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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쟈코비 JACOBY Mar 04. 2020

쟈코비의 물건 No.1

Red Wing



옷차림을 보면 그 사람의 취향을 알 수 있듯, 일상에서 쓰고 있는 우리의 물건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존재입니다. 세상의 수만 가지 물건들 중 나의 선택을 받았을 물건들의 의미와, 그 물건들이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담고 있는지에 대해 연재해보려 합니다.



내겐 조금은 별난 습관 같은 게 있다.





새 물건을 사거나 새 옷을 살 때면, 이미 가지고 있는 물건들과 이질감이 느껴질 만한 물건에는 여간 손이 가질 않았다. 심지어 새 청바지를 사 와서는 며칠간 옷장에 처박아두곤 내방의 냄새가 충분히 배었을 즈음 꺼내 입었던 적도 있다. 또, 새책은 사자마자 앞뒤로 두어 번 구부려 손에 잘 감기도록 만들고 나서야 책의 내용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너무 빳빳하거나 새것의 냄새에 어색함을 느낀다고 해야 하나. 뭔가 조금은 더러워지고 상처가 나야 비로소 마음이 편해지고, 그제야  물건에 정을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물건들은 조금은 이상한 나의 '애정의 기준'을 견디지 못하고 망가지거나 초라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예를 들면, 이제 막 정이 들 즈음 가랑이 부분이 터져 버리거나 초라하게 무릎이 나오는 청바지. 고무 밑창이 너무 많이 닳아버리거나 구멍이나 어쩔 수 없이 버려야만 했던 스니커즈들. 프린팅이 정말 멋지지만 목이 후줄근하게 늘어나 도저히 집 밖으로 못 입고 나가는 티셔츠들. 마치, 끝내주게 핑퐁이 잘되던 썸남 썸녀가 이유모를 한쪽의 일방적인 심경변화로 인해 관계의  빠짐을 느끼는 것 같았달까.





그러다 몇 년 전, 조금은 이상한 나의 '애정의 기준'에 꼭 맞는 물건을 만났다. 너무 멋 부리지 않으면서도 세련되고 신을수록 내 발 모양에 꼭 맞게 변해가고, 처음의 그 빳빳했던 가죽은 해가 갈수록 낡고 초라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후한 카리스마가 더해졌다. 각 잡힌 새것의 모습보다 여기저기 상처 나고 먼지가 잔뜩 묻은 5년이 지난 지금의 모습을 훨씬 사랑하게 됐다. 똑같은 레드윙을 신어도 각자의 발 모양에 따라 부츠의 모양이 조금씩 달라지고, 관리의 방법에 따라 에이징 컨디션도 변한다. 한마디로 커스터마이징이 무궁무진한 도화지 같은 물건이라는 것이 내가 레드윙을 사랑하게 된 포인트다. 이로써 나의 '애정의 기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물건을 만난 것이다. 그렇게 난 첫 레드윙으로 1907을 가지게 되었고, 그 후로 레드윙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세기의 역사를 지닌 브랜드인 만큼 레드윙의 헤리티지를 알아갈수록 더욱 빠져들었고, 여유가 생기는대로 레드윙의 라인들을 하나하나 사 모으기 시작했다. 러프한 매력을 가진 1907을 시작으로 여러 켤레의 6인치 목토들, 드레스업 슈즈로도 괜찮은 벡맨 시리즈와 포스트맨 처카 부츠, 아이리쉬 세터까지 신발장에 채워 넣으며 점점 애정이 깊어졌다. 하지만 새 레드윙 부츠를 길들일 때면 어김없이 고통이 따랐는데, 아무리 두꺼운 양말을 신는다 해도 발목에 늘 상처가 났다. 생각보다 고통스러운 그 과정을 대략 한 달 정도 참아내야만, 발볼에도 여유가 생기고 발목에 상처를 냈던 그 빳빳한 가죽도 이내 고집을 꺾고 만다. 그즈음이면 가죽도 에이징이 되며 톤이 낮아지고 러프한 매력까지 더해진다. 왜 그렇게 무겁고 아픈 부츠를 계속해서 사냐는 물음에 나의 대답은 이러하다. 새 레드윙을 신었는데 발목이 아프지 않을 때면, 마치 거칠게 날뛰던 야생마를 길들여낸 것만 같은 묘한 성취감이 들어서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레드윙에 본격적으로 빠졌던 건, 지금은 문 닫은 홍대 레드윙 매장을 다녀온 직후였던 것 같다. 매장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순식간에 나를 미국 한복판에 데려다 놓은듯한 그 공간이 나에게 안겨주는 감성이 너무나 좋았다. 기분 좋게 삐걱거리는 나무마루 소리와 매장에 은은하게 퍼져있는 스모키 한 향. 빈티지한 가죽소파와, 부츠가 진열되어있는 거친 나무 선반들, 피팅 서비스를 해주는 직원들의 옷차림까지. 레드윙이라는 헤리티지를 느끼기에 충분했고, 그 공간은 내게 많은 영감과 강렬한 인상을 남겨줬다. 눈여겨보고 있던 부츠들이 세일을 하는 시기에 유독 자주 가기도 했지만, 당장은 필요하지 않아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들러 슈케어 제품이나 슈레이스들을 사서 신발장에 비축해두곤 했다. 딱히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간다기 보단 공간이 나에게 주는 감성이 좋아서였다.





약속 없는 주말 저녁이면, 그렇게 사두었던 슈케어 제품들과 부츠들을 가지런히 모아두곤 구둣솔로 쌓인 먼지들을 털어냈다. 먼지를 털어내기 전 부츠 끈들을 모두 제거해야 했는데, 그 귀찮음 마저도 재밌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또 너무 건조해 보이는 부츠들은 손가락으로 오일을 떠 체온으로 녹여가며 구석구석 케어를 하고 광을 냈다. 마른땅에 물을 준 것처럼 촉촉하게 오일이 스며든 부츠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평온해졌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꼭 전날 밤 부츠를 정비했다. 그렇게 케어를 마친 부츠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지금 당장 어딜 신고 간다 해도 자신감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고, 말끔하면서도 강인해 보이는 레드윙은 나에게 있어 어쩌면, 단순한 신발 이상의 의미를 주는 것만 같았다.





내게 있어 레드윙의 존재감이 이렇다 보니 대부분의 여행도 늘 레드윙과 함께했다. 태양이 찌르는듯한 데스벨리 사막에서부터 눈이 허리만큼 쌓였던 요세미티까지. 폭우가 미친 듯이 쏟아지던 하노이에서 벚꽃이 흩날리던 교토까지, 내 발이 닿는 모든 순간을 함께 했다. 물건을 고르는 유별난 나의 기준 덕에 애정을 쏟게 되는 물건은 그다지 많지 않기에, 레드윙에 더욱 애착을 가지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신발장에 들여놓고 싶은 새로운 라인들이 또 눈에 보인다면, 새 레드윙을 길들이기 위한 발목의 고통쯤은 언제든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다.





물건은 그 사람을 보는 통로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수만 가지 물건들 중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선별된 것들이기에, 그 사람의 취향과 고민의 이유들을 말해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물건들이 그 사람에게 얼마나 자연스레 녹아있는가,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함께 하는가를 엿볼 수 있다는 게 나는 참 재밌다. 사람들의 눈에 비칠 나의 물건들 중, 내가 가장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있는 존재. 오늘도 나의 고민은  신을지가 아니라, 어떤 레드윙을 신고 나갈지다.





첫 번째
쟈코비의 물건
Red w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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