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단남] 7월 2-4주 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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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이 다른 타국에서 모닝페이지를 한번 써보면 어떨까 싶어서 공책을 가져오긴 했는데 정작 일정 중에 내가 억지로 의도하지 않고 자연스레 주어지는 기회가 없었다. 요론에서 처음 맞이하는 아침인 어제도 알람을 맞춰둔 시간보다 눈이 일찍 떠지긴 했지만, 몸이 찌뿌둥하여 도로 잠을 청해버렸다. 나는 그것을 모닝페이지 쓰기 '실패'가 아니라 내 피곤함을 해소하기 위한 욕구를 '충족' 시킨 것이라고 해석했다. 최근에 들었던 유튜버 <더마프>님의 말처럼 말이다.
이는 예전에 읽었던 <시작의 기술>이라는 책의 저자 개리 비숍이 했던 말과 비슷하다. 당신은 늘 이기고 있다. 당신 안에 지닌 관점이 '역시나' 옳았다면서, 그렇게 컴포트 존에 계속 머물기로 한다는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비슷한 말처럼 들리지만 관점이 180도 다르다.
개리가 한 말은 그러니 기존 관점의 재확인만 무의미하게 반복할 게 아니라, 정말로 원하는 것을 새로이 주입하라는 것이다. 진짜 하고자 하는 '의지'가 드는 그런 것으로. 반면에 더마프님의 얘기는 첫째로, 그러니 분별할 필요가 없다고 들렸다 내게는. 우리는 저마다 현재 원하는 욕구를 계속해서 '선택'하고, 또 '해소'한다. 그러니 특정 영역에서 욕구 해소가 '억제'되고 있다고 느낄 필요가 없다.
여기에는 계속적인 지향점이 없이 그 상태 자체로 괜찮다는 텅 빈 마음이 뒤따르게 되는 것 같다. 컴포트 존에 고여서 썩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방향과 속도대로 흘러 흘러 가는 것이다. 여행의 진짜 묘미는 바로 이러한 경험의 축소판이 될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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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에게 인연이 될만한 것들에 자연스레 몸을 내맡겼다. 내가 느끼는 내맡김은 피동적, 수동적 자세가 아니라 오히려 적극성과 동시에 수용성을 갖추는 것이다. 진인사대천명이야말로 그런 내맡김의 태도에 가장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나에게 필요한 건 짝꿍이, 그에게 필요한 건 내가 해결해 내고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건 근처의 누군가가 또 해결해 준다. 이쪽에서 먼저 '필요'를 알리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내던진 필요에 따라 돌아오는 답이 어떤 것이든 '수용'할 준비만 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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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달거리 일정이 겹친 짝꿍에게 이번 여행에 나보다 얼마나 더 많은 인내가 요구되었을까를 생각하면 참 대단하고도 고맙다. 그녀에 비하면 내 그릇의 크기가 한참 더 작다는 걸 느꼈다. 내가 그녀보다 나은 점들보다 그녀가 나보다 나은 점들이 더 빛을 발한 이번 여행이다. 그녀 자신도 나를 위해 노력한 게 아니라, 결국 본인 스스로를 위한 여행을 한 것이다. P형스러운 내맡김의 여행에 적응해나가며 즐거워하고 감탄하는 순간들이 점점 늘어나는 그녀를 보며 나도 참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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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도 안 했던 유리가하마 투어도 참 환상적이었다. 지는 노을에 반하고 또 어둑어둑해진 거리를 자전거로 달리다가 올려다 본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들은 또 어떻고. 그리고 이곳 사람들의 친절함과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느긋함이 참 기억에 남는다.
손님과 직원, 손님과 손님, 그리고 관광객과 관광객끼리 꼭 특정한 자리가 마련되지 않더라도 스몰 토크가 이루어지는 게 보기 좋았다. 이걸 비단 '서양스럽다'라고만 할 게 아니라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다는 방증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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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맡김과 다른, 여행의 또 다른 묘미는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말뿐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경험하는 데 있다. 오키나와나 요론에서 경적 소리를 단 한 번도 듣지를 못했다. 자동차들은 보행자와 자전거를 우선시하여 배려해 준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부탁드립니다가 가장 많이 들리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출발해 온 나라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짝꿍과 세 번째로 온 이번 해외여행은 정말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것만 같다. 나중에 꼭 다시 와서 이번 여행을 추억하며 보내야지.
살아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삶은 참 경이롭고 찬란하다. 함께 인생을 즐기고, 힘들기도 하며, 그 생생한 경험들을 나눌 상대가 곁에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커다란 축복이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상대에 대한 더 깊은 사랑과 감사를 느낀다. 앞으로의 인생 여정도 달든 쓰든 내 옆의 사람에게 계속해서 충실하리라. 이제 다시 돌아가면 이번 여행에서 느꼈듯 내맡기며 감사하고 또 사랑하며 살련다.
요론은 여기에 두고 떠나지만, 이곳에서 느낀 이 소중한 감각만큼은 깊이 간직하고 또 자연스레 널리 퍼뜨리며 살아야지.
물건은 수입을 해와야 하고 관세도 내야 하지만 '정신'은 가져오는데 어떤 비용도 들지 않으며 재고가 쌓이지도 않는다. 여행의 마지막 묘미는 스스로가 이런 '정신적 보부상'이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야기와 정신에는 돈이 들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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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후 처음으로 쓴 모페. 시차도 없는데 뭐 여독이랄 게 있겠나 싶다가도 은근 일상으로의 전환이 더디게 됐다. 정돈되지 않은 일상이 나를 반긴다. 문자 그대로 정리 정돈을 또 한 번 될 때가 된 것이다.
물질의 정체는 정신의 정체를 야기한다. 일례로 인간의 창조성은 숨 막히는 반지하 단칸방보다는 창문이 커다랗고 자연과 근접한 공간에서 더 자연스레 넓어진다. 우리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내면의 신성이라는 창조성이 흐르는 그런 통로이자 창구.
그 창구가 머무는 환경, 그로 말미암은 마음의 크기가 곧 나 자신을 통해 흘러나올 창조성의 질을 결정한다. 사실 질은 별 상관이 없다.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그것은 1g이든 100g이든 똑같이 영혼의 숨결이 진하게 담겨 있을 테니. 문제는 그 양의 많고 적음에 따라 발현의 정도나 지속성에 차이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우리 안엔 검열관이라는 분석하는 마음, 이성이 존재한다. 그것은 사회화된 또 다른 우리 자신이다. 녀석은 재고 따지고 분석하고 사회적 시선이나 체면 등을 운운하며 창조성이 올린 기획안을 모조리 부결 처리해 버린다. 이 검열관을 통과하려거든 창조성이 뿜어져 나오는 양을 늘리든, 아니면 검열관의 지위를 격하시켜야 한다. '네 말대로 안 했는데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더라?' 와 같은 증거의 수집이 필요하다.
창조성의 크기가 커지든, 검열관의 힘이 약해지든, 그럴 때 우리는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적극적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우주의 법칙은 쌍방향성이기 때문에 그런 적극적 자유를 만들어낸다고 프롬이 말한, '자발성'을 삶에서 발휘하여도 역시 창조성은 높아지고 검열관은 약해질 테다.
인간이기에 갖는 공통분모는 평등이란 이름으로 존중받아야 하며, 개별 존재이기에 갖는 자질은 고유성이란 이름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서로가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존재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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