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비스 Mar 23. 2022

취업 1년차. 대기업을 뛰쳐나왔다.

#첫 번째 퇴사 #자정엔 집에 보내주세요

 채용과정: 서류 - 인적성 - 1차 대면 - 2차 대면 - 건강검진

10년 전 일인데도 모든 순간이 선명하다. 자소서인지 자소설인지 모를 글들을 쓰고, 검토하고, 첨삭받고. 나 잘났다고 쓰는 글인데 자존감이 너덜 해지는 경험들을 하며 한 편의 글을 써 내려갔지.

IQ 테스트 인지 모를 낯선 질문들을 훈련하듯 빠르게 풀어간 인적성. 아직도 기억에 남는 질문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륜을 저지른다'

학교에서 제공해준 KTX 할인권으로 기차로 수십 번 오가며 냉면이 맛있는 서울 어느 동네 롯데리아에서 면접용 구두를 갈아 신고 걸어가던 걸음들.


얼마나 좋았으면 화면 캡처한걸 아직도 가지고 있네


어렵게 들어간 첫 회사. 퇴사는 입사 보다 더 큰 결심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최종 발표일은 일정이 2번이나 연기될 만큼 애탄 기다림이었고 '합격'이라는 이미지를 보고 눈물 흘린 순간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렇게 뼈를 묻을 각오를 하고 들어간 회사였다. 입사하고 6개월 정도 되었을까. 경영진 교체로 윗분들은 정신이 없었다. 회의 회의 보고 또 회의. 수장이 바뀌었다고 매출이 요동 치는 것도 아니었지만 아랫분들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현실을 윗분들은 이제 막 알기 시작하기라도 한 것처럼 공허하게 부산스러웠다.


매출이 잘 나오지 않는 이유는 명확했다. 구조적인 문제다. 개별 PM, GM 이 뭔가 해서 바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저 개발사와 긴밀하게 소통하고 이벤트 아이디어를 짜내는 것 정도가 최선. 그분들도 그걸 알았을까? 알았든 몰랐든 불똥은 실무자에게 튀었다. 보여주기 식 야근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주 2회는 무조건 야근이니 그렇게 알라는 통보. 10시 전엔 퇴근할 생각 하지 말라는 요청. 자연스러웠기에 더욱 이상했지만 그래도 이해하고 넘어갔다. 잠깐이겠지, 이런 게 회사생활이겠지. 시간 내 일을 끝내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고 업무시간에 메신저, 웹서핑 안 하고 정말 열심히 일 했다. 읽고 쓰는 게 빨라 어지간하면 일을 남겨두지 않았다. 윗분들이 그런 사정을 알리가 있나. 뭐 그래도 다행이었지 서비스하던 게임 분석 겸 플레이하면 10시 까진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사건이 터진 것은 강제 야근을 몇 주 정도 한 어느 날.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다를 수 있지만 아마 다음날 몇 번 번째 인지 모를 신임 대표님 보고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보고의 주체야 팀장님, 이사님이고 이미 내 손을 떠난 일들이었기에 함께 야근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웬걸 아무도 집에 가질 않는다. 10시는 이미 한참 넘었고 자정을 향해가는 시간. 이상하다. 할 일이 없는데 계속 앉아 있으라고 한다. 고3 때도 12시엔 잤던 나인데 (그래서 좋은 대학을 못 갔나?) 할 일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닌데 집에 안 보내준다. 새벽 1시. 인내심이 바닥을 친다. 화나는 것도 이젠 지친다. 책상에 몸을 삐대기(비비기 아니다, 이건 삐댄 거다) 시작한다. 옆자리의 선배들은 잘 참는데 나는 못 참는다.


새벽 2시. 이건 아니다. 팀장에게 간다. “저 들어가겠습니다” “네가? 왜? 다들 여기 있는데?” “전 할 일 다 했습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짐을 싸고 나와서 택시를 탄다. 대체 이건 뭐지? 잘 나왔다 싶지만 한편으론 엄청나게 불안하다.


잘리는 거 아냐? 선배들도 남아있는데?

이런 불안함을 느끼라고 연대 책임 야근을 시킨 거구나. 이러고 또 내일 10시에 나오라고 할거 아냐. 잘 나왔어. 스스로 위로하고 얼른 씻고 잠을 청했다. 돌이켜보니 그때부터였다. 여기 나가야겠다. 탈출해야겠다. 이게 맞는 거라고 자기 암시하고, 다들 이렇게 산다고 포기하는 거 그만해야겠다. 동시에 엄청난 자기혐오에 빠졌다. 왜 나만 못나서 왜 나만 별나서 다들 잘 다니는데, 적어도 그래 보이는데 이걸 못 버틴 걸까.


불합리한 야근이 싫습니다.

말 안에는 엄청난 것들이 들어 있다. 우선 시간에 대한 자율성. 최근 MZ세대는 연봉이 높은 회사보다 급여가 적어도 야근이 없는 회사를 더 선호한다고 한다. 계약한 시간만큼만 일 하는 것이 약속이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더 합리적인 가치라고 생각한다. MZ를 떠나서 난 22시 까지 더 앉아 있었잖아? 자기변명이다. 싫은 건 싫은 거고 아닌 건 아닌 건데 밥줄 가지고 그러는 거 치사하다. 별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당해도 어쩔 수 없다. 내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키워드 #내 시간 


보여주기 식 야근이 싫습니다.

월급 주니까 보여줘야 할 수 있다. 맞다. 그래서 10시 까진 있었잖아요? 그들에게 중요한 건 시간이 아니었다. 넌 내 아래이고, 내 권력에 따라야 하고, 그러니 내가 가기 전 까진 갈 수 없다. 대표님 보고를 앞두고 1분 1초 그 사실을 확인받는 시간일 뿐이었다. #스마트 일 잘러 #효율적 일하기 


그렇게 야근이 싫어서 퇴사하고 한동안은 자기변명에 바빴다. 제가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이 아닌데, 10시 까진 있었는데 (벌써 3번째 말한다).. 결국은 그 조직에서 버티지 못한 거였다. 그 구조의 규칙에 따르고 싶지 않았던 거다. 달달한 연봉과 복지를 포기할 만큼 나는 자기 결정권, 주도권이 중요한 사람이었다.
#자기 결정권 #자율성 #내결내책(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집니다)


이제는 안다. 무엇이 중요하고 그래서 왜 싫다고 느끼는지. 10년 전 수없이 고민하고 번민하던 사회생활 6개월 차 주니어에게 잘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스타트업 7년 차인 내가 있다.


그렇게 나는 남들 좋다는 대기업을 뛰쳐나왔다.







작가의 이전글 오늘도 퇴사를 고민한 너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