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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준 Jul 21. 2022

'압락사스'는 경계에 서 있는 자를 떠나지 않는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데미안>, 헤르만 헤세, 전영애 옮김, 민음사, 2017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19년에 출판된 소설이다. 당시에는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이 소설을 출간했고, 작품성을 인정받아 독일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폰타네상’을 수상했다.


 <데미안>이 베스트셀러로 등극하자 사람들은 이 무명의 작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 소설의 문체로 인해 <데미안>이 ‘헤르만 헤세’의 책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1920년 재판부터는 ‘헤르만 헤세’로 발간하였다.


 “내 책상 위에는 니체가 몇 권 놓여 있었다. 니체와 함께 살았다. 그의 영혼을 고독을 느꼈다. 그를 그침 없이 몰아간 운명의 냄새를 맡았다. 그와 함께 괴로워했다. 그토록 가차 없이 자신의 길을 갔던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이 행복했다.”


  <데미안>을 읽다 보면 ‘니체 철학’이 소설에 묻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싱클레어 또한 니체의 저서를 읽고 그를 흠모했다. <데미안>을 비롯해 헤르만 헤세의 다수 소설은 니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헤세는 “니체를 제외하고 어느 다른 작가도 괴테같이 나를 그렇게 몰두케 하고, 그렇게 잡아끌고, 그렇게 고통을 주고, 그렇게 논쟁을 강요한 사람은 없었다.”라고 말한다. ‘니체’는 ‘헤르만 헤세’의 인생관, 작품에 큰 영향을 끼친 위대한 철학자이다.


 소설의 흥미로운 또 다른 부분은 <데미안>을 쓸 당시, 헤르만 헤세는 ‘구스타브 융’의 제자였던 요제프 베른하르트 랑(1881~1945)에게서 약 60여 회 심리치료를 받았다. 또한, 헤세는 ‘융’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헤세는 ‘융’의 제자로부터 치료를 받았지만 ‘융’으로부터 치료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헤세의 문학은 ‘융’의 생각과 비슷하거나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헤르만 헤세는 좀처럼 도달하기 어려운 무의식의 세계를 형상화된 언어로 표현하려고 했다.” <데미안>에 나오는 두 개의 세계를 심리학적으로 보면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로의 탐구를 엿볼 수 있다.


 헤세 문학의 정수는 철학과 심리학을 넘나들며 우리를 ‘자기 자신의 세계’로 인도하는 구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 드려야 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는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나아가기 위한 열차 마지막 칸 사람들의 힘든 여정을 묘사한 작품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은 열차 제일 앞 칸에 있는 최고 지도자 윌포드를 축출하는 것이 아닌 열차 문을 열고 설국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극 중 송강호는 “너무 오랫동안 닫혀 있어서 벽인 줄 일고 있지만 사실은 문이다.”라며, 기존 사회 시스템(계급사회) 파괴가 아닌 열차 밖의 세계로 나가는 것을 선택한다. 기존 시스템을 깨고 새로운 세계로 한 발짝 나가는 문을 열었다.


 “저는 도덕적이지 않은 무엇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저는 도덕적인 것에는 늘 시달렸거든요.”


<데미안>에서는 데미안의 신선한 재해석과 평가의 2가지 일화가 있다. ‘카인과 아벨’,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도둑’ 이야기다. 데미안은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정반대로 카인이 고귀한 인간이고 아벨은 기껏해야 비겁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또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도둑’ 이야기에서 마지막 순간에 참회를 한 착한 도둑과 끝내 천국에 들어갈 기회를 박찬 어리석은 도둑의 이야기를 데미안은 이렇게 설명한다. 징징거리는 개종자보다는 회개하지 않은 도둑이 더 사나이답고 개성적인 인간이다. 개성적인 도둑은 자신의 길을 끝까지 갔고, 카인의 후예일 거라고 데미안은 말한다.


 두 작품에서 송강호와 싱클레어는 거대한 알에 둘러싸인 채 그것을 깨뜨리지 못하고, 결국 알이라는 보편적 질서와 도덕 속에서 힘겹게 살아왔다. 하지만 송강호는 커티스를,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나 알을 깨뜨리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힘겨운 여정에서 자신을 인도하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갔다. <설국열차>의 송강호가 기존의 사회 질서를 깨뜨리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연 것이라면, <데미안>은 끊임없는 내면의 방황과 성찰을 통해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아 ‘나’로서 살기를 시작한다.


 특히, 데미안이 재해석과 재평가를 한 ‘카인과 아벨’,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도둑’ 이야기는 니체의 도덕 비판이란 점에서 비슷한 맥락에 서 있다.


I am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니체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지를.”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의 ’I Should’ 낙타의 정신, “나는 원한다.”의 ‘I Want’ 사자의 정신, “새로운 시작, 놀이, 거룩한 긍정‘의 ’I am’ 아이의 정신.


 싱클레어는 어린 시절, 선악의 이분법적 세계의 구분과 가르침이 절대적인 것으로 알고 따랐다. 특히, 한쪽 면의 밝은 세계, 그 세계는 사랑과 엄격함, 모범과 학교의 세계였다. 결국, 그 세계는 밝은 세계였다. 싱클레어는 ‘낙타의 정신’으로 마땅히 그 세계에서 해야 할 일을 했다. I Should)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난 이후 새로운 세계의 시각을 가지게 된다. 싱클레어는 ‘사자의 정신’인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찾아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여정을 시작한다. (I Want)


 싱클레어는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과정에서 베아트리체, 피스토리우스, 에바 부인을 만나며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고찰한다. 오르간을 연주하는 피스토리우스와의 인연에서 ‘압락사스’에 대해 알기 시작한다. 피스토리우스는 말한다. “이봐 싱클레어, 우리의 신은 압락사스야. 그런데 그는 신이면서 또 사탄이지. 그 안에 환한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가지고 있어.” 압락사스는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닌 양면성을 가진 신이다. 싱클레어의 압락사스를 향한 열정은 알 수 없는 존재를 향한 사랑이기도 했다.


  하지만, 싱클레어와 피스토리우스와의 관계는 곧 끝나고 만다.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가 내뱉는 ‘압락사스’의 가르침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그의 이상에서는 골동품 냄새가 났다. 그는 과거를 향한 구도자였다.” 결국,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에게 ‘골동품’이라는 비판 가하고 그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깨지고 만다. ‘사자’에서 ‘어린아이’로 가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I am)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에바 부인을 만나면서, 자신과 세계를 긍정하고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이분법적 시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닌 양면의 경계에 서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열망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했다. 자신의 의지대로 ‘Yes, No’라고 답하며 살아보려고 했다. 그는 ‘I am’, 나 자신으로 살고자 했다.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가는 아름다운 과정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를 쓰지요.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그 길이 그렇게 어렵기만 했나요? 아름답지는 않았나요?”


 소설에서 “에바 부인은 어떤 사람인가. 그녀는 압락사스의 실존이고 세계의 완성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성이 가지는 포용력·관대함·부드러움을 통해 밝음의 세계뿐 아니라 어둠의 세계를 함께 안아, 자신 안에서 온전한 하나의 세계를 완성하는(혹은 완성할 수 있게 하는) 사람이 바로 에바 부인인 셈이다.”


 에바 부인’ 질문은 싱클레어에게 ‘삶의 아름다운 과정’을 되새기게 했다.


 싱클레어가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 어린 시절 만난 어머니의 세계, 하인과 직공의 세계, 학생 시기의 크로머와의 세계, 베아트리체, 피스토리우스, 데미안을 만났다. 마지막 에바 부인을 만나러 오는 과정 모두가 싱클레어에게는 삶의 아름다운 과정이며, 자기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또한, 1차 세계 대전의 상황을 되살려서 소설 끝자락에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대화하는 과정 모두가 아름답다. 싱클레어는 마지막에 자아 내면의 밑바닥에 데미안의 목소리를 듣고 ‘그 Er’라고 대문자로 표기되었다. ‘그 Er’을 발견하며 이것이 바로 ‘나’였음을 인식한다.   소설의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대장정은 가장 인간적인 ‘너, 자신’이 되어라. 자신의 ‘본래적 자아’를 찾고, 자신의 삶을 찾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온 목표이다.


압락사스는 경계에 서 있는 자를 떠나지 않는다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로부터 압락사스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다.


 “압락사스는 자네 생각 그 어느 것에도, 자네 꿈 그 어느 것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결코 잊지 말게. 하지만 자네가 언젠가 나무랄 데 없이 정상적인 인간이 되어버렸을 때, 그때는 압락사스가 자네를 떠나. 그때는 자신의 사상을 담아 끓일 새로운 냄비를 찾아 그가 자네를 떠나는 거라네.”


  사랑하는 인류가 무언가 완성된 것, 보존되고 지켜져야만 하는 것인 기존 질서나 도덕, 고수(固守)의 의지 속에 살고 있으면 압락사스는 떠나게 된다. 압락사스는 표적을 가진 사람들, 즉 세상의 눈에는 이상한 사람들, 위험한 광인으로 비치는 깨어난 사람들, 혹은 깨어나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싱클레어에게 표적을 지닌 사람은 다수의 사람들과 어떤 경계선에 의하여 갈라져 다른 벌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다르게 바라봄에 의하여 갈라져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불확실한 미래가, 그것이 가져올 어느 것에나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발견할 만큼 그토록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 그토록 자신의 요구에 따르며 기꺼이 사는 사람들이다.


 나에게 표적을 지닌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경계에 있는 사람’이다. 경계에 있는 자는 <데미안>에서 말하는 두 세계를 넘어선 자유로운 상태이다.


  경계에 서 있으면 두렵고, 모호하고, 불안하다. 불안함과 모호함을 분명히 할수록 두려워진다. 어느 한쪽의 명료함을 선택하는 순간, 그 한쪽에서만 살게 된다. 우리는 모호함, 불안, 두려움을 견디고 받아들여야 한다.


 “통찰을 하는 사람은 경계에 있는 사람이다. 경계의 부단한 중첩, 이것이 흐름이다. 이 흐름 속에 자기를 맡긴다는 것이다. 자기를 지배하는 어떤 신념과 이념에서도 벗어난 자유로운 상태이다. 경계에 서서 나오는 두려움을 견디는 것도 용기, 경계에 서는 모호함을 견디는 것도 용기, 경계에서 있을 때 오는 불안함을 견디는 것도 용기다.


 두 세계의 경계에서 자유로운 사람에게 압락사스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압락사스는 자기 자신만의 내면세계에 귀 기울이며 자신만의 길을 찾고 생성해 가는 용기 있는 자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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