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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Jun 06. 2024

창과 방패

가르치려는 자와 흘려듣는 자

화살 걸고 당겼다가 조준하고 놓으면 끝. 겉으로 보기엔 매우 단순해 보이는 게 활이다. 

그러나 직접 활을 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미묘한 차이 하나가 만들어내는 결과의 양상이 매우 크다는 것을. 겉보기와 달리 활은 복잡하다. 알면 알수록 신묘한 것이 활이다.


같은 명리학 스승에게 배운 10명의 수제자도 똑같은 사주를 제각각 다르게 풀어낸다고 한다. 수학처럼 답이 딱딱 떨어지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의 가치관이 필터처럼 작용하기 쉬운 것이다. 최종 결과물에는 그 사람의 개성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묻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활도 그렇다. 같은 스승에게 배우고 같은 사법을 추구해도 자세도, 느껴지는 기운도, 과녁에 맞는 화살의 개수도 다르다. 궁사마다 체형도 다르고, 힘도 다르고, 기운을 느끼고 활용하는 감각이 다르기 때문이며 내면의 마음의 굳셈 정도도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활을 제대로 아는 사람일수록 함부로 조언하지 않는다. 애초에 조언을 웬만해서는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활을 단순하게 보는 사람들일수록, 특히 자신이 잘 쏜다고 생각하거나 최소한 요 근래에 물이 오른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남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고 싶은 의욕이 넘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겐 일상이 된 체크리스트들, 예를 들어 중구미(팔꿈치)를 엎는 것, 아랫장을 밀으라는 것, 다리를 넓게 벌리라는 둥, 만작이 안 됐다는 둥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전부다(그 세부 사항들이 심지어 다 정설은 아니기도 하다).


그들이 놓치기 쉬운 것은 바로 활을 쏘는 사람의 지향점과 마음 가짐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자세의 아름다움이 과녁에 잘 맞는지의 여부보다 중요할 수 있다. 누군가는 자세가 아무리 망가져도 상관없으니 과녁에 백발백중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게 더 중요하다 생각할 수 있다. 심지어 무엇이 아름다운 자세인지에 대한 생각조차 서로 다를 수가 있다. 


실제 그 조언의 내용과 효과가 ‘객관적으로(만약 객관이란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의 입장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대전제가 매우 중요하다. 전제부터가 다르면 대화 양상은 평행선의 연속이 될 수밖에 없다. 반에서 늘 1등만 하고, 서울대에 다니는 사람은 만년 꼴찌가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그들이 수업 시간의 내용을 받아들이고 흡수하는 과정 자체가 본인과 판이하다는 상상을 쉽게 하지 못한다. 본인에게 당연한 것이 남들에게도 그럴 거라 쉽게 단정 짓는다. 활터에서 남에게 조언을 쉽게 하는 사람들도 같은 마음이다. 철저히 나의 관점에서만 조언을 한다. 내 눈엔 상대의 문제점이 너무나도 쉽게 보인다고 생각하고, 해결도 간단할 거라고만 생각한다.






활을 배운 이래로 지금까지도 자발적인 시행착오를 고집스럽게 겪는 중인 나는 여기저기서 조언을 듣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미소로 화답하고 그리고 흘려듣는 것이다. 줌통만 흘려 잡는 게 아니라, 조언에도 흘려듣기를 적용해 버린다. 내가 받아들이는 조언은 내가 어떤 마음으로 활을 대하고, 어떤 사법을 구사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사람의 말뿐이다. 


비가 오는 날 나는 비옷을 입고 장화를 신고 나가서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물장구를 치고 싶은 사람에게, 우산을 쓰고 가라고 손에 쥐어 주는 건 그 사람을 위한 조언이 아닌 거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은 상대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면, 그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 이유라면, 그건 상대를 위한 조언이 아니다. 그런 목적 하에 이뤄지는 조언은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다.


내가 좋으려고 하는 조언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아니 안 하는 게 더 나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누군가의 방황을 못 보겠어서, 그것을 눈에서 치워버리고 싶어서, 해결해 주고 그 대가(?)로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은 의욕이 앞서는 거라면, 하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런 조언은 마치 동물들이 영역 표시를 하고 다니듯, 나라는 존재를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나 자신이 존재가치가 있는 인물임을 확인하고 싶은 본능에 가까운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영역표시’가 아닌 ‘진짜 조언’은 신중함을 동반한다. 조언을 들을 사람을 이해하고, 그가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문제 해결 방식을 선호하는지 등을 면밀하게 이해해 보려는 과정을 먼저 밟는다. 최소한 상대에게 질문 하나라도 해봐야 한다. 


조언하는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눈에 ‘노력 없이’ 쉽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역, 그렇기에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영역까지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나는 그것이 정성 어린, 진정 상대를 위한 진정한 조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조언이라면 누구든 고맙게 받아들일 것이다. 


최고의 세일즈맨들이 입을 모아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상대로 하여금 그게 본인에게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을 심어주면 구매를 권하지 않아도 그쪽에서 먼저 사고 싶어 한다고.


또 하나 중요한 사실 하나는 누구에게나 어려움을 경험하는 시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패도 해보고, 우여곡절도 겪어보고, 시행착오를 느끼며 답답함과 분노에도 휩싸여보고. 그런 시간들이 인생에서는 보석처럼 값진 시간이다. 조언을 쉽게 해 버리는 것은, 설령 그 마음이 ‘너 잘되라고’ 하는 것일지라도 진정으로 상대를 위한 행위가 아닐 수도 있다.




이런 얘기를 여자친구에게 하자, 그녀도 고개를 끄덕이며 격하게 동의한다고 한다. 그런데 뒤따르는 말을 들으니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하다. 


그녀가 고민이 있거나 힘든 상황에 내게 조언을 구할 때 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건네던 말을 들으면 속으로 ‘말이 쉽지.’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고 한다. 내 딴에는 내 가치관을 강요한 게 아니라 그녀 맞춤형으로 나름 정제를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당사자는 그렇게 느꼈던 것이다.


나 역시 그녀의 상황과 성향, 마음 상태들을 면밀하게 고려하고 조언을 했다고 하기엔 부족했던 것이다.

‘이렇게 멋진 해결책을 제시해 준 나 자신, 너무 멋진데?’와 같은 생각에 취해있었던 건 아닐까. 반성해 본다.



섣부른 조언은 듣는 이의 방어기제를 유발한다. 창과 방패의 싸움은 그렇게 시작된다.


헤매는 상대를 안타까워하는 게 아니라, 너는 너 자신만의 과정을 겪고 있구나 하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상대가 그것을 잘 이겨내리라는 믿음과 응원의 미소를 보내주는 것 아닐까. 


내가 창을 들지 않으면 상대도 방패를 들지 않는다. 

창이 아니라 손을 내밀어야 상대도 손을 내민다. 그래야 서로가 손을 맞잡을 수 있다. 




진짜 조언은 각자 안의 등불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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