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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리 Sep 05. 2017

임용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정체성과 옷 입기의 상관관계(4)


01 내겐 불편했던 교무실 드레스 코드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나는 서울 소재 사립 고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했다. 갓 서른이 되었을 무렵, 당시 근무 중이던 학교로부터 계약 연장이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게다가 3년 간 휴학 중이던 나의 박사과정 학생 신분은 복학하지 않으면 제적 처리될 상황이었다.


그렇게 떠밀려 대학으로 돌아가, 내가 경험했던 교무실 드레스 코드를 돌아보았다. 불행히도 난 교무실 드레스 코드 하나 제대로 못 맞추는 사람이었다. 2007년에 내가 내린 결론은 이런 것이었다.


그건 사회성 낮고, 현실감각 부족한 내 실수였구나.

물론 틀린 건 아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년이 더 지나 그 실수에 대해 관점을 새로이 하다 깨달은 점이 있었다. 그건 단지 내가 미련하게 드레스 코드를 못 맞췄다며 자책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조금 더 깊이 파고드니, 그건 나에게 맞지 않는 자리에서 일하느라 스스로 내적 갈등을 겪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던 일종의 징후였다.


교사로 일하던 무렵 퇴근 후 또래 동료 교사들과 쇼핑하며 우리끼리 하던 말이 있었다.


“이 옷 예쁘다. 근데 학교에 입고 가도 될까?”

“내가 이 옷 입고 내일 ‘안녕하세요?’ 인사하면 K 부장님이 어떤 표정 지으실까?”

“이 옷은 학교에 입고 가기엔 좋은데, 너무 재미없는 옷이잖아. 이건 L 선생님이나 갖다 드리면 좋아하겠다. 안 그래?”


키득키득 웃으며 쇼핑했지만, 나는 직장에서 요구되는 암묵적인 드레스 코드를 따르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침마다 가벼운 한숨을 쉬며 옷장을 뒤적이다 회색 펜슬 스커트 + 검은색 터틀넥 스웨터 + 검정 재킷과 같이 교무실의 드레스 코드를 따라 튀지 않는 옷을 입어야 살아남는 현실, 그리고 그에 따라야 하는 내 모습. 다 맘에 안 들었다.




02 직장 내 드레스 코드와 직업 정체성


그 현실에 대한 저항으로 어쩌다 플라워 프린트 스커트 + 레이스 블라우스 + 벨벳 재킷을 입고 출근하면 (오늘따라 예쁘다는 학생들의 칭찬과는 달리) 어르신들의 따가운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한편 당시 학교의 아웃사이더였던 내게 매우 신기한 장면이 있었다. 전형적인 여교사 룩에 딱 들어맞는 새 옷을 입고 누군가가 출근하면, 하나같이 빙 둘러싸고 칭찬세례를 했던 것이다.


“이 옷 어디서 샀어? 정말 예쁘다.”


나는 그때마다 속으로 웃었지만, 정작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던 건 교무실 드레스 코드 하나 제대로 맞출 줄 모르는 나였다. 전형적인 여교사 룩에 적합한 새 옷의 주인공은 그 드레스 코드에 딱 맞는 옷을 입었기 때문에 타인의 인정을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평소의 답답함을 풀기 위해 나는 주말에 어쩌다 외출을 할 때면 최대한 일탈했다. 컬러렌즈를 착용하고, 목둘레에 털로 장식된 보라색 니트를 입고, 반짝이 스커트를 입고, 망사스타킹을 신었다. 투머치(too much) 룩의 정수였다.




그런 주말 일탈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잠깐이나마 내 직업이 내게 요구하는 보수적인 정체성을 훌훌 털기 위해 했던 행동이었을까. 아니면 직장에서 요구되는 드레스 코드가 무엇이었든 그것으로부터 해방감을 경험하고자 했던 행동이었을까.


박사과정 학생으로 돌아와 시간강사 일을 병행할 때, 내가 맡은 강좌는 교수법이었다. 대개 교수법 강의 후반부에는 학생들이 조별로 수업 시연이라는 것을 한다. 한 시간 분량의 수업을 준비해 와서 다른 학생들 앞에서 실제 수업처럼 발표를 하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 조별 수업 시연 때는 발표자 하나가 평소와 다름없는 대학생의 복장으로 발표를 하고, 담당 강사(또는 교수)는 그 발표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서 피드백을 해준다.


교사로 일하던 시절, 옷에서 상당한 혼란을 경험했던 나는 교무실의 암묵적 드레스 코드를 예비교사인 학생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다. 학생들에게 수업 시연을 실제 수업 상황으로 가정하고, 발표자 이외의 다른 조원 학생들까지도 출근 복장으로 출석할 것을 공지했다.


그런데 학생들은 내 예상보다 복장 갖춰 입는 걸 훨씬 더 어려워했다. 나는 그 과정에서 대학생으로 살던 그들이 교무실 드레스 코드를 맞추는 게 쉽지 않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대학 시절 사범대 교육과정으로부터 교무실 드레스 코드에 대한 어떠한 지식이나 노하우도 접하지 못했던 난, ‘암묵적 지식’으로 존재하는 드레스 코드를 ‘명시적 지식’으로 전환해서 알려줘야 할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 과정을 통해 난 내 학생들만큼은 내가 경험했던 실수를 피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고자 했다. 내게 그건 드레스 코드를 몰라 실수를 경험한 선배이자 교수법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어떤 강좌에서도 그런 내용을 접해보지 못한 학생들은 내 요구에 매우 황당하다는 반응이었지만, 한편으론 재미있어했다. 교사 복장으로 수업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묻기 시작했다.


“와이셔츠에 노란색 조끼를 겹쳐 입어도 될까요?”

“치마 길이는 어디까지가 좋을까요?”

“청바지 입고 출근해도 될까요?”

“지퍼 달린 카디건은 괜찮을까요?”


그때 내 입에서 나온 답변은 이런 맥없는 것이었다.


“글쎄……. 최대한 보수적으로, 격식을 갖춰 입으시는 것이 안전해요. 그렇지만 학교마다 교무실의 분위기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그 분위기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조금 자유로운 복장이 허용되는 곳이라면 다른 선생님들이 하시는 대로 따라가세요. 다만, 연세 드신 선생님들께서 자유롭게 입으신다고 그분들을 따라 하시는 건 추천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말을 하면서 이 얼마나 멍청한 대답인가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정답이었다.




03 직장 내 드레스 코드와 자기 정체성


학교뿐 아니라 다른 직장에서도 그 내부에서 적정하다고 받아들여지는 암묵적인 드레스 코드가 존재한다. 한 사회의 일원으로 갓 진입한 사람이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그 사회에 존재하는 암묵적 드레스 코드를 최대한 빨리 파악해 내어 자신의 개성과 절묘하게 절충하는 것이다.


5년의 직장 생활에서 얻은 경험을 거울삼아 강의를 시작하면서 나는 내게 부족했던 것이 그 절충의 능력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난 그 절충 방법을 가르치려고 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돌아보니 그때 정작 내게 부족했던 것은, 단지 절충 능력이 아니었다. 내게 부족했던 것은 내 정체성에 대한 통찰이었다. 아마도 내가 노력을 좀 더 했더라면 절충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절충하려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의 의미는, 그 직업이 주는 정체성과 내 정체성 사이에 존재하던 간극을 무의식 중에 깨닫고 있음에 대한 시인이었다.


박사 과정 학생으로 돌아와 6년이 흘렀을 무렵. 우울증을 만나 정신 분석 치료를 받고, ‘에니어그램’이라는 성격 유형 모형을 공부하며 나는 나의 사소한 선택으로부터 내 무의식을 인지하려 노력해왔다.


그 과정에서 찾아낸 내 정체성은 자유로운 영혼, 즉 보헤미안이다. 나 같은 사람들은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에 나를 맞추는 것을 고집스럽게 거부한다. 그것이 설사 나를 보호하는 안전망이 된다고 할지라도 사회적 틀에 이유 없이 욱 하며 반항하는 것이 내가 가진 본성이다. 만약 틀에 맞추는 걸 꺼리지 않는다면 그건 우연히 내 기준과 일치할 때이다.




나는 오랫동안 교사라는 직업이 나에게 잘 맞는다고 착각했었다. 가르치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더 질문을 세밀하게 던져보니, 난 가르치는 걸 좋아한다기보다 기존의 통념과 상반되는 나의 새로운 깨달음을 말 통하는 이들에게 나눠주는 걸 좋아한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올라가고 눈이 반짝인다.


교사로 일하던 시절, 나는 교과서 내용을 내 주관에 따라 재해석해서 가르쳤다. 플러스 알파로 학생들은 내 옷차림에서도 그런 삐딱함을 알아봤고, 그걸 신선하게 받아들였다. 덕분에 내 수업은 꽤 인기 있었다.


그러나 그런 건 교무실에서 중요하지 않았다. 일개 풋내기 교사가 수업에서 뭔가 혁신적인 것을 시도하고, 옷에서 자신의 끼를 표현하는 것을 선배 선생님들은 곱게 보지 않았다. 따가운 시선이라는 무언의 질타는 내 옷차림과 나란 사람에 대한 내 직업 집단의 냉정한 평가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옷으로 표현된 내 정체성이 내 직업 집단에서 환대받지 못하는 걸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거부했지만 임용에 거듭 실패하며 난 그 집단에 속하고 안정을 얻기 위해 애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맘에 들지 않는 틀에 나를 재단하고 있음이 편치 않았다. 그건 내 정체성이 내 직업 집단에서 요구되는 정체성과 상반되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땐 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물론 정해진 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는 반문을 받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그 정해진 틀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맞추려 노력하는 게 내가 느낀 것만큼 불편하지 않다면, 그 사람은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최 선생은 교사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그러기엔 너무 튀잖아.


내가 그 사회에 적응하려고 외적으로는 꽤 노력하고 있던 무렵, 비교적 가깝게 지내던 선배 교사께서 농담처럼 건넨 말씀이다. 내가 노력해도 좁혀지지 않는 그 간극이 그분 눈에는 보였던 것이다. 


돌아보면, 나는 교실에서 학생들과 함께하는 걸 좋아했다. 그러나 학교라는 직장을 좋아한 적도, 교사라는 직업을 좋아한 적도 없었다. 내게 학교는 내가 사랑하는 직장이 아니라 집세와 생활비를 주는 단지 고마운 직장이었다.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 나오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원했던 건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을 멈추는 것이었지 그곳에 뼈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04 참 다행이다


소위 ‘잘 나가는’ 직장을 그만두고 새 출발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위에서는 적지 않은 우려를 보낸다. 그 직업에 대한 타인의 선망, 그 직업이 가져다주는 높은 연봉, 안정성, 특권 등을 언급하며.


너무 어리석은 행동 하지 마라. 취직 못하는 사람들이 알면 욕한다.


그런 남들의 말에 당사자는 스스로 의심하고, 두려움과 죄책감을 느끼며 소심해지기 십상이다. 한국 사회는 개인에게 ‘나다움’이라는 개성을 허용하기보다는 만들어진 틀을 강요한다. 그런 강요 때문인지, ‘나’의 선택인 줄 알고 결정한 나의 직업이 사실은 내 의사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아닐 때가 의외로 많다. 잘 나가는 직장에서도 환멸과 회의가 몰려올 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이런 것이다.


이 직업을 선택한 것이 진정 내 행복을 위한 내 결정이었는가?


‘아니다’를 깨달았을 때는 더 늦기 전에 뒤돌아보지 말고 새로 도전해야 하는 것이 맞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내 인생은 한번뿐이고,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타인(그게 부모나 친구라 할지라도)은 내가 누구인지 무지하며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남들이 선망하는 일을 그만두는 사람에겐 그렇게 결정하기까지의 고민의 무게와 깊이, 그리고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 맞다. 그 사람은 그 용기에 책임을 지기 위해 과거보다 몇 배는 더 치열하게 살아갈 테니. 


객관적으로  ‘좋은 직장’에서 행복하지 않다는 발견은 내가 추구하는 삶이 무엇인지 성찰하기 위한 좋은 출발점이다.


자신이 속한 직업 집단의 드레스 코드에 못 맞추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발견. 혹은 그것에 맞춰가는 자신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못마땅하다는 발견.


그것은 어쩌면 내가 여기서 행복하지 않다, 여기서 나는 나로 살아갈 수가 없다는 발견을 도와줄, 결코 흘려보낼 수 없는 중요한 단서일지도 모른다.


“S대 출신인데, 기간제야?”


거의 매년 학교를 옮겨 다니던 난 ‘S대 루저’ 취급을 받았다. 사립학교 교사로 일하던 5년 간 매번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임용된 적이 없다. 나는 교무실에서 늘 느껴야 했던 ‘루저’라는 조롱 섞인 시선과 그로 인한 모멸감을 벗고 싶었다.


기간제 교사라서 당연했던 이런저런 부당한 대우에도 나는 꾹 참고 그저 잘 보이려 했고 결과적으로 남들 보기에 ‘좋은 직업’을 가지려 애썼다. 돌아보면 내게 ‘좋은 직업’은 내가 루저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가져야 했던, 나에게만 없어 섭섭한 루이뷔통 백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일하던 동료가 그 학교 전임으로 임용되거나, 동기들이 하나 둘 공립학교 발령이 나는 걸 구경하면서도 난 한 번도 교원 임용고사에 응시한 적이 없다. 그건 처음부터 내가 교사를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난 거기서 내가 나일 수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진정 ‘좋은 직업’이란 남들이 인정해주는 직업이 아니다.  ‘좋은 직업’이란 누구의 동의가 없더라도 내가 행복한 삶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내 정체성에 맞는 일이라는 걸 20대의 난 몰랐다.


30대가 되고 박사과정 학생으로 돌아와서도 난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논문에 매달렸다. 그러나 30대의 내가 갖고자 했던  ‘좋은 직업’ 역시 20대에 내가 갖고자 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정체성에 대한 탐구 과정에서 난 자연스럽게 박사 논문을 포기하겠다는 말씀을 지도교수님께 드렸다. 교수님께서는 당연히 말리셨다. 박사 학위로 직업을 갖지 않아도 좋으니 거의 다 된 논문은 마저 쓰자고 권하시기도 했다. 그러나 난 내 선택에 온전히 책임지고 싶었고 빠져 나갈 여지를 두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난 작가와 컨설턴트라는 결코 안정적이라고 볼 수 없는 업을 갖게 되었다. 엄마는 그런 내가 못마땅하신지 가끔 교원 임용고사를 권하실 때가 있다. 그러나 난 조금의 의심 없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임용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때 내가 임용되지 않았기에, 나의 새로운 깨달음을 글과 상담으로 나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진정 내가 살아있음을 경험한다.  


그리고 내가 학위를 받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랬기에 내 인생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삶을 사는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 


지금의 난 내 옷을 입고 내 일을 한다. 난 내 일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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