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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Jun 20. 2024

내가 떠나온 것





 아바나 해안가를 걷고 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야 할 곳을 미리 정해 둔 것도 아니었다. 한낮의 태양이 살갗을 태우다 못해 녹여 버릴 기세로 무자비한 열기를 쏟아 내고 있다. 하물며 길 위에는 잠시 땀을 식힐 만한 한 뼘짜리 작은 그늘 하나 드리운 곳 조차 보이지 않는다. 뿐인가, 떠돌이 개들이 제 집 화장실인 듯 싸질러 놓은 개똥 무더기가 군데군데 지뢰밭처럼 도사리고 있어 ‘그쯤 한 두번 밟으면 어때’ 하는 쿨한 성격이 아니라면 그마저 신경 써 걸어야 한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시멘트 바른 허리춤 높이의 제방이 이어지는 그저 흔한 길이다. 그래도 어쩌다 하늘과 바다가 전부인 풍경 속에서도 이따금 마음에 드는 하늘, 구름이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이 있다. 그럼 핑계 삼아 사나운 햇빛 아래 잠시 맘춰 숨을 고른다. 그럴 때도 입에서는 ‘거 진짜 XX게 덥기도 하다’는 볼멘소리가 어김 없이 터져 나온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무튼, 이글이글 타오르는 7월의 아바나를 몇 시간 째 걷고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걷다 보니 생기는 욕심. 사진을 찍는 사람들, 꼭 그렇지 않더라도 도보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마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어느 정도 걸었다 싶으면 스멀스멀 마음 한켠에 피어 오르는 '조금만 더' 하는 욕심. 이 욕심은 웃기게도 별 볼일 없을 때, 볼거리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더 강력한 힘을 발한다.

 ‘뭔가 있겠지?’ ‘이왕 이만큼이나 걸어왔는데 조금만 더 가볼까’, ‘그래, 저 앞까지 조금만 더 가보지 뭐’ 하던 한 걸음이 쌓이고 쌓여, 어쩌다 보니 몇 시간째 이러고 있을 뿐이다. 딱히 그럴 듯한 이유 같은 건 없다. 길이 끝날 때까지 아무런 이유가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럴싸한 이유 한두 개쯤 걷다 보면 불쑥 생겨날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굳이 하나를 꼽아 보자면, 한 여행이 끝나면 기억에든 기록으로든 별로 남은 게 없었다는 바로 그 이유로 오히려 기억에 남기도하고, 또 그런 시답잖은 기억 몇 개가 합해지면 훗날 떠올리기에 그럴듯한 추억이 되기도 한다는 걸 경험치로 알게 됐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랄까.


 몇 시간이 흐른 지금이라고 그다지 변한 건 없다. 멀어지는 풍경도, 다가오는 풍경도 모두 처음과 별반 다르지 않다. 곁을 지키는 풍경이라곤 여전히 끝도 없이 이어지는 턱이 낮은 제방과, 제방 아래 아득하게 펼쳐진 바다가 전부다. 흘러간 시간 속에서 달라진 건, 어느새 한풀 꺾인 태양의 기세 하나뿐이다. 뜨겁다 못해 정수리가 얼얼해지도록 쏟아 붓던 열기는 그사이 제법 너그러워졌다.


 밤을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맹렬하게 끓어오르던 검붉은 태양은 마음을 바꿔 얼굴에 요염한 보라색 물을 들였다가, 이제는 말캉말캉한 분홍색 노을을 뱉어 냈다. 망막한 바다는 나란히 물들어 반들거리고 분홍이 앳된 수평선은 경계마저 희미하다. 예쁘기도 하지. 바람이 ‘훅’하고 불어와 겨드랑이를 핥고 지나간다. 아주 잠시 여름이 저물어 가는 바다 건너에서 불어온 이 바람은 오롯이 봄날이다. 조금은 허기지고 연약해진 저녁을 살갑게 어루만지는 바람이다. 다정하기도 하지.


 어쩐지 조금 외로운 기분이 되었다. 저만치 하늘과 바다의 희미해진 경계선을 향해, 뱃머리에 윤슬 한아름을 싣고 작은 고깃배 하나가 멀어져 간다. 느릿느릿 나아가던 배는 점점 희미한 점으로 변해갔다. 멀어져 가는 배의 뒤꽁무니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문득 네 생각이 난 건 우연이 아니었다. 물론 제방 위에 걸터앉아 아까부터 입을 맞추고 있는 커플이 괘씸해서도 아니었다.


나는 무엇을 떠나 이 먼 곳에 오기로 했던 걸까?

나는 무엇으로부터 멀어지려고 이 길을 걸어온 걸까?

서울이었을까?

아니, 너였을까?


 처음에는 너라고 생각했다. 마주 선 바다 위에서 조금씩 멀어지던 고깃배는 이제 수평선 너머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입맞춤을 하던 커플도 손을 꼭 잡고 어딘가로 홀연히 떠난 후였지만 쓸쓸한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곰살맞은 봄날 같은 바람도 더는 위로가 되어 주지 못했다.


 다시 무릎을 구부리고 구부정하게 앉아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는, 그냥 서울을 떠나온 것으로 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돌아갈 곳이 있는 편이 조금은 더 나을 것 같기에.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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