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유리 Aug 29. 2017

S대 점퍼 후배님들, 부디!

정체성과 옷 입기의 상관관계(3)

01 대학생들의 꽈잠 사랑


한국 사람들에게 다양한 의미로 인식되는 S대. 나에겐 그냥 ‘내 학교’이다. 내가 96학번이고, 결국 박사학위는 포기했지만 나는 이래저래 20년간 이 곳을 맴돌았다.  


오랜 시간 이 학교에서 생활했던 사람으로서 하는 말인데, 학교의 명성이고 뭐고를 다 떠나서 참 생활하기 불편한 곳이다. 그 불편함을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추위를 유독 많이 타는 내게 캠퍼스의 겨울은 해도 너무했다.


내가 학부생이었을 때, 3월 말이었는데도 더플코트를 입은 사람을 지하철에서 발견하곤 신기해하다, 나와 같은 곳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풋!’ 웃었던 기억이 있다.




몇 년 전 부터 교내에서 학교 로고가 박힌 야구점퍼가 눈에 띄었다. 무릎까지 오는 오리털 패딩이건 어그부츠건 동원할 수 있는 방한의류는 다 동원해도 모자랄 지경이건만 모자도 없고 엉덩이도 덮지 못하는 이 점퍼를 겨울에 참 많이도 입고 다닌다.


내가 출강하던 타 대학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꽈잠’이라 불리는, 친절하게 소속 학과까지 박은 야구점퍼를 너도나도 열심히 입고 다니고 있었다. 따뜻하지도 예쁘지도 않은 점퍼를 왜 저리도 열심히 입을까? 하루는 내 강의를 듣던 학생들에게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러나 누구 하나 속 시원히 밝히는 사람은 없었다. 내 의문을 덜어주지 못한 싱거운 대답 하나가 돌아올 뿐이었다.


그냥 학교에서 이 잠바 하나 맞추면 무슨 옷 입을지 걱정 안하고 이 옷만 입고 다녀도 되니까요.


내가 캠퍼스를 완전히 떠나지 못한 채 내 정체성 탐구를 시작하던 무렵, 분당에서 학원을 운영하던 친구 하나가 어떤 부탁을 해왔다. 단어 시험 100점 맞은 학생들에게 줄 상품으로 학교 로고 박힌 학용품을 대량 구입해 달라는 것이었다.


기념품점이 있는 학생회관에 도착하기까지 몇몇의 야구점퍼가 나를 스쳐지나갔다. 기념품점에 도착하자 ‘견학생을 위한 코너’로 가서 지우개, 볼펜, 파일케이스, 노트를 플라스틱 바구니에 주섬주섬 담았다. 그러다 한편에서 학교 배지를 발견했다. 나는 그제야 그 야구점퍼가 전혀 낯설지 않은 익숙함의 대상이란 걸 깨달았다.



02 배지, 책가방, 그리고 야구점퍼


내가 학부생이던 90년대. 그 땐 야구점퍼가 아니라 책가방이 있었다. 당시 대학생이면 누구나 메고 다녔던 가장 핫한 아이템은 이스트팩과 잔스포츠 백팩이었다. 그 디자인을 차용하여 각 대학에서는 대학의 이름이 박힌 책가방을 판매했고, 상당수의 학생들은 그걸 애용했다. 난 학교 로고 가방을 하루에도 몇 번이나 지하철에 탄 누군가의 등에서 만났다.


난 학교 로고 가방을 메는 대신, 이스트팩에 학교 배지를 달았다. 그건 트렌드는 취하면서도 소속 학교까지 밝히는 다소 영악한(?) 행동이었다. 야구점퍼와 학교 책가방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것은 어떤 ‘지위’를 마침내 ‘성취’했다는 기쁨의 표현이다.


하루하루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지금, 대학생이던 시기를 돌아보면 그 때 진정으로 뭔가를 ‘성취’했다고 볼 수 있는 건 없다. 그렇지만, 고등학생이었다가 막 대학생이 되었을 그 땐 그 학교 학생이라는 것 자체가 상당한 ‘성취’이다. 그 감격은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 허세 가득 노래, 이적+김동률의 <그땐 그랬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친구에게 학용품을 갖다 준 며칠 후  문자메시지가 왔다. 학생들이 S대 정문이 빛나는 야경 사진이 찍힌 파일 케이스를 받으려 혈안이라는 것이다.


그 학생들에게 ‘S대 학생’이라는 ‘지위’는 아마 가장 ‘성취’하고 싶은 대상일 테고, 늘 사진 이미지로만 접해온 그 정문으로 어서 빨리 등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겠다 싶었다(그 정문으로 걸어 들어오더라도 각자의 목적지 건물까지는 차를 타고 한참 더 가야한다는 당혹스러움은 그들의 몫이고).


숫자에 따라 줄지어진 대학 중 맨 앞의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던 아이들. 그들의 성취를 기념할 학교 로고 가방과 야구점퍼는 그 자체로 어떤 보상이 될 수 있음을 (나도 그랬었기에) 완전히 부인하고 싶진 않다.



03 학교 로고가 주지 않는 기쁨


월드컵의 열기가 뜨거웠던 2002년. 석사 논문 준비 중이던 난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경험삼아(라고 말하고 싶다) 기간제 교사로 일했다. 그 시절 학생 중 지금도 연락하는 제자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 중 S라는 청년이 있다.


“선생님, 경제학 정말 재밌네요!”


S는 내가 대학 교재 일부를 발췌하여 나눠준 유인물 폴더를 소중히 갖고 다니는 모습을 자랑하며 해맑게 웃던 아이였다. 그때 S는 학교에서 ‘화학 영재’로 통했다. S는 탐구라는 걸 진심으로 즐기던 학생이었다.

S는 현재 한 대학병원에서 외과 레지던트로 일하고 있다. 본과를 다니던 때만 해도 S는 내과를 지망한다고 말했었다. 이유를 물어보자 돌아오는 S의 대답.


“전 재밌는 것만 하니까요!”


S가 레지던트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난 S가 왜 외과를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S의 대답은 달랐지만 본질은 같았다.


“수술이라는 궁극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니까요!”


소위 잘나가는 전공에는 애당초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여 즐겁게 일하는 기쁨이 크다는 S와 하루는 만나 저녁을 함께 먹으며 나는 S에게 부러움을 표현했다.


“다양한 전공을 맛본 뒤에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대는 참 괜찮은 곳 같다.”


S는 얼마 동안의 경험 후 자기 전공을 택하는 그것이 자신이 의대에 진학하여 누린 가장 큰 특권이라고 말했다. 병원에서 긴급 상황이 발생하는 바람에 얼마 얘기는 못하고 헤어져버렸지만, 난 강변북로를 타고 집으로 향하며 씩 웃을 수 있었다.


‘S는 행복한 소년이구나.’


한편 그 때 내게 배운 제자 중 지금은 친한 동생 같은 사이인 Y도 있다. Y는 학교에서 모든 선생님의 주목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성적을 자랑하던 학내 유명인사였다.


해마다 학교를 옮기던 난 그런 Y의 명성을 알 리 없었다. 하루는 Y가 커다란 거울로 수업 중 얼굴을 살피다 내게 거울을 압수 당했다. 총명함과 미모 모두 놓치고 싶지 않은 Y의 욕심 많은 모습이 딱 여고 시절의 나 같았다. 정체불명의 무서운 선생님으로 통하던 내게 Y가 겁 없이(?) 거울을 받으러 왔다. 난 Y에게 거울을 돌려주며 따끔히 충고했다.


“난 너를 모르지만 넌 똑똑한 아이 같긴 해. 그렇지만 너무 자만하면 지금 니가 원하는 대학에는 갈 수 없어.”


당시 칭찬만 받아온 Y는 그때 내 말에 정말 자존심이 상해 버렸다. 그러나 Y는 결국 우리 학교 공대에 입학했다. Y가 마침내 ‘성취’했다는 기쁨에 취했을 무렵,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녀에게 건넸을 축하 인사와 정반대의 질문을 던졌다.


“Y야, 너 그 과가 뭐 하는 곳인 줄은 아니? 내가 그 과 졸업한 사람들을 꽤 아는데, 너랑은 안 맞을 것 같다. 입학 원서 쓰기 전에 왜 나한테 상의하러 오지 않았어?”


그러나 Y는 자신이 성취한 S대 ‘로고’를 그저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Y가 3학년 때,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졸업하면 뭐 할 거니?”


그녀는 선뜻 답을 못했다. Y는 욕심이 많았다. 나머지를 버리고 한 가지 길을 선택해야하는데 그녀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싶어 했다. 유학 다녀와서 교수도 되고 싶고 아이 셋 엄마도 되고 싶다던 그녀는 결국 졸업 후 업계 최고 연봉을 자랑하는 대기업에 입사했다. 그 회사에서 Y가 무엇을 경험했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그녀 스스로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이건 아니다!


스펙, 연봉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었던 Y에게는 진짜 부족했던 게 하나 있었다. 그건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서 오는 행복이었다. Y는 결국 주위 사람들의 아쉬움과 우려를 뒤로 한 채, 2년 만에 사표를 던지고 교대에 입학했다.


아직도 이 길이 자신이 좋아하는 그 길인지 질문을 던지며 살아가는 Y. 그녀는 역설적이게도 남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위치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남들이 선망하는 학교 로고, 그리고 세상이 높이 평가하는 그 무엇을 입는다는 것이 자신의 행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두 명의 제자는 각기 다른 삶의 모습으로 내게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S는 스스로를 어린 나이에 이미 알고 있었고, 스스로가 행복한 일을 하며 돈까지 벌 수 있다는 걸 오랜 방황을 거치지 않고 찾아냈다. (비록 3수를 했던 이력은 있지만) 행복한 소년 S는 자신이 그런 점에서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Y는 최고의 연봉을 주는 회사에서 행복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질문하게 되었다. 아직도 그녀의 질문은 현재 진행형이지만 Y는 자신이 버린 로고가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일류대와 대기업이라는 로고는, 이미 돈을 다 줘버린 지루한 영화 티켓과 같은 매몰 비용(sunk cost)이었다.




04 학교 이름 말고 ‘나’ 입기, 죄책감은 금지


2015년 3월 어느 날, 캠퍼스 내 작은 카페에 앉아 책을 읽다 옆 테이블 여학생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이제 막 4학년이 된 영어교육과 학생들이었다. 유학도 다녀오고 싶고, 유학 다녀와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임용고사도 미리 패스해 놓겠다는 한 친구에게 다른 친구가 충고한다.


“그게 뭐냐? 네가 하고 싶은 것들이 다 하나로 모아지지 않고 따로 놀잖아.”


이미 S대 로고 박힌 점퍼를 입고 있던 욕심 많던 그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생략한 채 다음 목표물, 다음 ‘로고’가 무엇인지 탐색 중이었다. 난 조용히 카페를 떠났다. 그녀의 모습은 그 무렵의 내 모습 같았기 때문이다.


학교 배지로 성취의 기쁨을 표현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 세상이 정해놓은 목표에 정신이 팔려있던 그 때의 내 모습.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모른 채 어른이 되어버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보상과 타인의 인정을 바라며 살아가는 어른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내가 그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던 더 큰 이유가 있다. 후배들에게 뭔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내게도 여전히 답은 없었다. 정체성에 대한 나의 고민은 이후로도 몇 달간 더 지속되었다. 옷을 좋아하는 나를 부인하고 싶지도 않았고, ‘건강한 의생활’에 대한 글을 쓰는 것도 좋았다. 그러나 아직 내겐 학교 로고 박힌 박사 가운을 버리고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할 자신과 확신이 없었다.


그러던 내게 그 로고를 과감히 버리라고 말한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는 《제로 투 원》의 저자 피터 틸이다. 그는 스탠퍼드대 로스쿨 졸업의 마지막 관문에서 그 로고를 버리고 ‘페이팔’을 시작했다.


《제로 투 원》의 저자 피터 틸


경쟁하지 말고 독점하라!


그가 권하는 삶은 그 때까지 나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경제 교사였던 난 ‘완전 경쟁’의 미학을 가르쳤건만, 그는 ‘완전 경쟁’이야 말로 미래 사회를 대비하는 우리가 버려야할 낡은 이데올로기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완전 경쟁’의 미학을 강조한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물리학과 물리학의 균형에 찬사를 보내고 있을 뿐, 누군가가 이윤을 취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선 정작 무관심하다고 지적했다.


더 높은 숫자, 더 좋은 스펙에 목매는 우리는 그 경쟁 시스템의 충실한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타인과 차별화시키는 꿈과 정체성을 버린 채 ‘엘리트 코스’라는 무의미한 목표 지점으로 달려간다.


피터 틸의 번뜩이는 글 속에서 나는 많은 용기를 얻었다. 내 정체성으로 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고, 그것으로 누구와 경쟁하지 않고 독점의 주체가 된다는 것.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시작하기에 때로 또라이로 보일지라도 그 또라이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독보적인 기업이 된다는 것.


그건 내가 ‘페이팔’ 같은 성공적인 스타트업 창업자가 되지 않더라도 나 자신이 가진 차별화된 가치에서 새로운 업의 가능성을 보고, 끊임없이 질문하며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난 부딪혀 보고 싶었다. 내가 정작 두려워할 것은 학교 로고를 벗는 것이 아니라, 학교 로고로 인해 One of Them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학교 로고를 벗지 못한다면 Zero to One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마침내 One이 되고 싶었던 난 학교 게시판에 글을 썼다.


“박사 논문 엎고, 스타일링 도와 드려요!”


학교 게시판에 올린 그 글 덕분에 매번 퇴짜나 맞던 내 블로그의 에세이는 출간 제안을 받는 신분 상승(?)을 하게 되었고, 몇 달 후 스타일링 컨설팅은 나의 새로운 업이 되었다.




다시 겨울이 오면, 엄동설한에 모자도 없고 엉덩이를 덮어주지도 않는 그 야구점퍼를 입을 까마득한 내 후배들께 몇 가지를 바란다.


그들이 그 옷을 입기 전까지 동일한 꿈을 향해 달려온 것처럼, 그들이 동일한 스펙과 연봉과 직종을 꿈꾸는 건 아니기를. 스펙과 연봉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내면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이기를.


학교 이름과 스펙, 높은 연봉 뒤에 숨겨진 진짜 행복은 ‘나는 누구인가’에 답하며 스스로 찾는 것임을 깨닫게 되기를. ‘나는 누구인가’를 찾는 과정에서 아무런 죄책감은 느낄 필요가 없으며 부디 자기 자신을 믿기를.


정작 입어야 할 진짜 옷은 학교 로고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름이라는 걸 너무 늦지 않았을 때 아는 행운아가 되기를.















이전 05화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헤어스타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