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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Mar 25. 2024

甲辰年 丁卯月 세 번째 기록

[주간단남] 3월 3주 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4.03.18 (월) 


(..)

어제 월례회는 어우.. 정말이지 너무 안 맞더라. 바람이 불어서 오히려 망정이지. 바람이 없었다면 갈 곳을 잃은 내 화살이 여실히 드러났을지도 모른다. 표도 없고, 조준점도 없다. 그렇다고 다른 몸가짐들이 일정한 것도 아니다. 달리 뭐라 말하겠는가 수련 부족이다. 요새 이것저것 하는 게 많아서인가. 시간이 지난다고 연습량이 착실하게 누적되는 것은 아니다.




24.03.20 (수)


(..)

매국노 발언이 화제다. 양비론은 지양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온갖 시정잡배들이 이 이슈에 들러붙어 똥물을 끼얹고 있으니 말이다. 일단 내가 본 그 발언의 문제는 그 내용의 타당성보다도 무심함과 무책임함에 있다. 평소에 물수제비를 좋아해 물가만 가면 돌을 집어 물에 던지던 사람이 어느 날은 자신이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었다. 그때 그것을 두고 거기에 있던 개구리의 탓이라 한다면 이것이 바로 무신경함이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미칠 파급력에 대해 일말의 고려를 하지 않는 모습.

물론 모든 영향력을 정확히 사전에 다 고려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일어난 여파에 대해 적극적으로 책임지려하는 태도다. 실수로 교통사고를 내면 죄가 없나? 주차한 차량을 박고는 물피도주를 하는 마당에 포스트잇으로 자신이 경솔했다, 몰랐다, 사과하려 적힌 번호로 연락을 했는데 안 받아서 쪽지만 두고 간다. 그러면 해결될 문제인가? 상식적으로 그렇게 일 처리를 하는 사람은 주변에 없다.

맹목적인 감싸기와 무한대의 지지를 보내는 팬들도 문제다. 그 선수 개인의 붕괴는 자신의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신념의 붕괴와 같기에, 자신과 동일시해서 그런 추종을 보내는 것이리라. 사람이 실수도 할 수 있지, 그러나 실수로 인한 책임감은 무겁게 져야지. 걱정 말라. 그런 걸로 나는 당신에 대한 지지를 내려놓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와 같은 태도야말로 건전한 추종이다.

어떤 신념의 출발점이 개인적 이기심이나 수치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들, 그것은 점차 그 저변이 확장되어 옳음에 대한 지향으로 천천히 나아가야 한다. 자신이 특정 성별이어서 받는 부당함에 분노를 느껴 특정 가치관을 지녔다면 더 나아가 반대의 성별도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상황이 있을 것이라는 외연의 확장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확장성이 없이 자신이 느끼는 부당함에 대해서만 부르짖고 있다면 피해자 마인드를 벗어나지 못하며 지역 이기주의와 다를 바 없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열린 마음으로 건전한 방식의 소통을 하든지, 아니면 다 같이 그냥 서로 웃고 울며 하나가 되는 장 안에서 놀든지. 하나만 하자, 하나만.




24.03.22 (금)


(..)

어제 나온 전차 카드는 추진력의 의미가 아니라 '동중정動中靜'의 의미로 구현된 것 같다. 앞으로 나아갈 준비와 기반이 갖춰진 상태인지를 생각해 봐야 하는, 또는 그렇게 앞으로만 나가는 게 지금 적절한 때인지도. 어제는 멈추는 게 맞았다. 

전날 회식의 여파로 몸의 피로가 누적된 상태인데다가 상대의 상태가 저러할진대 내가 어떻게 모른 척 스스로의 능력 증진에만 힘을 쓴단 말인가. 내가 공부를 하는 이유도 결국에는 이치를 궁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세상의 정화에 이바지하기 위함이다. 정화가 필요한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공부에 더 집중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 아닌가. 

항상 자신이 품고 있는 비전, 이상, 이유를 상기한다면 주객이 전도되고 맹목적인 집착과 추종을 일삼지 않게 된다.

(..)

세상을 밝히고 온화하게 데우려는 힐러들을 곳곳에서 목격한다. 남들에겐 생소하거나 신변잡기로 취급받을 수 있는 기술을 바탕으로 전업이든, 부업이든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는 그들. 

뿐만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자신만의 색과 향기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또한 특정 관점에서는 힐러다. 그들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신선함, 충격, 난해함 등이 첫 반응이지만 이내 보고 듣지 못했던 생소한 매력, 고유한 캐릭터성에 흠뻑 젖어든다. 그들에겐 악플이 달리지 않는다. 그 작은 댓글 창은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이 하나 되어 어우러지는 통합의 놀이터가 된다.

공식, 국룰, 지름길 대로만 해야 불안함이 종식된다고 믿는 세상에 AI는 너무나도 쉽게 인간의 기존 영역을 대체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고유성에는 법칙이 없으며 예측도 불가능하다. 각자의 고유성에 집중하는 것이 미래이며, 답이 되는 세상이 도래하리라고 믿는다. 그게 인류가 찾을 다음 답이다. 각자 자기 자신대로 살 때 우리가 지닌 고유의 주파수가 높아지며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한 차원 더 높은 존재로 거듭날 수 있으리.



24.03.23 (토)


(..)

나대로 산다는 것, 나만의 색을 드러낸다는 것에 정해진 명사나 형용사는 없다. 다만 두드러지는 대유행의 흐름과는 다소 반대되는 듯한 느낌이 있을지언정 그것은 결코 무성의함이나 대충은 아니다. 설령 그런 모습으로 결과가 드러난다고 해도 그런 무성의함을 동반한 개성이 자신만의 색채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숱한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환경에 종속되는 것이 인간의, 동물로서의, 당연한 특징이자 본능이기에 나만의 개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동물보다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특징인 자유의지를 비로소 발휘한다는 숭고한 의미가 깃든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번 발휘했다고 끝은 아니다. 본능과 끝없는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것이 인간 됨의 숙명이기에.

(..)

그 좁은 주차장은 전쟁터였다. 의도가 빤히 보이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자기의 잇속을 챙기는 파렴치한이 별게 아니었다. 후안무치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존재하기도 한다. 내 사람, 내 가족, 나 자신이 먼저라는 것 자체는 동물로서의 인간에게는 당연한 본능이다. 하지만 야생에서 무리를 짓고 살며 언제나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상태가 아니라면, 그 정도 신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자고로, 이기심을 이타심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을 해야만 진정한 인간이라 할 수 있다.

(..)

신념을 자기 치장의 아이템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들의 특징은 열이면 열 내로남불의 지점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건 확률이나 통계 기반, 또는 한낱 개인의 몇 안 되는 경험에 의거한 귀납적 추론의 결과물인 편견이나 선입관이 아니라 수학 공식처럼 명확한 참인 명제다. 

이유인즉슨, 그러한 신념이 그 자체로 옳다고 여겨 추구하는 목적이 아니라, 자신을 빛내줄 도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구로 쓰다 보니 그것에 대한 깊은 이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마치 자동차를 그 자체로 목적으로 대하는 사람은 마니아가 되지만, 그저 이동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차에 대해 공부하지 않는 것처럼. 

그 결과 신념의 추구의 과정에서 언행의 불일치, 모순점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것이다. 좁게는 그 신념이 관장하는 영역에서부터 넓게는 그 신념의 영역은 벗어났지만 구조적으로는 같은 것이나 다름없는 다른 영역에 대한 무지나 무심함으로 드러난다. 이는 모두 확장성과 응용성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뷔페식당과 같은 '선택적 취용'은 한 개인이 추구하는 신념의 색과 가치를 한껏 퇴색시킨다.

신념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옳기에 남에게도 권해주고 싶을 정도로 전심을 다해야 힘이 실린다. 그것을 직접 전도를 할 것인지, 솔선수범하며 자연스럽게 주변을 감화시킬 것인지는 본인의 상황과 성향에 달렸을 따름이다.



24.03.24 (일)


(..)

즉각적으로 올라오는 투정 섞인 목소리와 그냥 하기로 했으니 하고자 하는 것.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그러한 양극단의 에너지가 아닐까. 이것도 음양의 조화라면 조화일 것이다.

(..)

사고가 났을 수도 있었을 크고 작은 상황 속에 한 끗 차이로 사고가 나지 않는 경험을 보거나 직접 겪곤 한다. 그것이 삶이 우리가 내보냈던 것을 돌려주는 여러 방식 중 하나다. 조건 없이 남을 위해 마음을 썼던 시간들이 자연스레 부메랑처럼 돌고 돌아오는 선물인 셈이다. 

인생에서 우리는 반드시, 예외 없이, 내가 세상에 내어놓는 만큼 돌려받는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인지의 논쟁 같은 건 필요 없다. 내가 주는 것이 먼저다. 태생적으로 우리는 이 땅에 나면서 생명이라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먼저 받았기 때문이다. 받음으로써 시작한 것이 누구나 예외 없는 이 지구라는 땅에서의 첫 경험이다. 그러니 각자가 해야 할 것은 세상에 주는 행위다. 

늘 받기만을 바라서는, 빼앗긴다고만 느껴서는, 어떤 것도 받아낼 수 없다. 받더라도 금세 빼앗기거나 대신 다른 것을 잃는다. 그렇게 삶은 불만과 초조로 가득 찬다. 그러나 받기보다 주기로 택한 사람은 오히려 더 많이 받게 되기에 삶이 안정감이 있고 풍요로워진다. 먼저 주어라. 어떤 방식으로,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서 돌려받게 될 것인지까지 우리가 세세히 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반드시 내게 돌아온다.

과정을 단순하게 표현하면 내가 곧 세상이고 세상이 곧 나인 셈이다. 이기심이 변모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는 그러므로 이타심이다. 둘은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다. 나라는 뿌리. 그 뿌리의 근원은 우리 각자의 안에 깃든 신성이요, 그래서 우리 모두는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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