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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Jun 20. 2024

나의 차례는 반드시 온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사대에 궁사가 꽉 들어 차면 총 7명이 사대에 서게 된다. 그 7명은 같은 과녁을 겨누어야 한다. 같은 과녁을 보고 서 있지만 많은 것이 다르다. 서 있는 발 자세도, 활과 화살을 쥐고 있는 모양새도, 활에 임하는 마음자세까지도 100인 100색, 아니 7인 7색이다.


같은 과녁을 본다는 점 이외에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사대에 서면 누구에게나 자신의 차례가 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단 한 번이라는 가혹한 숫자도 아닌 총 다섯 발이라는 기회가. 이때에는 사대에 있는 사람이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 사람만의 시간을 존중해 준다.


이때는 세상에 모든 것이 마치 흑백 영화처럼 빛이 바랜 채 일시정지라도 한 듯 멈춘다. 오직 자신의 차례를 맞이한 궁사만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천천히, 과녁을 향해 활과 화살을 들어 올리면서. 활을 손에 굳게 쥔 궁사는 결정해야 한다. 매번 돌아오는 '나의 차례'에 어떤 마음으로 임할 것인지를.  


자신의 화살이 과녁에 맞는지의 여부에 따라 감정의 파도타기를 할 수도 있다. 맞으면 좋고, 안 맞으면 짜증을 내는 식이다. 또는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기까지 반구저기反求諸己에 집중할 수도 있다. 자신의 직전 쏘임새가 어떠했는지를 차분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반면에 자신의 자세나 활을 쏠 때의 감각이 아니라 그날의 날씨에서 원인을 찾을 수도 있다. 자신은 문제가 없는데 그날따라 바람이 분다거나 습도가 평소와 다르다거나 할 수도 있기에.


시선을 내가 아닌 주변에 둘 수도 있다. 남의 화살이 맞으면 응원의 추임새를, 비껴가면 아깝다는 식의 반응을 방청객처럼 할 수도 있다. 옆사람 또는 옆옆 사람과 자신을 비교할 수도 있다. 나는 맞혔는데(못 맞혔는데) 저 사람은 못 맞혔네(맞혔네)하며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거나 안도감 또는 조바심을 느낄 수도 있다. 자신의 화살이 보이지 않는다며 옆사람에게 대뜸 물어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이런 사람들로 인해서) 혹시 누가 자기 화살이 어디로 갔는지를 물어볼까 봐 긴장하며 남의 화살의 궤적을 일일이 추적하여 확보해 둘 수도 있겠다.


활을 모르는 사람이 이 장면을 본다면 그저 7인의 궁사가 자신의 차례에 맞춰 활을 쏘는 단순한 장면일 뿐이지만 그 이면을 보면 이토록 복잡한 속사정이 숨어있다.



구한 말 조선, 활 쏘는 여인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그리고 자신의 차례가 돌아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은 없다. 궁사가 쏘는 화살에는 그의 의도가 담길 따름이다. 다만, 이렇게 나눠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의식적이냐, 무의식적이냐로.


그것은 다른 말로 깨어있는 활쏘기인가 잠들어있는 활쏘기인가라고 할 수도 있다. 의식적인 활쏘기는 매 순간 자신이 하는 것에 대한 의도가 분명하고 그에 따라 이루어지는 자신의 마음가짐과 언행을 확실히 자각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몰입과 집중이 뒤따른다. 반구저기를 하는 궁사는 자신의 내면과 몸동작 하나하나에 의식을 둘 것이고, 다른 사람의 화살이 맞는지를 보는 사람은 자신은 잊고 오직 그것에 집중할 것이다.


무의식적인 활쏘기는 자신이 어떤 마음인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임하는지를 전혀 자각함이 없이 활을 쏘는 것이다. 여기에는 집중이나 몰입은 없다. 그 자리는 충동과 동요가 대신한다.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다가도 괜히 날씨 탓인가 싶고, 옆 사람의 거슬리는 수다 소리 탓을 하기도 한다. 남의 화살을 봐주다가도, 이내 '내가 만만한가? 왜 내 활쏘기를 방해해?' 하는 분노가 충동적으로 일어난다. 그러한 일련의 변화의 흐름을 일일이 자각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그런 충동과 동요의 파도에 무기력하게 휩쓸려 버리는 것에 가깝다.


누구나 의식적인 활쏘기와 무의식적 활쏘기를 넘나들게 된다. 의식적으로 매 순간 자신의 동작에 주의를 기울이며 잘 집중하다가도 어느 순간 옆사람과의 비교로 인한 것이든, 자아도취에 의한 것이든 자만심에 빠지면 의도하지 않게 화살이 잘못 나가기도 한다. 그 순간 충동적인 짜증에 휩싸이면 무의식적 활쏘기로 접어드는 것이다.

존 맥스웰의 말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본인의 자전적 스토리를 담은 판타지 작품이다. 작품을 통해 그는 묻는다. 나의 차례가 왔을 때 나는 이렇게 살았다. 이제 그대들의 차례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이냐고. 개인은 저마다 자신만의 세상을 창조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나는, 당신은 어떤 세상을 만들고 살아가고 있나. 어떤 세상을 꿈꾸는가.


사대에 서는 한 나의 차례는 돌아오듯, 삶이라는 무대에 발을 딛고 서 있는 한 나의 차례는, 나의 시기는 반드시 온다. 그 시기를 어떤 마음으로 기다릴 것인가. 그 시기가 오면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우리는 질문하고 답해야 한다.


나는 그저  '쏠 발發'이라는 한자에 담긴 지혜를 매 순간 수행하며 굳건하게 활을 쏘고 싶다. 이 한자는 발로 풀 뭉갤 발(癹)과 활 궁(弓)이 합쳐진 글자다. 무예든 춤이든 어떤 동작을 시작할 때 엄지발가락을 꾹 누르며 지반을 단단하게 누르는 것은 모든 동작의 기초이다. 비장 경락의 흐름이 엄지발가락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그렇게 대지를 단단히 누를 때 하체에도 기운이 굳건하게 실린다.


발로 풀 뭉갤 발은 다시 걸을 발(癶)과 창/몽둥이 수(殳)로 나눌 수 있다. 발로 풀을 뭉갤 정도로 꾹 누른다는 것은 두 발을 마치 땅 위에 뿌리를 내리듯 견실히 하라는 것일 테다. 그렇게 힘이 들어간 하체는 마치 창이나 몽둥이와 같이 단단해진다는 것이리.


위와 같은 단단한 두 다리의 기반은 비정비팔(非丁非八), 즉 정(丁)도 아니고 팔(八)도 아닌 오묘한 형태의 발자세에 있다. 걸을 발(癶)은 한자 모양에서부터 여덟 팔(八)을 닮아, 팔자걸음과 비슷한 형태를 나타낸다. 과녁을 정면으로 바로 보고 서지만 11자로 반듯한 모양도, 양궁처럼 두 다리를 넓게 벌린 자세도 아닌 것이다.


그렇게 엄지발가락을 꾹 누르며 하체에 가득 찬 기운을 단전으로, 그리고 정수리의 백회혈로 끌어올리고, 끝내는 양손과 온몸으로 확장시키려는 것이 내가 느끼고 싶고 지향하고자 하는 의식적인 활쏘기의 전부다.


그러기 위해서 내 차례가 오기 전까지는 스스로를 살피고, 내 차례가 온다면 엄지발가락에서 시작되는, 일련의 연속 동작을 마치 하나의 춤 동작처럼 부드럽게 이어갈 수 있기를, 그 속에 기운이 용솟음치며 흐를 수 있기를 바라며 집중할 따름이다. 두 다리는 단지 땅 위에 서기 위한 기능적 도구가 아니라, 의식의 닻이라는 상징적 기능을 한다. 이따금씩 충동과 동요에 휩싸여버릴지라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해주는 내면의 무게추 같이 말이다.


그 모든 순간이 나였다. ⓒ영화 <인사이드아웃 2>


우주의 일부로서 만물은 시시각각 변한다. 내 의식과 마음도 예외일 수는 없다. 지금 ‘나’라고 믿는 그 자아는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만물이 변한다는 그 진리처럼 변하지 않는 또 한 가지는, 우리에겐 당면한 매 순간을 알아차리고 온전히 경험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식적인 경험'을 계속해서 해나가는 것을 지향하며 살고 싶다.


불가에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는 말이 있다. 말이나 문자가 아닌 마음에 의해서만 진리가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글과 말로, 지식과 논리와 정보로써 전달될 수 없다. 오직 체험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배움은 우리의 존재 안에, 우리의 삶 속에 이미 녹아있다. 내가 이를 잊고 지적 허영심에, 지식의 저주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삶에서 나의 차례가 오기 전에도, 왔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이것을 나의 가슴속 정언명령처럼 품고 살아가고 싶다. 지구의 마지막날까지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이로써 30화 연재를 모두 마칩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단남의 활쏘기 단상 30화 연재가 모두 마무리되었습니다.

관심과 응원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얼마간의 휴식 기간을 가지고 추후에 또 키보드 앞에 앉아보겠습니다.

모두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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