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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한수 Nov 21. 2020

그냥, 싫다

떠올리기도 싫은 퇴사 사연

박사과정을 마쳤을 때, 어떤 패배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히 현장연구를 마치고, 학위논문을 끝내기는 했지만, 정말 원하는 것을 이루었는지 확신이 없었고, 대체 내가 이런 논문으로 뭘 더 할 수 있는지 막연하기만 했기에 스스로를 열심히 폄하하던 시간이었다. 세계에서도 이름난 대학에서 학위를 마친 백인들이 주를 이루는 사회에서 살아남을 자신도 없었고, 발을 디딜 작은 공간도 없다는 생각까지 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때는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느낌을 딱히 해석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마음을 정리할 틈도 없이 구직활동에 뛰어들었다. 무조건 학교가 아닌 곳에서, 무조건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는 자리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정말 100통 이상의 원서를 썼고, 네 번의 인터뷰, 그리고 두 번의 2차 인터뷰를 봤는데, 끝내 내 손에 들어온 자리는 없었다.


좋은 경험이었다. 덕분에 지금도 커버레터와 레쥬메는 달인처럼 쓸 수 있게 되었고, 수많은 단체와 국제기구들을 알게 되었으며, 온라인으로 면접을 보는 경험도 쌓았던 것 같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때 나는 직업이 없이 귀국해야 했고, 뭔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상태로 부모님을 대하고 지인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에 어떤 수치심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다.


시차 적응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던 어느 날 밤. 귀국 후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던 그 날 나는 다급한 마음으로 밤중에 원서를 썼다. 스스로 제대로 된 직장을 잡을 능력이 안되는 것 같은 어마무시하게 과장된 공포 속에서 접수했던 그 원서는 결국 면접의 기회를 가져왔고, 한 달 후에는 그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


처음부터 만족스러운 곳은 아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거기서 상처를 많이 받고 나왔다. 생각해 보면 3-4개월이 지난 시점부터 뭔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긴 했는데, 스스로 너무 자신감이 없던 시절이라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올 자신도 없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면서 느끼는 보람과 만남에 감사함을 느낄 때도 있었기 때문에, 직장 안에서 대하는 사람들과 그들과 나의 차이는 애써 참아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게다가 함께 입사한(또 나중에 함께 퇴사한) 동료와 직장을 넘어 이어갈 수 있는 우정과 인연을 맺으면서 서로를 지지하고 도왔던 것이 큰 힘이었다.


하지만 끝내 그곳에서 내가 받아야 했던 대우, 그리고 들어야 했던 말들을 참아내기가 어려웠다. 마지막에는 한 달에 5킬로 이상 체중이 빠지고(결국은 8킬로가 빠졌다), 식사하고 잠을 자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했으며, 사무실에 들어가는 것이 끔찍해서 옆 건물 복도에 들어가 울면서 59분이 되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동네 의사가 결핵인 줄 알고 오만 검사를 다 한 후 일부러 전화를 걸어서 검사 결과는 정상이라고 말해주면서도 뭔가 걱정스러워할 정도였다. 너무나 괴로웠다.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내게 무슨 말을 했고 그게 어떤 의미인지 상상하지 못하는 이들과 계속 말을 섞으면서 일해야 하는 것도.


난 지금도 그곳을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이제 다른 경력을 더 긴 시간 동안 이어가고 있기에, 그곳에서 일한 경력은 레쥬메에서 아예 빼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그때 들었던 날카로운 말들 하나하나가 잘 기억이 나지도 않는데, 그럼에도 그냥 떠올리는 것 자체 싫다는 느낌이 든다. 그냥,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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