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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Jul 08. 2024

甲辰年 辛未月 첫 번째 기록

[주간단남] 7월 1주 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4.07.01.(월) 


(..)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 그러면 운은 절로 좋아진다. 지금이 순풍이라면 그것대로, 어렵다면 어려운 대로 도움을 줄 것이다. 물론 이건 인간 입장에서의 해석일 뿐, 자연의 섭리에 '도움'이나 '선의' 같은 건 없을 테다. 


그저 '현상'이 존재할 뿐이다. 우린 그러한 현상의 펼쳐짐에 스민 원리를 짐작하면서 적응해 살아갈 따름인 게다. 절기의 변화에 따라 제철 식품이 달라지듯 우리가 운이라 일컫는 변곡점마다 취해야 할 마음과 행동의 양식이 있는 것이다.


(..)

어제 상담은 약속시간도 늦었고 종료시간도 늦었지만 언짢음은 없고 보람과 뿌듯함만이 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이 벅찬 감정이 어떤 직업에 종사하며 헌신하는 자발적 의지를 만드는 것 같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기쁨을 주지 않으면 헌신하지 않겠다는 건 이미 헌신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는 자가당착을 초래한다. 


나보다 상대를, 개인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을, 자신이 품은 신념이나 대의를, 자신이 책임지는 가족을 위한 헌신은 그냥 헌신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게 마땅하다. 아니, 마땅함보다는 아름답다는 말을 붙이고 싶다.


혹여나 누가 알아봐 주지 못함에도 지속할 의지를 내고 또 유지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성숙한 헌신이고, 내가 함양해야 할 덕목이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결핍된, 사라져가는 미덕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상호 연대와 신뢰의 회복이 시급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성에 젖어 서로를 비난하고 혐오하게 만드는 차단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

양(陽)은 드러나야 하며 밝아야 한다.  음(陰)은 숨겨져 있고 어둡고 음습하다. 현시대는 음지에 너무나 많은 이가 몰려있다. 그들을 따로 모아놓는 것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도 허용될 수 없을 만큼 기상천외한 사상과 사고들을 유발할 뿐이다.


음지는 존재하되 고립되지 않아야 하며, 단단하게 뭉쳐지지 않아야 한다. 고립 속에서 스스로 나올 수 있도록, 그리고 이따금씩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그 본래의 역할을 다 하면 될 뿐이다.


지금은 음지의 세력이 암암리에, 때로는 대놓고 양지에 드러나 그 흔적을 남기려 하니 문제다. 낮에는 태양이 뜨는 게 지극히 자연스러운데 달이 태양을 가리려 하는 형국이다. 일식이 일어난 채 지속되면 현재 우리가 아는 그런 자연은 일순간에 사라지고 없게 된다.


작금의 사회는 '문화적 일식 현상'이 꽤나 자주 일어나고 있는 것만 같다.



24.07.02.(화)


(..)

한 인간이 자발적인 의지를 발휘하는 것을 보면 그저 그 자체로 아름답다. 거기엔 생명의 활력, 생동감이 역동적으로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활동의 세부 내용은 중요치 않다. 심지어 활동이 아닌 휴식이어도 관계가 없다. 생동감을 동반하는 저 자발적 의지는 인간의 이성과 마음이, 그리고 마음과 영혼이 모두 일직선상에 나란히 정렬을 이룰 때 자연스레 일어나기 때문이다.


내면에 깃든 신성을 가장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두는 것이 바로 자발적 의지의 실천이기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 수밖에 없다. 분석이 직업이 아닌 이상 자꾸 모든 것을 분석하려 할 필요는 없다. 스마트폰의 원리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이해하면서 사용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삶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그저 내맡길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은 저마다의 존재 이유가 있다. 분석과 비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것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필요한 핵심 원천은 아니다. 머리보다는 가슴이, 뇌보다는 심장이야말로 자연스러운 내적 원천에 다다를 수 있게 하는 핵심이다.


(..)

매사를 다 정해두고 통제하고 집착하려 들지 마라. 그저 어떻게 삶이 펼쳐지는지를 바라보라, 능동적으로. 피해자나 피동적인 위치가 아니라 주체성을 가지고서 말이다. 오늘도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는 것도 그러한 일환이다. 


삶이 내게 뭔가를 해주기만을 손가락 빨며 기다리라는 게 아니다. 우리가 먼저 삶에게 다가가 손을 먼저 내밀자. 인사도 될 수 있고 행동도 될 수 있고 기도나 명상도, 봉사도, 창조도 될 수 있다. 주체성이 생(生)의 본질이라는 것만 잊지 말자.




24.07.04.(목)


(..)

특정 신념이나 사상, 가치관이 없는 사람에게 현상은 그저 현상일 뿐이다. 소나무가 악마의 나무라 믿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나라에 놀러 왔다가는 늘 퇴마의식을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정작 우리나라 사람은 소나무를 보며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데 말이다.


최근 일어나는 비극적인 사건들을 마주하며 사람들은 애도의 댓글보다는 저마다 억눌려 있던 감정을 배설하느라 여념이 없어 보인다. 스스로 억눌렀거나 남에 의해 억눌렸던 감정들이 우리 안엔 늘 존재한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우리 안에 있다.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뿐.


내 안에 존재하는 그런 감정들을 외면하고 꾹꾹 눌러 가둔 채 만들어낸 거짓 자아와 실제 자기 자신의 간극이 클수록 인간은 쉽게 분노한다. 어느 레이키 힐러의 말마따나 '용납이 되지 않는 일'이 많을수록 간극이 큰 사람이다.


이러한 간극을 해소하는 게 감정적 치유요, 무의식의 정화작업인 셈이다. 감정은 판단하거나 억누르는 게 아니라 인정과 수용으로써 해소시켜야 한다. 아니 어쩌면 해소라는 말조차도 특정 감정을 사라지게 해야 한다는 인위적 목적의식이 드러난 말인지도 모른다. 해소는 결과물이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정과 수용을 한다고 곧바로 어떤 감정이 사라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짧게는 2~30년, 길게는 그보다 두 배 이상의 기간 동안 감정을 지하실에 쌓아두고 묵혀뒀는데 청소가 하루아침에 쉽게 되겠나. 청소가 덜 된 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현상을 기술할 따름인 것이다. 다만 그것이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할 수는 없을 뿐.


그런 상태를 우리는 '상식'과 '예의'라고 껍데기를 씌워놓은 탓에 억눌리고 뒤틀린 자아들이 어떤 사건 사고만 생겼다 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억눌린 감정을 배설하는 공중 화장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는 조용히 하는데 왜 쟤네는 떠드냐, 혹은 쟤네도 떠드는데 왜 내 이름만 적느냐.

이렇게 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슈마다 댓글을 달며 남들과 다투거나 자기 말만 마땅하다고 말하거나 하는 것 모두 말이다.




24.07.05.(금)


(..)

세상에는 참으로 각양각색의 사람이 저마다 가진 재능을 펼치며 살아가는 듯하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때론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자기 색채를 찾지 못했다는 방증이 아닐까. 자신의 일에 빠져 진정으로 몰입하는 사람은 그 즐거움에 취해 타인을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이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삶의 문턱에 기웃거리며 관심을 갖는다.




24.07.07.(일)


(..)

늘상 그렇듯 '언젠가는 List'에 수록된 것이었는데, 'Why not now?'라는 생각이 강해진 탓일까. 그 찬란하고도 단순한 아름다움의 손짓만으로도 이성이라는 벽이 사르르, 마치 설탕이 물에 녹듯 허물어지고 만 것이다  







[주간단남] 속 알짜배기 사색만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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