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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May 27. 2024

甲辰年 己巳月 네 번째 기록

[주간단남] 5월 4주 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4.05.20.(월) 


(..)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활에 대한 얘기를 했다. 하지만 껍데기가 활일 뿐 그 속에는 삶이, 인생이 있었다.

우리는 사실 어떤 대화를 나누든 연역적 결론으로 도달해 내는 능력(?)이 있다. 그 사안의 개별적 디테일에만 매몰되지 않고 두루 확장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

결심이 섰다. 관계에 보다 책임을 갖겠노라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더욱 다하겠노라고. 책임과 헌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

물론 정작 미래에 대한 얘기가 없었다. 막막함에 대한 회피가 한몫했으리라. 각자의 앞이 막막하니 공동의 미래에 대한 얘기가 쉽사리 오고 가기 어렵다. 그런데 그거, 고정관념이다? 개인이 준비가 되어야 함께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거 말이야. 알고 보면 대부분의 관념과 명제들은 사실이나 진리라기보다는 가능성을 적당히 제약하고 구분지어두는 행정구역 같은 역할을 할 뿐이다. 


(..)

마음이 다 한다. 활을 쏘기 직전에 가장 중요한 건 자세보다도 마음이다. 사주팔자에서도 대운보다 중요한 것, 다섯 번째 기둥으로 심주(心柱)다. 관상에서도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건 마찬가지다. 일체유심조, Tat Tvam Asi다.


중요한 건 의지고, 의도이고, 마음이다. 정말 모든 게 그렇다. 결정하고 움직이기 시작하기만 한다면 궁리하기 시작하면 길은 어떻게든 보인다. 우리는 집중하고 몰입하는 대상과 관련해서 필요한 정보를 '내려받는' 존재들이다.




24.05.21.(화)


(..)

9년 동안 함께 보낸 시간들을 돌아보면 싸우기도 참 많이 싸우고, 서로에게 감사와 사랑을 느끼던 순간들도 참 많았다. 세월 앞에 무뎌진 것들도, 세월이 쌓여 더욱 단단해진 것들도 있다. 

이러나저러나 9년이라는 시간이 결코 적은 시간은 아님이 분명하다. 3년이 3번이나 반복된 숫자이며, 수비학에서도 9는 완성의 수다. 올해가 지나면 10주년을 맞이하겠지. 10은 한 사이클의 완성이자 새로운 시작의 발판이 된다. 우리의 다음은 무엇이 될까.

(..)

그 과정이 전형적이든, 우리만의 방식이든 지금은 크게 중요치 않은 것 같다. 그보다 중요한 건 '함께' 무언가를 준비하고 만들어나간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많은 이들이 그 과정 자체가 갖는 의의를 놓치고 결과물이 어떻게 보일지에만 매몰하느라 진짜 행복을 놓친다. 그것은 현대인의 비극이다.

(..)

마음이 없는 자에게 제도는 굴레다. 그러나 마음이 있는 자에게 제도는 도구다. 마음을 더 잘 활용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 악한 자가 돈을 가지면 더욱 악해진다. 책임감이 없는 자에게 결혼은 구속이다. 그러나 선한 자가 돈을 가지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 결혼을 하면 그건 이미 가진 것을 더욱 증폭시켜 선순환을 만드는 도구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자신이 가진 디폴트 값을 무시한 채 도구를 비난한다. 비난해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인데도 말이다.




24.05.22.(수)


(..)

요즘의 나는 큰 덩어리로 몰입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당장에 가시적인 지표가 나타나지 않으니 현실적인 관점에서 조급함을, 불안함을 느끼기 쉬운 거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일상의 작은 순간들, 가령 집에 도착했을 땐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올라가기로 했던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킨다거나, 운동을 한다거나 공부를 한다거나, 이렇게 모닝 페이지를 거르지 않고 쓴다거나 하는, 내가 세운 하루의 프레임에 집중하는 것이다.

(..)

현실적이라는 표현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 말은 사회에 통용되는 기준을 얼마나 따르느냐에 동의어라 할 수 있겠다. 타협과 순응의 정도. 도덕성은 현실성과는 큰 상관관계에 놓이지 않는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도덕성을 추구한다는 게 현실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인생에서 각각 따로 공부해야 할 별개의 과목과도 같다.

(..)

방향성이 흔들릴 때, 방향보다는 지나고 있는 도로의 상태에, 주변의 인파에, 매일의 날씨에 주의를 빼앗긴다면, 의도를 더 명확히 세우자. 같은 행동을 해도 그것이 본인이 가는 길에 필요하다는 의도를 먼저(나중에 세우는 건 합리화다) 세우라. 의도 뒤에 뒤따르는 모든 행동은 그 의도가 실행되는 과정이고, 길 위에서 내딛는 걸음걸음이 된다. 

무엇이 필요하고 그렇지 않은지는 누구보다 본인의 직감이 잘 안다. 본인의 직관을 믿으라. 지금 잘하고 있다는 그 느낌. 겉으로 보면 지향하는 방향성에 전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일조차도 느낌은 올바르게 가고 있다고 들 때가 있다. 스스로를 믿고 행동은 의도를 가지고 하길 바란다. 




24.05.25.(토)


(..)

이건 동시성이다. 며칠 전에 쓴 모닝페이지에서 의도를 가진 행동이 중요하고 그 의도에 적합한 것의 유무는 외부의 기준과 같은 정해진 룰이나 객관성보다도 내면의 직감이라 한 적이 있다. 아파트 계단을 통해서 집으로 가는 길 위에서 들었던 생각을 아침에 적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제 본 진쏠미님의 최근 영상* 내용이 딱 그에 부합하는 것 아닌가!

*영상 링크: https://youtu.be/SdHiI6s6b7Y?si=hYdtla-asEI3Ir3W

 역시 세상은(알고리즘도 포함이다) 내가 집중하는 것, 꽂혀있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객관적 실체, 모두가 동일하게 경험하는 물리적 실체마저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은 개인적 주관이 경험화되는 개별적 무대다. 각자가 연출 감독이자 각본가이고 배우도 될 수 있는. 문제는 우리가 그런 역할은 망각한 채 무대 위 소품이나 배우로만 살아간다는 것이다. 주어지는 경험들에 기계적, 동물적으로 반응하기만 하면서 말이다.

그러한 무조건반사와도 같은 반응의 덫에서 빠져나와야만 비로소 동물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시야가 생겨난다. 반응하는 게 아니라 경험하는 삶이 펼쳐진다. 휘둘리는 게 아니라 결정하는 삶. 그런 삶이 스스로 존엄성을 느끼고 자기 자신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준다.

이는 이기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내적 사랑이 충만한 사람은 그것을 주변에 건넬 수가 있다. 물질적 자원을 놓고 제로섬 게임을 하는 것과는 달리 사랑은 화수분이다. 믿음, 소망, 사랑 중 사랑이 제일인 이유다.

(..)

주변에서 접한 정보들이 쌓이면 인간은 경험하기도 전에 신념과 사상을 확립한다. 문제는 바로 그 신념이 경험을 상당 부분, 아니 거의 99% 이상을 결정지어버린다는 것이다. 신념이라는 색안경 너머의 세상도 경험하도록 어떻게든 예외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신념이라는 레이더망에 쉽사리 포착되지 않는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신념을 주입당하기보다 능동적으로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세상을 마음속에 품는 것을 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서서히, 적어도 자신의 세상은 바뀌어 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명심하자. 내가 바뀌면 주변도, 세상도 바뀌어 나간다는 것을 말이다.




24.05.26.(일)


(..)

언제든 술 한잔 가볍게 기울일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행복인가!

나처럼 부어라 마셔라 하는 타입도 아니라서 함께 마시면 적당히 절제가 된다. 단둘이 술을 마셔서 어느 한 명이라도 취해본 경우가 거의 없다. 최고의 상호보완이 아닐 수 없다.

(..)

음양의 이치는 상대적이라 어떠한 조합의 관계에서도 생겨날 수밖에 없다. 동성연애를 하더라도 각자 맡은 성별 역할(?)이 다르다. 부모를 보아도 한 명은 자녀에게 천사가, 한 명은 악마가 된다. 그렇다고 그 한 명이 100% 천사 또는 악마인 건 아니다. 천사의 이면에 악마 같은 면이 있고, 악마의 이면에 천사 같은 면이 있다. 결국 모든 것은 그에 상응하는, 대척점을 필연적으로 가진다.

(..)

관점은 칼과 같다. 하나의 아메바를 둘로 가르면 그때부턴 둘이 되듯 특정 측면을 바라보는 관점을 갖는 순간 그것의 대응점이 생기고 어떤 특질과 쌍을 이룬다. 

오행은 그렇게 분화된 음양과 그들을 잇는 연결의 개념이다. 크게 보면 서양의 4원소설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무엇을 양으로, 무엇을 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구체적 성질이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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