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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비스 Nov 17. 2023

캐나다에서 치킨 튀기는 삶에 대하여

#이민 노동자의 현실 #텐푸라 장인 #닉네임의 기원

하루 중 가장 긴 시간을 들여다보는 튀김기.

내가 기름을 들여다볼 때, 기름도 나를 들여다본다


모든 테크트리의 끝은 치킨집 이라더니 미리 경험해 보는 닭집직원.  

갑작스러운 해고에 허송세월 하던 때엔 일만 할 수 있다면 뭐든 좋을 것 같았는데

새로운 일터의 루틴이 익숙해지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다.


아사 or 과로사 or 치킨


외노자 생활 첫해. 흐리기만 한 날씨는 '차분해져서 좋아'였고

기약 없이 길어지는 외노자 생활에 흐린 날씨는 '우울증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 조차 우울하게 만든다.


욕심 없는 삶. 내려놓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불안하고 화가 나고. 끝없이 반복될 것 같은 오늘이 두렵다.

잘하고 싶은 마음은 괴로움을 만든다.


내년 상반기 PR(Permanent Resident, 영주권) 뽑기를 기다린다. 뽑혀도 바로 다른 일을 할 수는 없다. 룰이 그렇다. 만성적으로, 상대적으로 어렵고 힘든 일 하려는 사람이 적은 곳에서는 요리사로 지역사회에 더 기여해야 한다. 그래야 평생 여기서 살 수 있게 해 준다. 영주권에 목숨 건 적은 없는데 이거 아니면 할 게 없다. 뭘 위해 살아야 하나? 우주는 그냥 나를 여기 던져놓았을 뿐인데. 답 없는 답을 찾으려니 답이 없다. 갈 곳도 방향도 잃어버리는 두려움에 영주권 하나만 보고 살고 있다. 목적과 목표는 집착이 된다.

언제까지 이거 해야 해? 이거 다음엔 뭐 해?  


꾹꾹이에 몰입 하는 삶의 자세를 배워야하나


만약 내 점수로 뽑히지 않는다면 더 춥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곳에서 또 이런 생활을 이어가야 한다. 내가 나를 유학 보낸다고 한 선택이다. 1년만 버티자는 선택이 한없이 길어진다. 부딪히고 깨지고 또 일어나 걸어가는 게 '나다움'인데 충돌은 언제나 아프다. 걸레질 한 주방 바닥에 미끄러져 양쪽 엉덩이로 착지했다. 엉덩이가 쪼개지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엉덩이는 원래 쪼개져 있다.

차분히 영어 단어를 외우자. fracture - fluctuating


fracture
the cracking or breaking of a hard object or material.
"bone density testing can predict the risk for fracture"
fluctuating
rising and falling irregularly in number or amount.
"a fluctuating level of demand"
유학 보내는 엄빠들 고생 많으십니다. 엉덩이도 마음도 많이 힘들고 버거워요.


첫 회사 생활을 시작했을 때 회사를 떠나지 않으면, 도전하지 않으면 나의 20대에 미안할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생각보다 삶은 공평해 한줄기의 커리어를 잘 이어온 사람의 안정감은 서른 중반 이민도전을 위해 떠날 수 있는 자유로움에 비견되겠지만 어느 쪽이나 힘든 건 마찬가지겠지.

눈 주변 근육에 힘이 좀 풀리기 시작한, 어느 정도 다듬어지기 시작한 서른은 차분해지는 만큼 에너지는 떨어져 있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제 튀김은 자신 있다는 거. 사실 튀김이 제일 쉬워서 그렇다. 그래도, 캐나다 어느 시골 한 구석에 텐동집을 열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손님은 열명도 안 오겠지만.


지속가능성. 창업과 자영업은 연명과의 싸움이었다.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세이브는 꿈도 못 꾸는  게임.

지금 가진 것을 돌아보고 감사하라. 찰나의 깨달음은 오래 유지하는 힘이 약하다. 있는 돈 까먹으며 버티는 오늘.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350 ºF의 튀김기 앞에서 새카맣게 타버린 마음도 함께 튀긴다.


화상주의!

 

오늘도 12시간 근무를 마치며 심연 속으로. 아니 밴쿠버 어느 한 점으로 끝없이 침전한다.

그래서 내 또 다른 자아는 프리다이버다.


거품을 내며 익어가는 치킨을 본다. 치킨도 나를 본다.

그래서 내 닉네임은 어비스다.

에비스
Abyss(심연, 深淵)
a deep or seemingly bottomless chasm.


마무리는 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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