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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Jul 10. 2024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일

미드데이 인 파리, Midday in Paris.



 턱을 괴고 가만히 누워 떠올려 봤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게 일어났던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당장 어제부터 시작해서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이만 하면 꽤 되짚어 온 것도 같은데 좀처럼 떠오르는 일이 없다. 괜한 짓을 한 거 같다. 나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거지? 도대체 언제까지 시간을 되돌려 봐야 그럴듯한 사건 하나쯤 생각이 날까? 삶이 이토록 재미없어도 괜찮은 걸까? 잠든 시간을 빼면 귀에서 떠나질 않는 이명이 거슬릴 정도로 송곳 같은 고주파음을 요란하게 뿜어내 더는 참기가 힘들다 느겨질 무렵 기어이 한 장면을 떠올려냈다.


아참, 그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이 말을 먼저 해야겠다.


당신, 잘 지내고 있나요?



 짧지 않았던 여행도 어느새 예정된 일정을 거의 채우고 이제 귀국을 목전에 두고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새벽부터 자정까지 늘 쫓기듯 빠듯한 여행을 했던 나는 남은 며칠만큼은 되도록 느긋하게 보내 보기로 했다. 여기는 파리가 아닌가. 걷다 보면 어디든 닿기 마련이겠지만 파리는 특히 그랬다. 센 강변을 따라 걸으면 헤맬 염려가 없는, 그저 마음 푹 놓고 발을 옮기기만 하면 되는 그런 도시였다. 센 강(la Seine, Seine River)에는 30개가 넘는 다리가 있다. 가장 유명한 다리라면 퐁뇌프를, 가장 화려한 다리를 꼽는다면 퐁 알렉상드르 3세를 빼놓을 수 없겠지만, 나는 시테섬 끄트머리에 놓인 퐁 마리(Pont Marie)를 가장 사랑한다. 이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해 질 녘 파리의 노을은 내가 여행한 그 어느 나라의 노을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붉고, 진하고, 애틋하다.



 그날의 첫걸음도 바로 그 곳, 퐁 마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발걸음은 노트르담 성당으로 이어졌다. 곁을 지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경쟁하듯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간다. ‘파리지앵들은 참 빨리도 걷는군’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툭 튀어나왔다. 애초에 어느 면으로도 파리지앵이 되긴 글러먹은 나는 한 걸음에 한 시간을 써보자는 마음으로 여유롭게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마에 닿는 하늘빛은 더할 나위 없이 맑다. 살갗을 스치는 바람은 수수하다. 나무늘보 같은 느린 속도에도 어느새 발걸음은 루브르 박물관을 거쳐 튈르리 광장에 닿았다. 샹젤리제 거리에 늘어선 명품 샵을 지날 땐 괜히 주눅이 드는 기분이었다.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회전 교차로 한가운데 우뚝 선 개선문을 보며 잠시 숨을 고른 발걸음은 트로카데로 광장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비로소 멈춰 섰다.


 꽤 먼 길을 걸어온 탓인지 약간은 지친 마음이 되었다. 되는대로 풀썩 주저앉은 계단 너머로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덩그러니 혼자 따로 떨어진 외딴섬 같다가도, 복작복작 광장을 채운 사람들을 보면서 ‘외딴섬이라고 모두 외로울 필요는 없지’ 싶은 마음도 든다. 그런 생각이 머문 시선 끝으로 에펠탑이 솟아 있다. 혼자만 불쑥 솟아 오른 거대한 철제 탑을 바라보는 사람들 얼굴이 연신 헤실거린다. 무릎을 짚고 일어나 광장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광장이 끝나가는 계단 아래서 걸어 올라오던 너를 만났다.


 아, 물론 너는 아직 모르고, 나만 혼자 알아챈 순간이었다. 네가 미미한 나의 존재를 인식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너에게 발견될 마음의 준비를 마친 사람이었고, 너는 나를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 시간이 흐른다고 생각했다. 광장 위에 다른 사람은 모두 사라지고 너와 나만 남았다. 다시 외딴섬으로 돌아간 광장 맞은편, 어림잡아 스무 걸음쯤 밖에서 마침내 너와 눈이 처음 마주쳤던 순간부터 그 간격이 열 걸음까지 줄어드는 동안, 이제 와 생각하면 수줍게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네가 내 앞에 와서 섰다. 이제 너와 나 사이에는 팔을 뻗으면 손 끝이 꼭 뺨에 닿을 것만 같은 아주 작은 틈만이 남아 있었다. 속삭이듯 말해도 전부 알아들 수 있을 것 같고 귀 기울여 들으면 심장 소리도 닿을 것 같은 공간을 사이에 두고, 너는 그저 사진을 한 장 찍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손가락으로 한 번은 내 어깨에 걸린 카메라를, 한 번은 등 뒤에서 따라온 너의 세 친구들을 가리키면서.


Trocadero, Paris, France.


 마음속으로 혼자 펼쳐 내던 상상을 들킨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혼자 머쓱해져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곱 걸음쯤 물러나 사진을 찍었다. 너는 몰랐겠지만 그때 나는 한 장이 아니라 세 장을 찍었다. 카메라 셔터가 세 번째 눌렸을 때, 비로소 네가 웃고 있어서였다. 다시 여덟 걸음만큼 다가가, 방금 전 보단 좀 더 좁아진 간격 안에서 바로 그 세 번째 사진을 보여 주었다. 이 사진은 꼭 받아야겠다며 호들갑을 떨던 너는 내 휴대전화를 건네받아 이름과 이메일 주소를 메모장에 남겨 두고 돌아섰다. 오도카니 서서 깔깔거리며 친구들과 함께 광장 너머 계단 아래로 사라지는 너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휴대폰에 남기고 간 이름이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자던 마음 같은 건 진작 사라져 버렸다. 부리나케 숙소로 돌아온 나는 곧장 너에게 그 세번째 사진을 보냈다. 보내기 버튼을 누를 땐 이미 정신이 반 쯤은 붕 뜬 기분이 되었다. 나는 곧 떠나야 하는 여행자였고 너는 축지법을 쓰는 파리지앵이었지만 이 도시를 떠나기 전에 꼭, 한 번은 더 너와 만나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터무니없겠지만 그 때는 그런 예감이 들었다.


 이틀이 지나 우리는 정말 다시 만났고, 그 이틀째가 지나간 다음 날부터 나흘 동안 너와 나는 매일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나는 한 번의 스케줄 변경을 했다. 그때 알게된 것이 있다.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일들이 있는데, 그런 일들은 그냥 벌어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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