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어릴 때부터 나는 옷을 사랑했다. 그러나 난 패션 본능을 억제하고 모범생의 틀에 나를 구겨 넣은 채 20대와 30대를 다 흘려보내었다. 2013년, 박사 논문을 쓰기 위한 마지막 관문에서 나는 몇 번의 좌절을 경험했다. 웬일인지 나는 더 이상 나아가질 못하고 거의 1년 간 무중력 상태에 나 자신을 놓아 버렸다.
그렇게 떠다니던 2014년 어느 날, 우연히 한 사진전을 관람하게 되었다. 필립 할스만(Philippe Halsman)의 <점핑 위드 러브(Jumping with love)>라는 사진전이었다. 큰 기대 없이 들어간 그곳에서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사진 속 인물들의 삶과 마주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면을 쓴 채 자신을 감추고 살아간다. 그러기에 포토그래퍼는 가면 너머의 진짜 모습을 포착하기 위한 나름의 전략을 갖는다. 그 전시회의 포토그래퍼 할스만이 선택한 방법은 점프였다. 점프를 하는 순간 사람들은 몸의 균형을 잃고 무의식 속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피사체의 내면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할스만은 당대 최고의 권력자, 배우, 예술가들을 자신의 카메라 앞에서 뛰게 하였다. 할스만은 점프의 순간 인물들이 했던 말과 포즈 그리고 표정을 소개하며, 그들이 훗날 살아간 삶과 자신의 사진에 드러난 그들의 모습을 연관시켜 이야기하였다.
사진전의 중간 즈음, 1950~60년대 세계가 가장 사랑한 세 여배우 메릴린 먼로, 그레이스 켈리, 그리고 오드리 헵번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내 인생 전체를 흔들어 놓은 한 장의 사진을 만났다.
할스만에 따르면, 세 여성 모두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끊임없이 사랑을 찾아 나섰다. 세 여성 모두는 타고난 미모 덕에 별 노력 없이 사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행복을 보장해주진 않았다. 세 여성은 점프를 하던 순간 드러난 진짜 모습이 각자 달랐던 것처럼 다른 사랑을 하고 다른 인생을 살았다.
메릴린 먼로의 사진 속에선 끊임없이 사랑을 구하는 가짜 모습이 존재한다. 그녀는 특유의 관능적인 표정으로 진짜 자기를 숨기는 데는 성공했지만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했고 불행하게 살다 갔다.
그레이스 켈리의 사진 속 그녀는 거울 속 자신만 보고 있다. 누구든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도도함으로 똘똘 뭉친 그녀는 동화 속 공주님이 되는 길을 선택했고, 그 결과 자신의 불행을 감추며 살았다.
마지막은 오드리 헵번이었다. 그녀의 점프 사진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조용히 탄성을 질렀다.
‘어머!’
사진에서 우아한 여배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조금의 망설임 없이 맨발로 경쾌하게 날아올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표현한 건강한 여성이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밝고 청량한 에너지는 사진을 뚫고 나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난 있는 그대로의 내가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
할스만은 그녀의 삶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녀는 끝까지 행복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마침내 행복해졌고, 죽는 순간까지도 행복했다.’
거의 1년 간 이도 저도 아닌 삶을 살던 난 오드리 헵번의 점프 사진을 보자 멈춰있던 심장이 다시 뛰는 것 같았다. 그녀의 점프 사진 앞에서 한참을 멈춰 서 있던 내 안에선 그녀를 닮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솟구쳤다.
그건 그녀처럼 유명해지고 싶다거나 그녀처럼 늙어서도 날씬함을 유지하고 싶다는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점프의 순간 드러났던 그녀의 건강함을 선망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오드리 헵번의 사진전 <Beauty beyond Beauty>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녀의 삶에 더 가까이 가고 싶었던 난 조금의 망설임 없이 다시 그녀를 만나러 갔다.
나는 그녀의 삶을 그곳에서 입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옷, 가방, 신발, 그녀의 사진, 그녀가 남긴 말, 그녀의 작품 영상, 그녀의 스위스 집 모형, 그리고 그녀가 남긴 레시피에서 드러난 그녀의 삶에 푹 빠져 두 시간 반을 보냈다.
출연 작품 영상을 보던 난 그녀의 우아함과 기품에 감탄하다가도, 애써 예뻐 보이려 하지 않는 솔직함에 가슴이 뛰곤 했다. 지금의 우리는 그녀를 너무도 당연히 그 시대를 대표하는 패션 아이콘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풍만하고 육감적인 여배우들이 각광받던 시대에 활동했기에, 깡마르고 각진 얼굴과 지나치게 큰 눈의 자기 외모에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좌절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단점을 감추기보다 자기만의 색깔을 내는데 그 단점을 활용했다. 어쩌면 그녀의 그런 여유로움 때문에, 그녀는 대세에 어긋난 외모라는 평가를 받기보다 많은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게 아닐까 짐작해 보았다.
그녀는 배우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다작하지 않았다. 가족과의 시간이 소중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2차 대전 속에서 극심한 배고픔과 가족과의 이별을 경험했던 터라, 그녀는 스위스 자택에서 가족과 함께하는 평화로운 행복을 소중히 여겼다. 그녀가 남긴 브라우니 레시피에서, 그녀의 행복을 조금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녀가 스위스에서의 시간을 사랑했지만, 과거의 아픔을 부끄러워하거나 외면하진 않았다. 그녀는 과거의 아픔을 감사히 받아들였기에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깊은 사람이 되어갔던 게 아닐까.
그랬기에 그녀는 어린 시절 자신처럼 기아로 고통받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접하자,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평생 떨치고자 애썼던 유명세를 적극 활용했다. 한 시대를 대표하던 여배우라면 늙어서 주름이 자글자글한 모습을 대중 앞에 공개하길 꺼렸을 법도 한데, 그녀는 그때도 자신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오히려 더 열심히 세상에 나와 도움을 청했다.
한편 옷을 좋아하는 나는 전시회에서 패션 아이콘 오드리 헵번의 스타일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녀는 저렴한 옷을 리폼해서 입을 정도로 어릴 때부터 패션 센스가 남달랐다고 한다. 타고난 패션 센스 덕분인지 사진 속 그녀는 무슨 옷을 입든 아름다웠다.
패션 아이템을 찬찬히 훑어보던 내게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이 포착되었다. 그녀는 많은 작품에서 최고의 디자이너가 만든 드레스를 입고 아름다움을 발했지만, 이상하게 그녀의 몸을 떠나 마네킹에 걸려있는 옷들은 나에게 감동을 주지 못했다. 심지어 <로마의 휴일>에서 찬란히 빛나 보였던 드레스는 촌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무엇이 패션 아이콘 오드리 헵번을 완성시켜 주었을까?
물론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마네킹이 입은 룩과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더해진 룩은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얼굴의 탄력을 상실한 노년의 그녀가 세계 각지를 다닐 때 입었던 티셔츠와 청바지, 선글라스로만 구성된 소박한 룩 또한 내겐 충분히 쿨하고 멋져 보였다.
그럼 그녀가 입었던 옷을 빛내준 건 무엇이었을까? 분주히 사진 속 패션을 훑던 나의 결론은 다시 그녀의 내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점프의 순간 드러났던 그녀의 모습처럼, 그녀는 삶의 순간순간 자신을 드러내는데 두려움이 없었다. 옷을 입을 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가족들과 함께할 땐 자신에게 맞는 기성복을 직접 골라 입었고, 두 번째 결혼식엔 (유니클로에서 샀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캐주얼한) 핑크색 저지 미니 드레스를 입었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옷에 희생시키지 않았다. 내가 만난 그녀는 자신이 그 상황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옷을 골라 입었다. 그녀는 유행에 따르거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는 본인의 의지와 확신에 따라 옷을 입었다. 그랬기에 오히려 그녀는 새로운 유행을 창출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름다운 내면은, 그녀의 옷을 부각하여 그녀의 구호 활동을 퇴색시키려던 기자들까지도 감동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데 두려움이 없었던 그녀의 건강한 내면. 그리고 타인과 진실한 소통을 나눌 수 있는 깊이. 그것이 그녀의 눈빛과 그녀의 얼굴, 그리고 그녀가 입은 옷까지도 빛내주었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다’, ‘패션의 완성은 몸매다’ 패션의 완성이 무엇에 의해 이루어지느냐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모나코의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얼굴의 소유자였고, 20세기 최고의 섹스 심벌인 메릴린 먼로는 관능적인 얼굴과 몸의 소유자였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패션 아이콘임은 부인할 수 없다.
나는 오드리 헵번의 사진에서 패션의 완성 그 이상을 보았다. 그녀는 단지 ‘헵번 룩’을 창시한 패션 아이콘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게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에 대한 열정을 일깨운 롤모델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
두 번의 전시회 이후, 거의 2년 간 내 스마트폰 배경화면은 그녀의 점프 사진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무너지려 할 때마다 내가 나 자신이길 포기하지 말자 다짐하기 위해, 그리고 언젠가 나도 그녀처럼 나 자신으로 행복해질 거라 믿기 위해 나는 그녀의 사진을 보고 또 봤다.
사실 내가 사진 속 누군가를 바라보며 그 사람의 삶을 선망한 건 처음이 아니다. 그렇다고 교수가 된 선배들이나 저명한 학자의 삶을 사는 내 선생님들의 삶을 선망한 적은 없다.
나는 거의 20년 간 학자가 되기 위한 과정을 거쳤지만, 내 오랜 선망의 대상은 따로 있었다. 그건 내 단골 쇼핑몰 여사장의 삶이었다. 사진 속 그녀는 늘씬한 몸으로 내 짝사랑의 대상인 패션을 당당히 누리고 있었다. 비싼 차와 고급 리조트까지 더해진 사진 속 그녀의 삶은 내게 완벽 그 자체였다.
난 그녀의 삶을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었고, 그럴 때마다 사진 속 그녀가 입은 옷을 샀다. 그러나 내 삶은 그대로였다. 나는 삶에 대한 관점을 바꾸기보다 뭔가를 더 가지려 했다.
역시 패션의 완성은 샤넬백이야
비싼 차나 고급 휴양지까지 누리진 못하더라도 사진 속 소품으로 어김없이 등장하던 그녀의 샤넬백만큼은 꼭 갖고 싶었다. 오랫동안 내게 패션의 완성은 샤넬백으로 대표되는 소비주의였다. 예쁜 옷, 아찔한 구두는 이미 가졌으니 샤넬백만 있으면 내가 완성될 것 같았다.
결국 몇 년 후 샤넬백을 손에 넣었지만 샤넬백은 그저 비싼 솜사탕이었다. 그리고 내 삶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나는 이번에도 삶에 대한 관점을 바꾸기보다 뭔가를 더 가지려 했다. 나의 다음 스텝은 끝내주는 논문을 쓰는 것이었다. 그 시기 나는 마치 연구가 체질인 것처럼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건 학자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새로운 각오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뛰어난 논문으로 사회적 지위를 얻겠다는 것. 그것은 솔직하게 스스로를 드러낼 용기가 없던 내가 주위의 기대에 부합하기 위해 택한 타협이자, 소비주의의 위너가 되기 위해 택한 수단이었다. 그런 의도로 대했던 논문은 처음부터 내 인생의 목적이 아니었기에,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난관에도 나는 무너졌다.
그 시기에 우연히 만난 오드리 헵번의 점프 사진은 내 고정관념을 완전히 파괴시켰다. 샤넬백도 고급 차도 없던 그 사진에는 오직 자기를 드러내길 부끄러워하지 않는 한 사람의 건강한 자존감만 있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알았다. 누군가의 패션을 완성시켜 주는 것은 다름 아닌 건강한 자존감이라는 것을.
그 이후 나는 딱 한 가지만 꿈꿨다. 나 자신을 다 드러내고도 행복한 삶.
공부하는 사람이라며 늘 억제했던 패션 본능을 더 이상 부인하고 싶지 않았고, 소비주의에 굴복하던 과거의 나를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거의 다 된 박사 논문을 내려놓고 내 정체성을 찾기 위해 내 삶 전체를 돌아보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글은 점차 소비주의 대신 건강한 자존감을 입는 삶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담는 것으로 확장되어 갔다.
여전히 난 옷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제 내게 패션은 소비주의의 위너임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이제 내게 패션은 내 정체성을 표현하고 타인과 소통을 가능케 하는 나의 언어를 의미한다.
패션의 완성은 건강한 자존감이다.
몇 년이 지나 샤넬백과 이별한 지금, 난 건강한 자존감과 진실한 소통에서 행복을 꿈꾼다.
그리고 오드리 헵번은 내게 영원한 패션 아이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