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멋있는 삶’을 꿈꾸며(3)
중학교 때 난 뜻하지 않게 전학을 갔다. 내가 전학을 가자 아이들은 갓 전학 온 내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나의 직설적 말투와 까칠한 성격은 새 학교에선 문제가 되었다.
신발장의 실내화가 사라지는 일도 있었고, 교실 뒤에 전시되어 있던 나의 데생 그림을 누군가가 지우개로 지워버린 일도 있었으며, 화장실 험담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나는 불가피하게 혼자가 되어 갔다. 점차적으로 혼자임에 익숙해졌고, 혼자임을 즐기며, 여자 아이들의 유치한 ‘끼리끼리’ 문화를 관찰하며 나름 객관적으로 그 현상을 분석해 보기도 했지만, 우울한 건 부인할 수 없었다.
또래문화가 큰 비중을 차지하던 시기를 보내던 난 괴로웠고,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마침 엄마는 ‘엄친아’가 서울의 외고에 다닌다며 내게 바람을 넣었다. 난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에 서울 유학을 결심했다. 그러나 결과는 불합격이었고, 아이들의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새로 시작하겠다는 나의 바람과 달리 얼마 후 난 우리 학교 아이들이 가장 많이 진학하는 여고에 입학했다. 그럭저럭 잘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이 되려는 즈음, ‘롤링 페이퍼’ 두 장이 내 책상으로 전달되었다. 그 종이에는 나를 향한 부정적 감정이 가득했다. 당시엔 그저 불쾌했지만, 그해 여름 방학 내내 내 가슴을 울린 건 나 스스로를 향한 책망이었다.
왕따가 반복되어선 안 된다.
나는 살아남고 싶었다. 1학년 2학기가 되자 나는 나의 평판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도시락 반찬을 나눠먹었고, 자습 시간에 떠드는 아이들 틈에 껴서 그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으며,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문제를 함께 풀고 가르쳐줬다. 성적은 떨어졌고 그로 인해 부모님과 선생님께 이런저런 말을 들어야 했지만, 아이들은 나의 노력을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그 뿌듯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2학년이 된 나는 반장이 되었다. 우리 반에는 중학교 3년 내내 반장을 했던 Y가 있었다. 그런데 Y는 어찌된 영문인지 늘 흰 자위를 굴리며 선생님들께 반항을 했고, 반 아이들 1/4을 모아 패거리를 만들어 ‘통치’했다.
담임선생님은 우리 반 아이들을 방치했다. 결과적으로 Y의 반항은 모조리 반장인 나의 몫이었다. 반장인 내가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려고 하면 Y는 늘 딴지를 걸었고, 매 수업시간마다 각종 사건으로 소란을 일으켰다.
학교생활이 버거웠던 어느 날, 친구 J로부터 몇 해 전 Y와 나 사이에 있었던 뜻밖의 에피소드를 전해 듣게 되었다. 나는 Y와 같은 중학교를 다녔고, 간부 수련회에서 우리는 만난 적이 있었다. 나와 같은 소그룹에 속했던 Y는 그 수련회가 끝났을 무렵 나와 많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개학을 하고, 학교 복도에서 나와 마주친 Y는 나를 보자,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나 난 제대로 통성명을 한 적이 없던 Y와 어떻게 인사를 나눠야 할지 몰랐고, 당황하여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냥 지나쳤다. 오랫동안 내 내향성을 인지하지 못했던 난 Y를 복도에서 갑자기 마주쳤을 때 인사를 나눌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그녀의 적극적 인사에 고마운 마음보다 수줍음이 앞섰다.
그런 걸 알 리가 없던 Y는 그때 복도에서 내게 느꼈던 서운함을, 몇 해가 지나 우리 반 ‘패거리’ 대장이 되어 제대로 앙갚음하고 있었다. 어쩌면 Y는 자신이 아닌 내가 반장인 것이 못마땅하고 질투가 났던 건지도 모른다.
난 그 얘길 전해 듣곤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그때 난 그 아이의 섭섭함을 적극적으로 달래줄 만큼 대범하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뭔가 노력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때의 난 Y와 이미 그렇게 틀어져버린 관계에 대해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해 버렸다.
몇 년이 지나 대학을 졸업하고 20대 중반이 된 난 고등학교 기간제 교사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패션을 사랑했던 난 드디어 첫 직장에서 돈을 번다는 기쁨을 비싼 가방과 화려한 옷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당시 어느 중년 여선생님들은 젊은 여교사들이 학생들의 관심을 빼앗아 간다는 것에 대한 상당한 위기의식과 질투심을 느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러나 난 그런 어려움을 헤아려 드리고 뭔가 노력을 하기보단 미련하게 나의 기쁨에 도취되어 있었다. 결국 난 모든 중년 여교사들의 ‘적’이 되었다.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에는 내가 단지 직장의 드레스 코드를 맞추지 못했던 눈치 없음과 내 대인 기술의 부족에서 나쁜 평판의 원인을 찾았었다. 그러나 조금 더 세월이 지난 후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이 있었다. 대인관계에서 반복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면서도 그 원인에는 늘 무심했었다. 그건 온전히 내 잘못이다.
돌아보면 학창 시절 내가 학교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다. 나보다 뛰어난 친구들도 있었는데, 그 친구들 모두가 질투의 대상이 되거나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그런데 나만 반복적으로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왜 그랬을까?
너와 친해지고 싶어!
나를 향한 부정적인 감정은 원래는 친밀함에 대한 갈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질투 이면에는 그리고 나와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것이다. 돌아보니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나는 부정적인 감정 표현을 받기 전까지 상당한 관심을 받았었다.
그러나 난 그런 관심을 부담스러워했고, 움츠려 들기만 했다. 그때 나에게 부족했었던 건 타인의 마음을 읽어주려는 태도였다. 난 나의 낯가림을 핑계로 타인의 갈망과 소통 의지를 외면하기만 했다.
이렇게 원인을 해석하고 보니, 내게 필요한 태도가 무엇이었는지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선망이라는 감정이 모양이 바뀌어 질투 혹은 미움으로 표현되는 것이라면, 내게 필요한 태도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능동적 태도, 마음을 헤아려주는 공감의 능력, 그리고 나의 노하우를 기꺼이 공유하려는 열린 태도였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완벽하지 않고 어리숙함을 스스로가 내보이는 솔직함이 더해지면 금상첨화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품기 전 사람들이 원래부터 바랐던 건 그 대상과의 소통이었을 것이고, 친구가 되는 것이었을 테니까. ‘반전 매력’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닐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향한 관심에 무관심이 돌아온다면 사람들은 소통의 단절로부터 좌절과 실망감을 경험하게 된다. 그 실망은 미움으로 바뀌고, 가급적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람의 흠을 알림으로써 그 대상을 끌어내린다. 미움이라는 부분에는 나의 책임이 분명히 있었다.
언젠가 한 다큐멘터리에서 메디치가의 궁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대 메디치가의 궁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소박했던 것이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당시 두오모 성당을 설계했던 천재 건축가 브루넬레스키의 도안을 거절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궁전이 지나치게 화려하면 시민들 사이에서 시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메디치가는 불평등과 그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이 그들의 건재를 위협할 수 있는 갈등의 씨앗임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러한 신념을 반영하듯, 궁전의 가장자리에는 마부들이나 시민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돌 재질의 벤치가 둘러져 있다. 메디치가의 이러한 전략은 그들이 누렸던 꽤 긴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원래 난 질투의 대상이 아니라 질투의 주체였다. 내가 살던 곳은 부산에서도 높은 소득 수준과 교육 수준의 사람들이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거주하는 동네였다.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부류에 속했던 난 엘레쎄 운동화에 게스 청바지를 입고 고급 승용차로 등교하는 친구들을 한없이 부러워했다.
당시의 감정을 떠올려보니 난 그 친구 중 누구와도 마음을 나눈 적이 없다. 6학년 때 절친마저 엘레쎄를 신고 나타나자 내 맘에 남은 건 내겐 그 청바지와 그 운동화가 없다는 상대적 박탈감이었다.
10년이 지나고, 그때의 엘레쎄-게스 친구들은 아이러브스쿨(2000년대 초반 유행이었던 동창 찾기 사이트) 동창회에 페라가모 구두-구찌 핸드백으로 업그레이드하고 나타났다. 난 그 친구들과 친구가 될 수 없음을 금방 알아차렸고, 그 이후 그 모임에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어릴 때처럼 난 역시 주류에 낄 수 없었지만, 성인이 된 그땐 내가 그들 중 하나에 속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의 그 박탈감은 오래도록 남았나 보다. 내가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하던 20대 중반, 화려하고 비싼 옷을 입고 비싼 가방을 들었다. 나의 질투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기보단 오히려 질투 장치를 재생산했던 것이다. 당연히 나의 패션은 나를 향한 부정적 시선을 배가시켰다.
‘옷차림도 전략이다’, ‘외모가 경쟁력이다’는 말을 우리는 꽤 자주 접한다. 그러나 그 ‘전략’이란 표현은 대개의 경우 하이엔드 패션으로 무장하기 혹은 성형수술로 나를 돋보이게 하기 등의 전략으로 통용되는 듯하다.
물론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가꾸는 마음은 박수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타인을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나 홀로 돋보이려 하는 패션은 (꼭 질투심이 아니더라도) 타인의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할 뿐이다. 인간(人間)이란 말에는 사이 간(間)이 들어간다. 이는 우리가 인간인 이상 홀로 살아갈 수 없으며 타인과의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진정 행복을 경험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정말 출중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나 존경을 받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나중에 깨달은 건, 타인으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는 ‘능력자’일수록 차별화된 패션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럼 질투보다 호감을 부르는 패션 전략은 무엇일까?
저, OOOO 밖에 안 입잖아요.
이런 말엔 어색한 침묵이 뒤따른다. 내가 어릴 때 경험했듯 비싼 옷, 소위 말하는 ‘나 명품이야’라는 메시지를 대놓고 발하는 옷은 나와 친해지고자 하는 타인의 마음을 읽어주는 공감과 소통의 기회를 박탈한다.
사실 이거 69000원 짜리예요.
비싸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지만 왠지 모르게 멋스러워 보이는 옷차림, 소박한 옷에 더한 자신의 스타일링 비결을 거리낌 없이 내놓는 개방적 태도. 메디치가의 궁전이 그랬던 것처럼 이런 태도야 말로 나를 향한 미움을 피하고 내 매력지수는 올리는, 보다 인간(人間)적인 패션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고압적인 브랜드 로고로 주위 사람들의 박탈감을 유발하는 사람보다, 특유의 패션 센스로 소통의 기회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을 조금 더 자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을 향해 엷은 미소를 띠는 날이 더 많아지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