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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리 Sep 19. 2017

누군가의 여행 사진에 다는 마음속 댓글

‘진짜 멋있는 삶’을 꿈꾸며(2)



01 나에게 ‘문학’이란




어릴 때부터 난 학교에서 배우는 ‘문학’이 싫었다. 


그런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영어 공부나 하자며 신청했던 수업 중 ‘영미단편소설강독’이란 영문과 교양 과목이 있었다. 나는 그 수업이 영어가 아니라 문학 수업임을 알고 후회했고, 듣는 내내 정말 고전했다. 그러나 ‘영미단편소설강독’에서 나는 처음으로 작가가 표현한 작품 속 메시지가 나의 경험과 만나 생기는 울림에 집중하는 법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비록 학점은 그저 그랬지만, 이후 나는 도종환 시인과 정호승 시인의 시에 빠져 살았고, 동아리 게시판에 감상을 끄적거릴 정도로 문학을 즐겼다. 나중에는 감상의 대상을 영화로 확대하여, 나의 싸이월드와 블로그는 영화 리뷰를 쓰는 나만의 공간이 되어 갔다.  


그런데 즐거움이 커 갈수록 분노라는 감정이 몰려왔다. 그리도 ‘문학’을 오랫동안 학교에서 배웠건만, 즐거움을 경험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선생님이 불러주는 대로 밑줄 긋고 받아 적기에 바빴던 그 ‘문학’은 내가 작품을 읽으며 누릴 ‘느낌’의 자유를 송두리째 박탈해버렸다. 나는 감상의 대상으로 ‘문학’을 대하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참고서 속 깨알 같은 빨간 글자들을 암기했어야 했다. 나는 내게서 ‘문학’을 감상할 권리를 빼앗았던 주입식 교육 방식에 너무 화가 났다. 


작가가 자연으로부터, 삶으로부터 무엇을 느꼈는지, 그것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글에 어떻게 표현한 것인지. 읽고, 생각하고, ‘느낌’의 자유가 박탈된 채, 의미를 알 수 없는 강요된 미학을 암기하고 시험을 쳤다. 


내가 ‘문학’이란 과목을 싫어했던 건, 애당초 정답과 오답이 존재할 수 없는 영역에 그 잣대를 들이대고, 학생들의 ‘느낌’을 점수 매기는, 말도 안 되는 평가 방식에 대한 반발심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문학을 향유하는 법을 힘겹게 배우며 깨달은 것이 있었다. 돌아보니, 내가 싫어했던 ‘문학’이란 과목은 느낌의 대상으로써 ‘문학’을 논하는 과목이 아니었다. ‘정답과 오답’이란 이분법적 잣대로 ‘느낌’의 우열이 평가되는 순간 그것은 ‘문학’이 아니다.


‘문학’은 텍스트의 인쇄에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체험한 삶이 작품과 공명하는 ‘느낌’이라는 것이 더해졌을 때 완성되고, 진짜 ‘문학’이 된다. 결국 내가 싫어했던 건 ‘문학’이 아니라 독자에게 ‘느낌’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던 ‘입시용 텍스트’였다. 




02 그들의 ‘여행’, 부럽다




내가 치유를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하던 무렵, 글 쓰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친구가 여행 에세이집을 선물해준 적이 있다. 여행 에세이를 처음으로 접했던 난 여행 에세이의 매력을 알게 되었고 몇 권의 여행 에세이집을 읽게 되었다. 


나도 여행을 다녀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생각과 고민이 많던 그 시기에 여행 에세이집을 읽으며 ‘여행’이란 것의 의미를 새로이 확립해 보게 되었다. 여행 작가들의 에세이를 읽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여행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낯선 곳의 길과 풍경, 음식, 그곳의 과거와 현재 속 사람들을 만나고, 마지막에는 그곳에 대한 여행자의 ‘느낌’을 더하는 것.


바로 그런 게 ‘여행’ 임을 몇 권의 책에서 작가들이 말하고 있었다. 작가들은 자신의 ‘느낌’을 각자의 언어로 풀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 에세이를 읽는 내내 책이 끝나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그리고 책의 끝으로 갈수록 내 가슴은 뜨거워졌다. 아마도 그 이유는 ‘나도 가고 싶다’가 아니라, ‘나도 느끼고 싶다’는 ‘느낌’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소위 ‘지름 샷’ 하나 없는 그들의 ‘여행’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한 권의 책에선 작가가 샀다고 언급한 물건이 하나 있긴 했는데, 그건 영화 <향수>의 배경인 지역에서 그 지역 고유의 방식으로 제조한 향수였다. 그 마저도 여행 중 ‘느낌’의 연장이라 (그리고 향수의 사진이 없어서 더욱) 물건이 아닌 감성으로 다가왔다. 


만약 책 속에 현지에서 구입한 루이뷔통이나 샤넬 백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패션 좋아하는 내가 ‘전혀 부럽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 부러움은 다른 부러움이다. 그런 건 돈만 있으면 구입이 가능한 것들이고, 도둑맞을 수도 있으며, 결정적으로 그 물건이 준 즐거움은 타인과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새겨버린 자신만의 ‘느낌’은 돈이 있다고 구입 가능한 것도 아니고, 누구도 훔쳐갈 수 없다. 여행지에서 얻은 ‘느낌’은 온전히 자신이 만들어가는 자기만의 것이고, 스스로가 기억에서 지우기 전엔 아무도 그것을 해칠 수 없다. 오히려 그 ‘느낌’을 글로 남겨 타인과 나눌 수 있으니, 여행 중 ‘느낌’은 ‘지름 샷’ 속 물건보다 더 차원 높은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까.



03 여행 속 ‘느낌’을 나누다


여행 에세이를 읽으며 되새겨본 여행의 의미를 떠올려보니, 여행이란 것이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가치 있는 이유가 뭔지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 <안경>에서는 도시의 삶에 찌든 한 여성이 외딴섬으로 떠난 여행 이야기가 소개된다. 주인공 여성은 그 섬의 삶의 방식을 매우 낯설어 하지만, 그곳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나는 영화를 보며 우리는 우리를 평생 얽어매던 문화적, 또는 제도적 시선이 존재하지 않는 낯선 곳에 가서야 내면 저 깊이에 존재하던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만나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여행은 낯선 공간, 낯선 문화 속에서 호흡하며, 자기 문화에 갇혀 드러나지 않던 자신의 모습을 알아가는 값진 ‘느낌’을 경험할 기회가 아닐까. 


지난 20년 간 내가 여행한 곳에서 난 무엇을 얻어 왔나 돌아보았다. 1996년 영국에선 느린 한국 사람인 내가 사실은 매우 성질 급한 사람임을 깨달았고, 2007년 필리핀에선 내가 노출 의상을 즐기는 대담한 면이 있음에 놀랐으며, 2007년 미국 뉴욕에선 유명하지 않은 작품에 빠져드는 나의 독특함을 발견했다. 그리고 2014년 베트남 호찌민에선 나의 동남아 음식 취향을 발견하곤 즐거워했다. 


열거하고 보니 ‘느낌’의 수준이 정체성 발견 언저리도 못간 것 같아 부끄럽다. 그런데 그 모든 곳에서 내가 느꼈던 공통적인 그 무엇이 있다. 나는 고독했다. 너무 재밌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 내 뒤통수를 탁 치는 듯한 어떤 문화적 충격을 느꼈을 때, 혼자 보기 아름다운 광경을 마주했을 때 그리고 그것에서 오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희열을 느꼈을 때. 결국 그로부터 몰랐던 나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되었을 때 난 그 ‘느낌’을 누구와 나눠야 할지 몰랐다. 


2014년 호찌민 어느 횡단보도에서 왠지 모르게 슬픈 아름다움을 놓치기 싫어 담은 사진. 그러나 사진 속에 담기지 않은그 순간의 '느낌'을 누구와도 나눌 수가 없어 정말 고독했다.


여행 작가들도 아름다운 순간, 또는 자신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던 ‘느낌’의 순간마다 그런 고독을 느꼈을지 모른다. 어쩌면 자신의 ‘느낌’에 함께해줄 누군가를 찾기 위해 그들이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래서 결국 여행 작가란 직업을 얻게 되지 않았을까.


한편 에세이 속 여행에 독자로서 동행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란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여기선 통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여행은 남들이 뭐라고 평가할 기준이 없는, 그들 자신의 것이니까. 


만약 여행 작가 중 누군가가 샤넬백이라도 샀으면 어땠을까

재미있는 질문을 던져봤다. 그러면 그때부턴 누가 얼마나 고가의 백을 현지에서 싸게 샀느냐(그리고 세관은 무사히 통과했느냐)를 가지고 이기고 지고가 판가름 나는 여행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행에서 작가들이 얻어온 건 화폐나 숫자 같은 어떤 절대적 잣대로 평가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여행과 여행에서 얻어온 ‘느낌’이 알량한 잣대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듯, 내가 세계 어디를 여행하든 나만의 색깔, 내 ‘느낌’을 입힌 나만의 여행 또한 아무도 평가할 수 없는 것이리라 믿는다.  




아무도 평가할 수 없는, 아무도 훔쳐갈 수 없는 나만의 여행. 지금까진 그녀들을 부러워했지만, 앞으로의 여행에선 나 또한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그곳에서만 가져올 수 있는 그 찰나의 ‘느낌’을 가슴에 새기고, 나만의 언어로 남겨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그들의 여행이 부럽지만 부럽지 않다.




04 그들의 ‘지름 샷’ 


10년 전까지만 해도 우연히 검색을 타고 들어간 타인의 블로그에서 외국 여행 중 사온 값비싼 명품의 ‘지름 샷’이라도 접하게 되면, 한없이 부러워 했었다.


언젠가 지인의 지인의 신혼여행 스토리를 듣고 정체불명의 불편함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들의 신혼여행지는 유럽 이곳저곳이었고, 오로지 목적은 쇼핑이었다. 그들이 유럽에서 사 온 것은 롤렉스시계와 버버리 트렌치코트, 그리고 샤넬백이었다. 돌아올 땐 세관의 타깃이 되지 않기 위해 허름한 옷차림으로 자신들의 정체(?)를 숨겼다. 


엄청난 ‘득템’을 했다는 그 얘길 들었을 때 물론 부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난 그들의 ‘물건’은 부러워했지만, 그들의 ‘여행’은 부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이 여행을 통해서 얻은 ‘느낌’이 무엇인지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으니까.


그 커플은 여행이 아니라 ‘원정쇼핑’을 한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엄청난 ‘득템’을 하고 불특정의 누군가의 부러움을 사고 불특정의 누군가를 이기는 ‘위너’가 되기 위해 스스로 ‘느낌’의 자유를 헌납했던 건지도 모른다.




독자에게 ‘정답과 오답’이라는 이분법적 가치를 들이밀며 ‘느낌’의 자유를 박탈하는 입시용 텍스트가 결코 ‘문학’ 일 수 없듯, 여행자가 ‘느낌’의 자유를 헌납한 원정 쇼핑 역시 진짜 ‘여행’ 일 수 없다.


여행 후 진정 자랑할 것은 한 장의 ‘지름 샷’에 담기지 않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자기 마음속 여행가방에 담아 오는 것. 그게 진정한 의미의 ‘여행’에서 할 수 있는 진짜 ‘쇼핑’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공허한 글과 대단한 ‘지름 샷’을 발견하면, 주눅들기보단 씩 웃으며 조용히 마음속의 댓글을 남겨볼까 한다. 


‘여행’....은 못하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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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샤넬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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