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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May 20. 2024

甲辰年 己巳月 세 번째 기록

[주간단남] 5월 3주 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4.05.14 (화) 


(..)

소음을 낼 필요는 없다. 다만 내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 정도는 알려야 하지 않겠나. 딱 그 정도만 하기에도 세간엔 소음이 너무나도 많다. 각각이 시끄러워서라기보다는 그 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마트에만 가도 수없이 많은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자신의 제품성이 아무리 뛰어나도 눈에 띄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

그럴듯해 보이는 브랜드에 반응하는 나는 내용물보다도 껍데기에 끌린다. 껍데기를 선호하는 이유는 역으로 알맹이를 맛보았으면 하는 마음의 탓이리라. 


(..)

'운'에만 기대어 자신이 드러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나 그와는 별개로 후천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그것은 억지가 아니라 즐김과 몰입에서 비롯된 노력이다.  


같은 단어여도 쓰임새와 뉘앙스, 최초 발화자의 의도까지 다 같지는 않다. 그렇기에 짧고 굵은 어록들은 끝없이 구전되고 와전되기 마련이다. '노력'이라는 것도 그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미덕으로서의 노력이란 자신이 좋아하는 것, 가고자 하는 길을 위해 필요한 것을 위한 자발적인 형태를 취해야만 한다. 강제성을 가진다면 그건 미덕이 되기 어렵다. 선한 의지와 자발성이 만날 때 사회에 뿌리내릴만한 가치로 변모가 이뤄진다.




24.05.15 (수)


(..)

스승의 날과 부처님 오신 날이 겹치네요. 뭐냐, 나 방금 왜 나도 모르게 존댓말로 적은 거야? 머릿속으로 혼자 무슨 상황을 설정한 거냐 너.


(..)

구상하던 것을 하나둘씩 현실화해 나가는 것은 그 분야가 무엇이든 재미가 있다. 인류가 지닌 내면의 창조성을 두고 '신성'에 견주어 설명하는 것은 비단 비유적 표현인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소우주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

그래, 에리히 프롬을 읽자. 니체도, 쇼펜하우어도 좋지만 매체가 유행시키려는 듯한 것에 그냥 무턱대고 편승하기보다는 주관을 갖자. 주관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인류의 존엄성은 주관이 빛날 때 바로 설 수 있다.


주관을 이루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학술적 접근이 아닌, 지금 드는 생각을 적자면(이런 쿠션어를 좀 적지 마. 독자를 상정하지 마. 이곳은 너의 놀이터야) 크게 이성과 직관으로 나뉜다. 이성의 작용은 주관의 당사자가 경험하며 체득한 정보나 배움 등이고 직관은 거기에서 비롯되었거나, 그렇지 않고도 발현이 되든 관계없이 그냥 별다른 이유가 없어도 왠지 그럴듯한 느낌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주관을 얘기할 때 방점을 찍는 쪽은 후자다. 그러한 주관이 필요한 예시로 코로나 백신을 들 수 있다. 초창기엔 그렇게 미접종자를 혐오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던 언론이, 엊그제는 AZ 사가 부작용을 인정하고 철수했다는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이크 속았다!' 이러고 있는 행태가 언론이 취할 모습이란 말인가. 언론의 정신은 엿이랑 바꿔잡쉈나. 


하지만 주관을, 직관을 발휘한 소수의 사람들은 정부가, 언론이 홍보하던(강제하던) 것에서 모종의 부당함을 느꼈고, 용기를 가지고 소신껏 행동에 옮겼다. 수치심과 굴욕감을 견뎌냈고. 그것이 옳았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 시대의 언론은 결코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언론의 자유나 독립성은 옛말이다. 아니, 어쩌면 이론 상에나 등장하는 유니콘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국가는 이러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사태에 별다른 책임도 지지 않는다. 개인들도 초반에 보냈던 혐오나 낙인에 대한 머쓱함만 가질 뿐 사과하는 태도를 지니지 않는다. 그땐 다 같이 그랬으니 어쩔 수 없단 식이다. 단지 본인들이 속았다는 사실에만 격분하며 자신도 피해자라 외쳐댈 뿐. 



24.05.16 (목)


(..)

스승의 날과 석가탄신일이 겹친 묘한 날이었다. 이상하리만치 우연의 일치들이 신묘하게 겹치더니 기적과도 같은 사건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

기쁨과 슬픔은 언제나 함께 친구처럼 붙어 다닌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정점에 올라섰을 땐 더 오를 생각이나 어떻게든 그곳에 머물려고 애를 쓰기보다는 내려옴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도. 꽃이 제아무리 진한 향기를 만발한다고 해도 언제고 그 화려한 자태를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24.05.18 (토)


(..)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임무를 맡고 그것이 내 개인적 이익보다도 모두의 이익 증진에 기여하는 대의라고 스스로가 납득이 될 때, 개인은 기꺼운 마음을 갖는다. 그것이 내게도 이득이 되는 지점이 있다면 이기심과 이타심의 한바탕 왈츠가 펼쳐진다. 


인간에게 동물적 본능과 냉철한 이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자연의 섭리를 담고 있는 본능을 공리적 필요라는 대의에 맞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은 아닐까. 본능은 결코 억누를 수도, 억눌러서도 안 되는 자연적 산물이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현명히 활용할 줄 아는 지혜를 익혀야만 할 것이다.




24.05.19 (일)


(..)

개인의 믿음의 근거를 타인에 두거나, 그 사람의 특정 부분만 지지를 하거나, 혹은 그 대상에 자신의 믿음을 완전히 투사해버리거나 하는 것은 결국 어떻게 보든 자기 확신의 결여요, 나에게 득이 되는 부분만 선택적으로 취하려는 신념의 뷔페 식단 같은 것이다.


인간에게는 확증편향이라는 본능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지만 본능은 현명히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늘 숙지하여야 한다. 이게 본능인데 뭐 어쩌라고 식의 후안무치에게는 인간다운 대접을 기대해서는 안 될 테다.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만 보장될 수 있다. 


모두에게 천부적 권리가 있다면, 그 권리가 상충되는 지점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럴 때는 오히려 자신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를 빼액빼액 우길 것이 아니다. 모두에겐 제 나름대로의 입장과 권리라고 믿는 부분이 있을 테니까. 오히려 상대 쪽을 바라봐야 마땅하다. 나도 상대도 의식하지 않으면 본능대로 자신부터 챙기게 되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고, 그럴 때 인류의 역사는 반복적으로 비극을 맞이해왔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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