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미안 Oct 27. 2024

어떤 우정은 사랑을 닮았다.

<스물다섯 스물하나>속 희도×유림에 대하여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인 펜싱에 몰두하는 어린 학생이 있다. 이 아이는 IMF로 세상이 시끄러운 와중에 꿈과 동경을 품고 밝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나희도. 펜싱 실력은 평범하지만, 펜싱 천재 소녀로 각종 국제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고유림의 라이벌이 되고 싶다는 꿈을 품고 있다. 다소 허무맹랑한 꿈이지만, 그 꿈은 희도에게 새로운 세계와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편, 넉넉치 않은 집안에서 자라 부모님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면서도 투철하게 펜싱에 몰두하는 어린 학생이 있다. 이 아이는 부모님의 적극적인 지지에 부채감을 느끼고 있다. 아이는 펜싱을 잘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고, 그렇기에 이 아이가 펜싱을 대하는 태도는 희도와는 사뭇 다르다. 아이의 이름은 고유림. 펜싱 천재로 이미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인재다. IMF로 고등학교 펜싱부가 없어지는 와중에도, 고유림이 있는 펜싱부만큼은 없앨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유림은 어린 나이에 과한 관심속에서 그저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해나가는 중이다. 



말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

이런 두 사람이 친해질 수 있을까? 앞서 소개한 두 인물은 TV N의 기획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중심 인물로 작중에서 “요란스러운 우정”을 만들어나간 장본인들이다. 두 사람은 오랜 시간 서로의 마음을 나눈 절실한 친구이면서, 같은 팀이자,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라이벌로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중심인물들이다. 서로 너무도 다른 세계를 살아온 두 사람은 요란하게 싸우고 요란한 화해를 한 이후에야 비로소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IMF로 떠들썩했던 어떤 시기를 지나온 젊음의 이야기를 회고의 형식으로 담아낸다. 이 회고속에서 내게 많은 인상을 남긴 건, 희도와 유림의 관계다. 막막한 시대, 어둠속에서 희도는 유림의 세계로 먼저 다가가고, 유림은 갑작스레 다가온 희도와 충돌한다. 수없는 충돌속에서 천천히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고 곧 누구보다 서로의 처지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친구가 된다.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아왔고, 다른 태도로 삶과 펜싱을 대했던 두 사람은 수없이 많은 충돌을 거쳐 마침내 이해에 이른다. 둘의 관계가 깊어진 이 시점부터, 세상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두 사람에겐 그들의 말도 중요치 않고,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더 이상 어떤 해명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서로가 꽉 쥔 사브르가 맞닿는 감각만으로도, 그 칼 끝의 예리함을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둘은 서로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열심히 해왔구나. 그리고 그만큼 힘들었겠구나. 굳이 네가 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 내가 겪었던 걸, 너도 겪었겠지.”



어떤 우정은 사랑을 닮았다

<스물다섯 스물하나>속 애정하는 두 사람을 보며, 문뜩 어떤 우정은 사랑을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에로스가 배제되었을 뿐, 어떤 우정은 가벼운 정념으로 시작해서 미적지근하게 식어버리는 사랑의 감정보다도 더 뜨겁고, 더 열렬하고, 더 단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함께. 그리고, 어쩌면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어갈 수록 사랑보다도 더 찾기 힘들고 귀한 감정이 바로 이 우정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덧붙여 본다. 서로를 향한 열렬한 지지, 이해, 헌신. 치열한 사회를 살아가다보면 그런 감정을 발견하기가 좀처럼 힘들다. 특히, 우리 사회는 매번 한정된 자원을 두고 투쟁하는 제로섬 게임의 연속이다. 함께 이겨내자고 말하기엔, 기회는 부족하고, 현실은 가혹하고 무겁다. 그래서인지 사회, 특히 회사에서 만난 동료들과는 언제나 서로를 향한 이해理解가 아닌 각자의 이해利害에서 비롯된 작은 벽이 생기게 된다. 


그 이해의 벽을 넘어설 때에만 사랑에 가까운 우정이 가능해지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어느 시점이 되면 너무 힘겨운 일이 되어버린다. 오랜 시간을 지나 국제 대회 결승전에서 만난 희도와 유림의 짧은 포옹을 보며, 이제는 너무 희미해져버린 순수한 우정의 깊이를 가늠해본다. 저런 벅찬 우정의 감정을 느껴 본 게 언제였던가. 서로를 말없이 끌어안으며, 말하지 않아도 너의 고통을 알고 있노라고 말해준 게 언제였던가. 그리고 그런 말을 들었던 것은 또 언제였던가.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이런 관계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진 것 같다. 내 한 몸을 간수하기에도 벅차서, 차마 이해하지 못했던 동료들을 떠올려본다. 그래. 흠결이 많은 나의 과거는 뒤로하고, 우선 내가 “그 애의 세계로 가”는 게 먼저일 것이다. 그저 함께하는 동료가 아닌, 목표와 뜻을 공유하며 서로의 고통을 누구보다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친구들을 향해. 그들에게 용기를 내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그 고통을 나누고, 서로를 보살피며 어찌할 수 없는 폭력에 함께 맞서주고 싶다.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온 우리의 마음을 그 누구도 감히 함부로 오해하고 오도하지 못하도록.


- <스물다섯 스물하나>, TVN, 2022

이전 20화 시간을 되돌려, 목적지를 재탐색하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