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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Jun 13. 2024

활터는 '진짜' 노동의 현장

자발적인 태도와 대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에 대하여

노동은 성스러운 행위라고 생각하며,

사람은 일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내 신조다.


물론 여기에는 전제사항이 하나 있다.


저 문장을 읽었을 때 대부분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이라는,

하기 싫고, 강제성을 띠며, 먹고살려면 울며 겨자 먹기로 해야 하는 그런 일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일이란, 노동의 본질이란,

사람들이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그것이 필요해 보이는 곳에 자발적인 태도를 가지고 기꺼이 투자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참된 노동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노동을 쉽게 관찰할 수 있는 곳이 활터다.

여느 취미 동호회가 그렇듯 이곳에도 임원진이 있다. 다만 활터라는 공간의 특성상 그 직책이 갖는 역사와 의미가 보다 두터울 뿐이다.


그들은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으면서 활터가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각자 맡은 바 최선을 다한다.

때로는 본업보다도 더 열심히 하는 경우도 왕왕 생긴다. 보수를 따로 받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국궁 1번지 황학정의 조직도(출처: 황학정 홈페이지)


그런 자발적 노동은 비단 임원진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활터가 지차체에서 위탁 운영을 맡긴 형식이기 때문에 따로 보수를 받고 일하는 사람이 상주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따라서 내부의 청소나 유지 보수 등은 다 자체적으로 돈이든 노동력이든 십시일반 하여 관리하는 방식을 택하게 된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지만 대회라도 열리면 활터에는 이런 찬조금을 내는 문화가 있다 (출처: 온깍지활학교)



개인주의가 팽배한 요즘의 시대의 가치관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기가 차고 혀를 내두를 일이다.



돈 얼마 주는데?
내가? 굳이? 왜?
내가 활쏘러 왔지 바닥 쓸러 왔냐?


**물론 우리 활터같이 매 방문 때마다 이용료를 결제하는 형태로 운영되는 곳은 돈을 내서 그런 것인지 비단 요즘 세대가 아니더라도 위에 적은 '특권의식'이 발동한다.



혹자는 이런 형태의 운영 방식에 대해 비아냥거리며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돈도 안 되는 일을 누가 하려고 하겠냐고. 그렇게 운영되는 곳은 다 망하고 말 거라고. 그러나 활터는 단순히 우후죽순 생겨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마는 취미 동호회 같은 곳이 아니다. 국궁의 1번지라고 일컬어지는 종로 황학정은 1899년(광무 3년)에 세워진 곳으로 벌써 100년이 넘었다. 물론, 예전의 활터의 임원은 단순 봉사직이 아니었겠지만, 현재는 전국의 400개 가까이 되는 활터들이 소속 궁사들의 자발적인 봉사로 운영이 되고 있다.


황학정의 역대 사두(활터의 총책임자) 계보. 1대가 고종, 2대가 순종이다 (출처: 황학정 홈페이지)



이것은 비단 활터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전에 고엔카 위빳사나 명상센터에서 명상 10일 코스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숙박비, 식사가 전액 무료였다. 코스를 수료하는 날 자신이 느낀 감동과 보람의 크기만큼 자발적인 기부금을 내는 방식이다. 금전 사정이 어려워 내지 않아도 된다. 눈치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곳이 오로지 수행자들의 자발적인 기부금과 봉사로만 운영이 된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명상 센터가 국내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고엔카 위빳사나 명상센터는 (dhamma.org) 전 세계 233개의 명상센터와 136개의 비정규센터를 운영하고 있었다. 


한국 센터뿐만 아니라 전 세계 센터가 기부금으로만 운영이 된다 (출처: 담마코리아 홈페이지)




이러한 것을 열정페이라고 비꼬고, '월급 루팡'을 미덕으로 여기며, '조용한 퇴사'같은 용어들이 뜨고 있는 요즘에 어떻게 이런 것들이 가능한 것인가 의아할 따름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사례들을 접하면서 어쩌면 우리가 지금 진짜 미덕을 상실한 것은 아닐까.

애초에 우리가 잘 가고 있었던 길이었는데, 언젠가부터 방향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니 뗀 굴뚝에 연기나랴? 라는 말도 있듯이 현시대의 풍조가 생겨난 것을 두고 마냥 젊은 이들의, 피고용인의 불성실함, 게으름, 약아빠짐이라고 함부로 단언해서는 안 된다. 자발적 열정을 착취하고 토사구팽 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저런 말도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현상이 부정적이라면 현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원인을 살펴봐야 한다. 결과를 고치기 위해서는 원인을 고쳐야 한다. 출산율을 올려보겠다고 출산율에 꽂힌 정책들을 내세울 게 아니라 왜 애를 낳지 않는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 근본원인을 건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무의식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그리고 개개인으로 쪼개지고 양극화되어 버린 현상이 자발적인 열정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다.


볼 때마다 생각에 잠기게 되는 일러스트 (ⓒSteve Cutts)


이에 대해 <가짜노동>의 공동 저자 데니스와 아네르스는 바빠 보이는 척, 대단한 일인 것처럼 꾸며내는 '가짜노동'에서 벗어나 세상과 유의미한 상호작용을 하는 '진짜노동'을 함으로써 보다 노동의 본질에 가까이 접근할 것을 권한다. 


그들은 누군가를 돕는 데 늘 가격표나 부가가치세가 따라올 필요는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또한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을 넘어선 그 이상을 책임져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타인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고, '자발적'인 일을 하고, 호기심과 열정에서 비롯된 일을 하는 것. 안락함과 수동성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 그것이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바이지 않을까.



비슷한 이야기가 삶은 혼자가 아닌 함께의 이야기라는 것을 말하는 <두 번째 산>이라는 책에도 등장한다.

저자인 데이비드 브룩스는 직업에 대해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이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보는 소명의 실현 수단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그는 현시대에 팽배한 초개인주의 풍토는 결코 답이 될 수 없으며, 공동체 정신의 회복이 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막연한 공동체가 아니라 특정한 시공간에 토대를 둔 특정한 공동체, 특정한 사람, 특정한 신조에 헌신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헌신'을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약속이라고 말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진정한 헌신일수록 더 많은 보상이 뒤따른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내가 다른 누군가를, 혹은 공동체를 위해 전심을 다할수록 그로부터 반대급부로 돌아오는 것이 필연적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얻으려고 하지 않았기에 더 얻게 되는 아이러니는 참으로 아름답다.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은 관계주의다. 관계주의는 '내 코가 석자.' 혹은 속된 말로 '알빠노?'의 정신이 아니라 상대를 위해, 공동체를 위해 책임감을 가질 준비가 되어 있는 열린 마음에 대한 지향이다.


데이비드가 말했듯 자발적 태도와 대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의 결과물이 반드시 무급 형태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주는 자는 대가를 강요하지 않고, 받는 자는 감사한 마음에 자신이 내어줄 수 있는 선에서 무언가를 줄 수 있는 구조. 그리고 그것을 받는 입장에서는 애초에 대가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주면 주는 대로, 주기가 어렵다면 어려운 대로 감사히 받는 것. 이 두 가지가 상호 조화를 잘 이룰 때 선순환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거꾸로 하고 있다.


주는 자는 대가를 요구한다.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결과물의 퀄리티는 보장하지 않으면서 대가는 "반드시" "목숨 걸고" 사수한다. 손님이 없어서 속된 말로 "꿀 빤다" 라면서 핸드폰만 8시간 했으면서 8시간만큼의 급여를 당당히 요구한다. 반면에 소수의 사람은 8시간 동안 손님이 없다고 노는 게 아니라 청소를 하거나 물건 정리를 하거나 손님이 왜 없는지를 사장 대신 고민하며 이를 타개할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받는 자는 당연히 여긴다. 손님이 있든 없든 8시간 동안 주어진 몫을, 아니 그 이상을 하는 아르바이트생을 보며, 아르바이트생 잘 뽑았다고 좋아할 뿐 보너스를 주거나 최저시급 이상으로 올려주거나 하는 사장은 거의 없다. 도제식으로 일을 배워하는 일부 업종에서는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간절함을 악용하여 거의 무급에 가까운 형태로 피고용주를 부리듯 한다.



자발적인 태도, 조금이라도 뭔가를 더 주려고 하고 덜 받으려고 하는 겸양의 태도. 이것은 주는 자와 받는 자 모두에게 요구되는 바이며, 우리 사회가 미덕으로 삼고 꾸준히 추구해야 하는 가치다.



활터가 그런 곳의 모범기지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하나의 화두와 실마리를 던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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