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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룡 Dec 20. 2018

포도알과 삶은 달걀 그리고 책

밤독서 

  계절이 지나가는 밤이었다. 쌀쌀한 가을 공기가 우리 뇌에서 쓸쓸함으로 인식되고야 마는 이유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그날은 내가 빛의 화가 모네도 울고 갈 만큼 화려한 꽃무늬 H라인 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 돌아다녔던 하루이기도 했는데, 몹시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이 또렷하게 허전했다. 왠지 컴퓨터를 켜고 싶지는 않았고, 그 밤에 나를 SNS라는 관계망으로 데려가 줄 스마트폰도 없었다. 결국 나는 이불을 걷고 책꽂이 앞으로 느릿느릿 걸어 갔다. 거기서 집어든 책이 공지영의 산문집 『빗방울 처럼 나는 혼자였다』이다. 열댓 장 읽다가 잘 생각 이었는데 책이 재미있었는지 책장을 넘기는 속도에 탄력이 붙었다.  


  책은 이상하게 말똥거리는 내 헛헛한 감정이 이상한 게 아니라고 말해주었고, 당하면 외로움인 그 감정은 택하면 고독이 되는 거라고, 그러니 이 밤에 독서를 선택한 이소영에겐 값싼 유대감이 아닌 침착한 고독이 주어진 거라고 칭찬해주었다. 


“밤이라고 하기에도 부정확하고 새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어두웠던 시간.(생략) 누구에겐가 전화를 걸어 나 해냈어, 나 그래도 해냈어, 라고 어리광을 부리면 사랑하는 누군가가, 그래 잘했다, 참 잘했어, 라고 말하는 걸 듣고 싶은 생각이 참을 수 없이 일던 그런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밤 2시 반에 전화를 걸어도 좋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외로운 시간은 처음이었습니다.”


  나에게도 그 밤은 잠도 오지 않고 구체적으로 허기진 가을이었다. 얼른 부엌에 가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포도 한 접시가 있었다. 나는 삶은 달걀 두개와 포도송이를 품에 안고 방에 들어왔다.


“우리는 외로우니까 글을 쓰고, 외로우니까 좋은 책을 뒤적입니다. 외로우니까 그리워하고 외로우니까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합니다. 어떤 시인의 말대로 외로우니까 사람입니다. J, 그래서 저는 늘 사람인 모양입니다.”

 

  어려서부터 나는 혼자서도 그럭저럭 잘 지내는 성격이었다. 외롭지 않아서 먼저 전화를 해 본 일이 없는 나는 이제는 외롭다 느껴도 먼저 전화하지 못한다. 먼저 전화하지 못하는 나는 좋은 친구도 좋은 애인도 좋은 선배도 못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책은 사람이 외로울 때 꼭 전화를 거는 건 아니라 말한다. 어떤 사람은 외로워서 글을 쓰고, 외로워서 책을 읽는 거라 한다. 그렇다면 나도 조금은 꾸준하게 외로운 사람이었던 걸까?   

  외로움. 그것을 인정하는 게 도무지 어색한 나에게 도도하게 가을은 왔고, 가을은 내게도 짤이 없고, 다만 잠들지 못하는 새벽은 새벽이 아니라 ‘밤’이라 써 버리고 마는 작가의 글과 포도 그리고 삶은 달걀이 있어서 나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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