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단남 May 30. 2024

어떤 길인지보다 중요한 건 어떤 마음인지다

정심정기(正心正己)의 마음


며칠 전의 일이다. 기존에 다니던 샵에서 옮길 요량으로 새로 개업 예정인 가게에 지원을 하고 면접을 보러 갔다. 사장은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눈 뒤에 상담 시연 면접이 진행됐다. 남에게 평가를 받는 자리는 고객을 상대하는 일과 달라서인지 어딘지 모르게 긴장이 된다. 그래도 어느덧 오프라인에서 1년 반 넘도록 상담을 해오고 있는 타로는 큰 탈 없이 넘어갔다.


그런데 문제는 사주였다. 타로에 비해 온라인 손님이 주류를 이룬 터라 타로에 비해 버벅거림이 심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날 일진이 사나워서인지 평소보다도 훨씬 말문이 막혔다. 사장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내게 공부를 얼마나 했느냐고 물어봤다. 2년 정도 했다고 하니 돌아오는 답이 내 가슴에 날카롭게 박혔다.


"공부 안 했네."


자존심이 팍 상해서 나도 모르게 "한 건데.." 하고 구차한 혼잣말을 해보았다.

안 하느니만 못한 외마디 변명이었다.


명리에 도통한데 마가 끼었는지 실력 발휘를 못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렇다고 공부를 안 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실용적으로, 효율적으로, 실전에서 써먹기 좋게, 고객의 입맛에 맞는 맛깔난 요리를 만들어 내는 나만의 레시피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 이 바닥에서 구를 대로 굴러서 잔뼈가 굵은 그녀의 눈에는 보였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이따금씩 "공부 안 했네"라는 그 말이 내 귓전을 맴돈다. 그게 내가 지나온 2년이 넘는 시간을 헛되이 만드는 것 같아 울적함이 들었다. '아니 본인도 딱히 조예가 깊어 보이진 않더만!' 하는 유치한 마음의 소리도 들려온다.


이 감정이 단순히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한 것 때문일까? 그건 아니다. 내가 잘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 보다 내가 명리를 대하는 근본적인 마음가짐 자체가 조롱이라도 당한 것 같다는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은 것에 가깝다.



아마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나의 반골 외골수 기질 탓일 거다. 활에서도 나는 그런 경향을 보인다. 남들이 우르르 몰리는 길, 빠른 길을 맹목적으로 좇는 길에서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다. 남들이 활을 맞히는 재미로 쏠 때 나는 나를 다스리는 도구로 대한다. 그들이 스포츠와 체육으로써 활을 바라볼 때 나는 그것을 몸으로 하는 명상이요, 기의 순환을 경험코자 하는 고상한 행위로 바라본다.


전제부터가 다르니 겉으로 드러나는 양상 또한 달라진다. 남들은 과녁에 잘 맞지도 않는데 왜 저렇게 활을 쏘나 싶은 답답한 마음에 이따금씩 내게 이런저런 조언을 하기도 한다. 겉으로 웃으며 그 말을 듣는 척하지만 한 고집하는 성격의 나는 끝끝내 나의 길을 계속 걸어간다. 겉으론 유하지만 속으론 옹골찬, 고집도 이런 옹고집이 없을 거다.


한 번씩 문득 내가 신기루를 좇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게 멋져 보이고 고상해 보이기 때문에 허상의 북극성을 만들어놓고 땅 위에 발을 딛고 살고 있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비단 명리나 활의 문제만이 아니다. 내 삶 전체가 그런 양상을 띠고 있다. 남들이 그저 그물을 치고 낚시를 하기 바쁠 때 나의 배는 부푼 이상의 돛을 달고서 탐험을 떠나고자 했다.


내가 항해라고 부르는 것을 남들은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라고 부를 것이다. 내가 듣고 온 갈매기의 울음소리, 날치 떼가 만들어 내는 격동적인 움직임, 집채만 한 고래의 커다란 몸집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위용. 그런 것들은 순전히 나의 경험에만 존재할 뿐, 당장 오늘 저녁 반찬에 오를 식량거리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나는 다른 동료들이 잡아준 것들을 얻어서 끼니를 해결할 따름이다.


그런데 나의 배는 항구를 진정으로 떠난 적이 있던가? 남들은 그 배로 고기를 잡고, 미역을 캐고 있을 때 나는 저 멀리 세상을 탐험할 거라는 그럴싸한 이상을 내어 걸었지만, 정작 한 번도 세상 밖으로 제대로 나간 적이 없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계속해서 항구로, 마을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떠나고자 하는 그 길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는 방증인지도 모른다.


이건 나태함입니까
애초에 헛된 꿈입니까
채워진 것도 버거워 비어버린 것도
두려우려 사는 것도 아닌데

정답인 위로 없이 나는 살아갈 수 없네
미지근히 사라지는
가득 날 채울 순 있을까

손에 쥐려 애쓴 것들이 이유마저 흩어져
이대로도 괜찮다면 난 어떤 날을 살아야 하나
걱정 하려 사는 건 아닌데

텅 빈 마음을 난 미워해 마주하지 않네
향기같이 사라져버릴
가득 날 채울 순 있을까

신지훈, <가득 빈 마음에> 中


나는 어쩌면, 추구하고자 하는 대상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보일지에만 천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만이 옳고 다른 것은 그르다 여기면서 말이다. 하지만 다른 것을 그르다 여기는 마음을 잘 살피면 자신의 길이 옳다는 믿음의 부족을 발견할 수 있다. 확신을 얻고자 다른 것을 부정하는 마음은 얄팍하다.


어느 길을 가든 스스로 가는 길이 옳다는 믿음과 확신은 필요하다. 그러나 자신의 길에 대한 확신이 곧 다른 이의 길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되면 곤란하다. 각자가 옳다 믿는 방향으로 우직하게 걸어 나가야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 나는 나, 너는 너. 그렇게 나와 네가 서로 독립된 객체로 만날 때 조화로운 세상이 된다.


억척스럽고 계산적이고 속물적인 것의 이면에는 근면 성실함과 책임감이 있기도 하다.

그것은 한때 품었던 이상이라는 풍운의 꿈과 타협한 결과물이기도 할 수 있지만,

그것이 그들이 애초에 품었던 꿈 그 자체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스포츠로 활을 보든, 재미의 도구로 보든, 그 자체에 몰입한 사람들은 활에 미쳐있다. 활에 대한 연구로 여러 가지 서적과 자료들을 독파한다. 누군가는 활과 관련된 각종 역사적 흔적들을 파기도 한다. 과연 나는 어떠한가? 진심의 저울에 추를 올리면 그들만큼 묵직하다 할 수 있겠는가?


그 어떤 행위에도 가벼움은 없다. 그걸 내가 함부로 판단해선 안 되는 거다. 가벼움을 추구하는 행위에도 진심이 담기면 무거움이 생겨나는 법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결국 어떤 길을 걷느냐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걷느냐 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 자신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필요하다.

요 근래에 진정으로 나 자신과 조우한 시간이 얼마나 되었나 돌아본다.

나 자신에게 침잠하고, 스스로와 대화를 진득하게 나눠본 지가 얼마나 되었던가.

길 위에 찍히는 발걸음에 실리는 무게가 가벼워진 것은 나를 돌보지 않은 탓이다.



길 위에 확실히 걸음걸음의 흔적을 남기며 나아가야 뿌리가 굳건해진다.

굳건하지 못하면 남의 작은 한마디에 흔들리기 쉽다.

뿌리가 튼튼하면 흔들리더라도 다시금 허리를 곧추세워서 나아갈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은 바쁘다는 핑계로 또 활에 소홀했구나. 소홀함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티가 나기 마련이로구나.


내일은 활터에 나가서 활을 가득 당기며 몸과 마음에 기운을 끌어모아야겠다.


정심정기(正心正己)의 마음으로!


활쏘는 풍경 (1900년대 초로 추정) ⓒ코리아니티





 


이전 26화 마음이 합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