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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리 Sep 12. 2017

롤모델 선배가 되려면

‘진짜 멋있는 삶’을 꿈꾸며(1)

01 나의 교생 실습과 교생 지도


나는 대학 시절 내내 모범생이었다. 시험 때가 아니어도 저녁까지 도서관에 남아 전공 공부를 했고, 항상 맨 앞에 앉아 수업을 들었다. 그러나 교생실습에서 나는 상당히 고전했다. 


‘과정’보다 ‘결과’


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배운 사회생활의 단면이었다. 내가 경험한 교생 실습은 그전까지 내가 어렴풋이 알던, 여유와 낭만이 있는 교생실습이 아니라, 매일 수업 준비를 해야 하고 익숙하지 않은 업무를 배워야 하는, 그야말로 ‘실습’이었다. 


동기들과 난 사범대학 부설 고등학교라는 소위  ‘빡센’ 실습장에서 많은 수업을 맡았다. 그때 내가 수업 준비의 부담 말고도 피부로 경험했던 건 발표 수업에서 발표자가 된다는 것과 교사로 가르친다는 건 다르다는 것이었다. 나는 학생으로선 성실한 모범생이었지만, 티칭의 재능을 타고난 교사가 아니었다.  


어떤 내용을 어떻게 가르치는 게 이상적인지 이론과 경험으로 아는 것을 교육학 전문용어로 교수법적 내용 지식(Pedagogical Content Knowledge)이라고 한다. 교수법적 내용 지식은 여러 해의 경력이 더해지고, 자기 수업에 대한 교사의 성찰이 보태져야 어느 정도의 형태를 갖는다.


그러나 나는 3년 반 동안 이론적 지식만 열심히 익힌 영락없는 초보였다. 내가 아는 것(content knowledge, 내용 지식)과 그것을 잘 가르치는 법을 아는 것(pedagogical content knowledge, 교수법적 내용 지식) 사이의 괴리는 컸다. 수업을 잘하고 싶었던 내향적인 난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할 자료만 잔뜩 준비해 갔고, 졸려하는 학생들 앞에서 떨며 ‘나 홀로 50분’ 수업을 했다.


매 수업 후 피드백의 시간마다 지도교사와 동기들의 신랄한 비판이 나의 무능함을 확인시켜 주었다. 하루는 터벅터벅 퇴근하던 내게 지도교사께서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최 교생은 교사보다 연구가 더 맞을 것 같아.”


그러나 몇 년 후 (비록 기간제이긴 했으나) 나는 유능한 교사가 되어 있었다. 학생들을 쥐락펴락하는 능숙한 대처와 귀에 쏙쏙 들어오는 수업으로 학생들의 인정을 받았다. 나는 언제 내게 그런 교생 시절이 있었느냐는 듯 가르침을 즐겼다. 


내가 가르침의 어려움을 극복한 비결 중 하나는 관찰력이었다. 나는 교생 실습 때 가르침의 재능을 타고난 친구의 방법을 잘 보고 기억해 뒀다가 교사 생활을 시작할 무렵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었고 마치 그 친구가 된 듯 연기했다. 나의 내향적인 성격도 어느 정도는 극복하였다.


두 번째 비결은 슬로 러너(slow learner)라는 강점이었다. 나는 한꺼번에 많은 지식을 빠르게 소화하는 사람은 아니다. 학창 시절에도 난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불친절한) 설명을 제 때 알아듣지 못한 탓에 나중에 독학하며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들 때가 많았다. 


천천히 생각하여 전체의 의미를 파악하고 나서야 내 것으로 소화하는 느린 사고. 그것이 학습자들의 인지 처리 과정을 이해하고, 학습자들이 마주하는 난관이 뭔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으로 연결되었다. 나는 학생의 사고를 세밀하게 배려하는 교사였다.


내가 교사 3년 차가 되었을 무렵, 내게 교생을 지도할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내가 근무하던 학교는 내가 실습했던 부설학교와 달리 실습을 빡빡하게 진행하지 않는 곳이었다. 4주를 무난히 지나면 교생 실습을 잘 마쳤음을 인증해주고 돌려보내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난 달랐다. 난 내가 맡았던 교생 네 명의 기가 질리도록 지도를 했다. 처음에 내 수업을 참관할 때만 하더라도 내 수업이 좋다며 웃는 낯으로 나를 대하던 교생들은 2주 후 나를 보며 벌벌 떨었다. 교생들이 각자의 대학으로 돌아가고, 나중에 50대 선생님께서 내게 왜 그랬는지 조용히 물어보셨다. 


제가 그렇게 배웠으니까요. 전 배운 대로 했을 뿐이에요. 그래야 교생들이 제대로 배우죠.


02 나의 초보 강사 시절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박사과정 학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처럼 학업과 출강을 병행했다. 나는 사범대와 교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몇 개의 강좌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매 학기마다 난 학생으로서 지옥 같은 수업을 따라가야 했기에 (내 강의를 수강했던 학생들에게 지금도 정말 미안하지만) 당시 강의는 생계 수단일 뿐이었고, 밤새 과제를 해야 했던 내게 강의 준비는 늘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맡았던 강좌는 주로 교과교육론이었다. 교과교육론은 사범대생과 교대생들이 듣는, 각 교과에 대한 이론적 틀을 세우는 강좌이다. 이 수업에서 학생들은 해당 교과의 목표, 그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 그리고 학자들이 만들어 온 수업 모형에 대해서 배운다. 


이 강좌에서 배우는 내용은 임용고사를 치르는 수험생이라면 달달 외워야 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솔직히 참 재미가 없다. 게다가 현장에서 가르쳐보지 않은 학생 입장에서는 가르치는 법(즉, 교수법)에 대한 이론을 이해하고 흥미를 느끼는 것이 쉽지 않기도 하다.


나 역시 현장 경험이 없었던 학부와 석사 시절 교과교육론을 참 지루해했다. 나는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그것을 가르칠 때 이론을 흥미롭게 가르치기 위해 노력하지 못했다. 난 교수자의 정체성이 아니라 학생의 정체성에 더 비중을 두고 살았기 때문이다.


강사로서 나는 매우 안일했다. 난 내가 느낀 점을 반영하여 내가 배울 때보다 더 나은 강의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난 그저 배운 대로 재미없게 가르쳤다. 임용고사를 준비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교과교육론은 어차피 암기해야 하는 대상인데, 누가 어떻게 가르치든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심정으로 꾸역꾸역 강의했다. 


교과교육론 강의는 대개 전반부에는 이론이 강의 형식으로 진행되고, 중반 이후에는 학생들이 배운 이론을 토대로 몇 개의 팀을 이루어 수업 시연을 준비하게 된다. 매 시간마다 학생들의 수업 시연이 끝나면 담당 교수자는 피드백을 한다. 


나는 강의는 그저 배운 대로 했으면서, 피드백만큼은 날카롭게 했다. 강의 내용은 내가 함부로 더하거나 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반면, 피드백은 온전히 내 재량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 와도, 5년의 현장을 경험했던 내 눈에는 실전이었다면 발생했을 구멍이 너무 많았다.


당시 내 짧은 생각으론, 그 문제를 내가 간과하면 학생들이 배우는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발표 당사자들 얼굴이 시뻘게지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지적하고 또 지적했다. 그때 내겐 학생들에 대한 배려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했다.


나의 독설은 학생들이 수업시연을 준비하는 동안 겪었을 어려움이나 준비과정에서의 좌충우돌 같은, 학습자로서의 ‘과정’은 거의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아직 프로가 되지 못했다는 ‘결과’로 그들을 평가했다.


나의 독설은 특히 교대 학생들에게 신랄했다. 나는 당시 교대 학생들의 살인적인 교육과정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은 채, 교사가 될 사람들이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을 왜 모르냐는 질책만 잔뜩 퍼부었다.   


당연히 강의 평가는 좋지 않았다. 내 말에 상처받을 대로 상처받은 학생들은 온갖 독설을 강의 평가에 쏟아냈고, 나는 언젠가부터 강의평가를 확인할 수 없었다. 나는 문제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기보단 외부에서 찾으며 책임을 피했다.


‘내가 시간 강사니까 무시하는구나. 지방까지 가서 힘들게 수업 해줘도 돌아오는 건 비난이구나. 앞으로 피드백할 것 10개 중 2개만 해야겠다.’



03 “제 롤모델이세요”


몇 년이 지나 나는 출산과 육아를 경험했다. 그리고 아이가 돌이 될 무렵, 다시 교대 강의를 맡게 되었다. 강의 복귀를 앞두고 지난 강의 평가 속 부정적 코멘트들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기가 우는 건 대부분 ‘엄마 나를 도와 주세요’의 신호임을 떠올렸다. 


학생들의 독설은 어려움을 헤아려달라는,  ‘도와 주세요’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나는 교대 학생들의 어려움을 떠올려 보았다. 개인적으로 교대 교육과정은 참 불가사의이다. 학생들은 그 속에서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배우고 암기하느라 깨달음을 얻을 여유가 없다. 그러다 보니 딱 떨어지는 정답 같은 지식에 길들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르친다는 것은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달하고자 하는 지식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학습자의 배경 지식도 고려해야 하며, 학습자들이 교수자에게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를 실시간으로 파악해서 완급 조절까지 해야 한다. 가르친다는 건 고차원적인 일이다.


그 빡빡한 교대의 교육과정을 2~3년 거쳐 왔다고 해서 티칭에 필요한 고차적 사고를 익힐 수 없음은 너무 당연한 것인데 난 학생들의 어려움을 몰랐다. 그건 나의 부족이었다. 그렇게 인정하자, 학생들이 수업 시연에서 범하는 공통된 실수들을 모아 지식의 형태로 가르쳐 주려는 작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난 참 못난 교수자였다. 고등학교 교사일 때는 학습자의 인지 과정을 세밀히 배려하는 교수자였지만, 교수법을 가르치는 강사로서 난 정작 ‘가르침’을 배우는 학습자들의 인지 과정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교수자였던 것이다. 


난 나의 강점이라 자부했던 슬로 러너로서의 관점을 전혀 살리지 못했다. 교대에서 교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는 학생들이 지식을 자기 것으로 소화시키는 충분한 ‘과정’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그럴 여유가 없음을 나는 헤아리지 않았다. 나는 내가 아는 것(content knowledge)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pedagogial content knowledge) 알지 못했던 교생 때와 달라진 게 없었던 것이다. 


난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기존 강의계획서를 내 방식대로 완전히 바꾸었다. 교사가 되려는 학생들이 알아야 할 꼭 필요한 지식이지만, 공식적인 교대 교육과정에서는 학생들이 결코 접할 수 없었던 지식. 그걸 내가 채워주기로 했다. 


‘사회’라는 교과가 왜 존재하는지 교재 속 딱딱한 언어가 아닌 살아있는 나의 언어로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교대 교육과정에서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어떤 책을 개인적으로 공부해야 하는지, 교과서가 왜 그렇게 구성되어 있는지 안내해 주었다. 


그리고 학생들이 배워온 교수법을 실전에서 활용할 때는 재량을 발휘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부엌의 신식 주방 기구가 아무리 많아도 귤껍질을 깔 때는 주방 기구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모든 수업 상황에서 거창한 교수법을 동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어느 날 강의를 마치고 주섬주섬 짐 정리를 하고 강의실을 나서려 할 때였다. 아직 강의실을 떠나지 않은 네 명의 학생이 쪼르르 달려와 짐을 들어주겠다며 나를 따라나섰다. 나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함께 밥을 먹었다. 그러던 중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제 롤모델이세요! 정말 제가 이때까지 교대 입학해서 들은 수업 중에 최고로 꼽고 싶어요. 



04 롤모델 선배가 되려면




‘교수님의 아름다운 구두가 참 인상적이었어요!’


독설 가득한 강의 평가 속에서 나를 정말 부끄럽게 했던 문장이다. 정말 그랬다. 교생을 지도하던 시절, 그리고 초보 강사 시절, 출산 후 강의를 맡았던 시절, 내겐 늘 같았던 한 가지가 있다. 나는 그 어느 순간에도 패션을 사랑하는 내 모습을 버리지 않았다. 


난 늘 멋진 모습이고 싶었다. 어쩌면 난 나의 부족한 전문성을 옷으로 커버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난 더 멋있고 더 강해 보이고 싶었기에 사실은 강의 준비보다 옷차림에 더 신경 썼다. 그러나 내가 다양한 곳에서 만났던 ‘후배’들은 아무리 내가 전문성을 가장하는 옷을 입고 있더라도 내가 그들을 헤아려주지 못함에서 나의 부족한 전문성을 발견했던 것 같다.


우린 누구나 선배가 된다. 학교 또는 직장 선배로, 선생으로, 상사로, 또는 부모로. 우리는 많은 경우 선배가 되었을 때 후배의 어리숙한 모습을 보며, 자신이 후배일 때 들어야만 했던 독설을 자기도 모르게 재생산한다. 


교생 지도를 하고 대학에서 강의에 임할 때의 모습은, 내가 들었던 독설을 그대로 답습한 선배의 모습이었다. 후배들의 어리숙한 ‘과정’이 충분히 영글어야 훌륭한 ‘결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모든 조건이 다 갖춰졌는데 왜 이걸 못 해?

나는 느린 사람이기에 성급히 ‘결과’로 평가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개구리 올챙이적 시절을 다 잊은 채 나는 그저 나의 독설 한 마디면 훌륭한 ‘결과’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과’만을 평가했던 나에게 돌아왔던 학생들의 독설은 내가 몇 년 후 더 나은 선생으로, 혹은 더 나은 선배로 영글어 갈 ‘과정’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 중심의 평가였다. 내가 ‘결과’만 보았을 때, 그들 역시 내가 되어가는 ‘과정’엔 관심이 없었다.


우리가 유능한 사람이 된다는 것의 이면에는 ‘결과’ 중심 평가라는 냉엄함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일을 한다. 나 홀로 능력자로만 살아갈 수 없으며, 우리는 선배이기도 해야 한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은 ‘과정’ 중인 우리가 이미 ‘롤모델’이라는 찬사를 받는 선배가 된다는 것. 그것은 후배들의 ‘과정’을 헤아려주는 사려 깊음을 요구한다. 


내가 선배이던 그 모든 순간 내가 사랑했던 패션은 나를 멋진 선배로 만들어주지 않았다. 내가 독설을 거두고 ‘과정’을 헤아릴 줄 아는 선배가 되었을 때, 비로소 패션은 내게 ‘롤모델’이라는 시선을 허락해 주었다.  


지금 난 교사도 교수도 아닌 길을 걷는다. 그러나 옷 입기에서 어려움을 경험하시는 분들께 ‘건강한 의생활’을 삶을 살기까지의 노하우를 전하는, 누군가의 선배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쇼핑중독자였다. 그러나 부끄럽지 않다.


2년 전 내가 쇼핑중독에 대한 에세이를 쓰고 이런 저런 출판사에 출간 제안을 했을 때 한 출판사로부터 거절 메일을 받으며 이런 피드백을 받은 적이 있다. 


왜 (못난) 개인적인 이야기를 이렇게 많이 썼나요? 


아마도 나의 못난 ‘과정’이 패션 작가의 전문성 부각에 도움될 것 없으리란 시각이 반영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나의 쇼핑중독 극복기라는 못난 ‘과정’ 때문에 나를 찾아 오시는 분들이 있음을 목격한다. 

저 사람이라면 나의 ‘과정’을 보여줘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아. 


자신의 못난 ‘과정’을 헤아려주는 선배. 그게 진짜 ‘롤모델’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 좋은 선배가 되어 가는 ‘과정’ 중에 있다. 가끔 옛 모습이 나올 때도 있어 누군가의 ‘과정’을 따뜻하게 감싸주자고 매일 다짐한다. 


난 누군가의 현재에서 내 과거를 보고 누군가의 ‘과정’을 격려해주는 사람이 되기를 꿈꾼다. 옷에서 힘을 빼고도 멋있는 ‘롤모델’. 그게 지금 내가 꿈꾸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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