다 필요할 때 놀러 가는 게 낫지 않겠냐고 굉장히 실용적인 답을 주어 또 끄덕거리고 말았다. 평생을 만족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의 두리번거리는 태도의 좋은 예를 보았고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의 시간과 장소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클래식계 아이돌의 공연도 보고 왔다. 역시 명불허전. 불필요한 말과 행동을 철저히 생략하는 게 인상적이었고 코비드 이후 내향인 포션이 더 커지고 있는 내게 좋은 본보기가 잠시 되었지만 그의 실력이 내 것과 전혀 비할 것이 못되어 그저 마음속 쿠도스만 외치고 말았다. 같이 보러 간 친구와 시작 전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많이 나눴고, 오랜만에 결이 맞는 친구를 만나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또 다른 주말에 다른 친구를 만나 놀 기회가 생겼는데, 충분히 예의를 지키지만 근저에 깔린 언피씨한 시선과 평가가 말하는 도중 느껴져 오히려 기분이 별로였고, 앞으로 만나는 건 좀 꺼려질 것 같다. 나도 완벽하지 않아 누군가를 손절하고 하나하나 조목조목 짚어가며 지적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 아직도 지우려고 애쓰는 옛날 습관과 사고방식을 살아나게 한다는 점에서 굳이 애써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할 필요는 없겠다는 결론.
중간에 껴있던 한 빨간 날에는 잠을 실컷 잤다. 잠이 너무 부족했었나 보다. 그렇게 실컷 자고 난 뒤 어깨와 허리가 아파 깼다. 근 몇 주, 아침에 일어나기 힘든 며칠은 6시 알람을 끄고 씨리에게 시켜 7시 알람을 제 설정한 뒤 한 시간을 더 잤다. 그런다고 피로가 풀리느냐 그건 또 아닌데 적어도 내가 내게 졸리다고 투정 부리는 일은 덜해졌다. 저녁 스케줄이 있거나 출근한 날 밤은 일찍 잠들기가 너무 어렵다. 활동적이었던 때를 생각하면 이러고 오히려 샤워하고 푹 잤던 것 같은데, 아직도 이런 저녁들이 특별한 날로 느껴지니 몸이 뭔가 각성상태여서 잠들기가 힘들어지는 것 같다.
애플티비+에서 재밌는 걸 많이 봤는데,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건 오래된 사대주의고 여러 번 말한 적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영국 드라마들을 미국 드라마보다 선호한다. 이야기 푸는 방식이 덜 꾸며져 있고 더 문학적이다. 애플티비+와의 한 달을 마무리하고 다시 넷플릭스로 돌아왔고, 어젯밤에는 타인의 삶을 독일어+독일어 자막으로 봤다. 처음으로 독일어만으로 본 독일 영화네. 너무 아름다운 영화였고 군더더기 없어 맘에 들었다. 느껴지지 않나, 적어 내려 가기 귀찮아하는 내가... 본 책과 영화, 시리즈는 적어도 기록을 좀 더 제대로 해보는 연습을 해야겠다. 안 그러면 그걸 보느라 들인 내 시간이 너무 아깝게 느껴질 것 같다.
겨울을 열심히 살아내고 나면 봄이 그렇게 힘들게 느껴진다. 그런데 봄이라고 느낄 순간은 폴렌으로 코와 눈과 피부가 힘들 때뿐이고 집은 이미 여름 온도였다. 겨울은 그렇게 힘들여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봄과 여름에는 그저 해에 설레 아무것도 대비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마음의 대문을 형식적으로라도 열어두고 몸을 단단하게 준비하면서, 그렇게 봄과 여름 사이를 지내야겠다. 씨앗부터 심은 토마토는 가늘지만 긴 줄기를 키워내고 있고, 나는 내가 가지고 싶었던 습관들을 이제야 시간 곳곳에 심었다. 토마토는 순식간이었지만 내 습관은 발아에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잘 키워보고 싶고 싹을 틔우고 잎이 나기 시작할 때 그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