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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Jul 01. 2024

甲辰年 庚午月 네 번째 기록

[주간단남] 6월 4주 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4.06.24.(월) 


(..)

너무 해가 중천에 뜬 시각이라 그런가. 쓸 말이 없네. 그렇다고 전혀 아무것도 적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 우리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든 마치 배경음악처럼 계속 재생되고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

6월이 저물어 간다. 2024년 상반기가 저물어 간다. 무언가의 저묾은 다른 무언가를 낳는다. 자연 만물에 있어 세대교체, 순환은 핵심과도 같다. 받았으면 베풀고, 베푼 만큼 또 베푼다. 형태와 시기를 우리가 조절할 수 없을 뿐.

(..)

월요일 아침부터 늦잠을 잤는데 마음 한켠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함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이래도 되나 싶은 걱정도 함께 존재함이 느껴진다. 오묘한 상태다. 내려놓음이 곧 자유를 선사한다는 말은 일견 맞는 말임이 분명하다.

(..)

완드 10번 카드처럼 우리는 감당하기도 버거운 마음의 짐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다. 적당한 짐은 군장이나 중량 조끼처럼 우리의 내면의 근육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시대는 정도를 넘어설 정도로 많은 이가 자발적인 번아웃을 유발하고 있다. 그것이 미덕이라도 된다는 듯이. 

자조와 냉소가 뒤섞인 씁쓸한 미소 뒤에는 사실 나약한 자신이 드러날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감춰져 있다. 두려울수록 더 열심히 산다. 치열하고 화려하게 자신을 장식하는 사람들일수록 의외로 내면에 깊은 공허를 감추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공허든 번아웃이든 그것은 내면의, 더 나아가서는 심신의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그런 불균형은 삶이라는 전체성과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원인일 것이다. 삶에서 편식은 없어야 한다. 지나친 분별심, 취사선택하고자 하는 태도는 자신 안에 자리 잡은 견고한 필터인 세계관을 더욱 두텁게만 만들 뿐이다.

세상과의 거리는 마음에 세워진 그 거대하고도 옹졸한 성벽의 두께와 비례하여 멀어진다. 그럴수록 부조화와 불균형은 커진다. 내면의 성벽은 허물어져야 한다. 우리에겐 내면의 안식처가 되어줄 작은 울타리 면 족하다. 그 이상은 스스로를 전체로부터 분리되기를 자초하는 것이며 공허와 불만족 속에서 계속 살아가겠노라 선언하는 것과 진배없게 된다. 조금은 내려놓고, 진짜 세상을 마주하러 가보자.




24.06.25.(화)


(..)

공교롭게도 오늘이 경신일庚申日이다. 명상 마을에서 하룻밤 자고 와야지 하고 그냥 정한 날인데 말이다. 이 역시 그저 일어날 일들 중 하나였단 말인가. 운에서 온통 庚과의 합이 이루어지니 영락없이 묶이는 형국. 오히려 이렇게 자발적인 묶임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요즘 내겐 이런 수행공간이 필요했으니까.

디지털 디톡스. 이름만 거창하지 단지 일상에서 인터넷과 전자기기만 멀리하고 산책, 운동, 명상, 독서 등과 같은 아날로그적인 것에 시간을 쏟으면 되는 간단한 것이다. 하지만 일상의 구석구석을 침투한 디지털은 아날로그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둘 사이의 경계를 완벽히 허물어버렸다. 책을 읽어도 유튜브 플레이리스트가 틀어져 있어야 하고, 밥을 먹을 때도, 운동을 할 때에도 폰을 손에서 내려놓질 못하는 게 작금의 우리 자화상 아니던가. 

인간이 야생동물을 가축화시켰듯 우리는 거대 IT 공룡기업들의 온순한 가축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가축이 다시 자연의 본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가 갈릴 정도의 의지가 필요하거나 돈이 필요해진 시대다. 전원만 끄면 되는 그 간단한 것이 그리도 어려워서 우리는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일상과 차단된 공간으로 이동한다. 새 공간이 주는 낯섦과 돈을 냈다는 보상 심리가 합심하여 나를 바른(바르다고 믿는) 길로 이끈다. 목동을 좇는 양들처럼.

 이를 통탄하거나 냉소하거나 할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뱃살을 빼려면 살찐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먼저이듯.




24.06.26.(수)


(..)

오대산 정기를 받으며 잠에 들었다 일어나서 모닝페이지를 짧게나마 쓰려고 자리에 앉았다. 익숙한 곳이 아니지만 한 번 와본 곳이라 그런지 이곳에서 펜을 쥐는 것이 낯설지만은 않다.

(..)

소위 일컫는 '원영적 사고'는 정신승리나 합리화처럼 보일지 모르나, 나는 그것은 긍정적 사고에 더 가깝다 말하고 싶다. 도저히 부정적 측면 말고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 애써 반대쪽 측면을 보려고 목을 기린처럼 빼거나 돌아가지도 않을 몸을 180도 회전하는 게 원영적 사고가 아니다. 

긍정의 사고란 오히려 사건을 부정적으로'만' 보려 하지 않음에 더 가깝다. 상황을 한 발짝만 떨어져서 보면, 너무나도 가까이서 어떤 한 측면에만 집중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사물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애써 합리화하는 게 아니라 이쪽 면은 이렇고 저쪽 면은 저렇다는 균형 잡힌 사고방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한 발짝만 더 뒤로 물러나보기. 나는 이게 참 중요하다 생각한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편향적 사고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 처하면 기계적으로 자신에게 익숙한 모드(mode)로 전환하여 그 상황을 해석하고 그에 따른 반응을 한다. 이때 아주 잠시만 멈추고 한 걸음만 뒤로 물러나보자. 원영식 사고에 버금가는 자신만의 사고 법을 찾게 될 터이니.




24.06.27.(목)


(..)

모닝페이지는 내가 훨씬 오래 썼는데 누군가는 1년 쓰고도 엄청난 주목을 받는다. 무엇이 다른 것일까?


이것이 신흥세력을 견제하는 구세력의 마음 아닐까. 그가 가진 자질이나 인품 등이 부러운 게 아니라 그를 따르는 추종자가 부러운 거다. 정확히는 추종자 수가 상징하는 이 시대의 부와 명예라는 결과가 부러운 거다. 


거기서 한 걸음만 더 깊이 들어가면 노력이 절로 인정받는 선순환의 고리가 부러운 거다.


인풋이 아웃풋을, 다시 그 아웃풋이 인풋을 자극하고 촉진하는 순환의 고리야말로 인간을 살아 숨 쉬게 만든다. 자발적인 '활동'(일부러 노동이라 적지 않았다)을 가능케 하고, 나눔과 베풂이 더욱 활발하게 일어난다.


(..)

일단 유명해지면 똥을 싸도 박수를 받는다는 말에 비견할 수 있을 거다. 이건 창작자보다도 대중들의 특성을 반영한 말 같다. 인간은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에 반응한다. 일부 남다른 소수의 사람들만이 메시지 자체에 주의를 기울일 줄 아는 안목을 지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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