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담당의사가 민수의 수술이 잘 끝났다는 소식을 막 전했을 때쯤 우진이 병원에 도착했다.
은영을 비롯하여 오매불망 결과를 기다리던 이들은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머리를 크게 다쳐 언제 깨어날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의사의 말에 건강히 깨어나길 한마음으로 기도했다. 은영이 중환자실로 민수를 보기 위해 들어가고 나서야 현우는 궁금증이 가득한 눈으로 우진에게 물었다.
"현장은 어땠습니까?"
우진은 한숨을 쉬며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깨끗했어. 타살시도 흔적이나 유서도 없었고 cctv에는 1층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찍혔는데 정확히 15분 후에 추락했어"
"건물 내에 민수선배를 본 사람은 없었습니까"
"모두 알다시피 오전 8시부터 출근하는 사람이 없잖아. 1층 가게는 4시에 문을 열고 다른 사무실도 거의 비어있거나 9시는 넘어야 들어오니..... 그 시간에 선배밖에 없었을 거야. 추락하기 전에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고 경찰도 말하더군"
"근데 민수선배님은 오늘따라 왜 아침 일찍 회사에 왔을까요? 평소 아침에 회사에서 뵌 적은 없었던 것 같아서요"
"아내분 말씀으로는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셨대요. 오늘도 집에서 7시쯤 출발하셨다고 하니 사무실에 바로 오신다면 도착시간 8시 맞아요. 저번에 집에서 1 시간 걸린다고 하셨어요"
미연이 눈을 반짝이며 자신 있게 말했다.
"회사에 도착해서 바로 옥상으로 갔고 15분 후에 투신이라... 진짜 이상해. 그런데 더 이상한 건 말이야...... 엘리베이터에 찍힌 게 아무것도 없었어. 자살을 하러 정성스럽게 8층옥상까지 걸어서 갔다는 말이지"
우진은 진지한 눈빛으로 읊조리며 말했다.
"선배님도 민수선배님이 자살하려고 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현우는 중환자실을 한번 돌아보며 작은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다른 가능성이 있나?"
"일단 조사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저는 선배님께서 깨어나실 때까지 기다려볼 겁니다. 그때까지는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을 겁니다"
현우의 말에 미연도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선배 휴대폰은"
"경찰에서 조사한다며 수거해 갔습니다. 저 그런데... "
"왜"
"아... 아닙니다.."
현우는 유라의 통화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녀를 만나고 난 뒤 뭔가 확실해지면 말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오랜만이다 용현우"
휴대폰 화면에 유라의 이름이 뜬것을 보았을 때는 설마 하는 마음이었지만 목소리를 듣자마자 확신이 들었다.
"니가 어떻게......"
"그 얘긴 나중에 하고 혹시 임기자 님이랑 같이 있어?"
"임선배 사고가 좀 있어서 다치셨어. 지금 수술 중이야"
"뭐? 무슨 사고?"
"그게.... "
"일단 우리 만나서 얘기하자 "
유라는 전화번호를 알려주고는 연락 달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여전하구나 한유라'
특이하고 당차고 종잡을 수 없는. 그래서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던 사람.
한편으로 궁금증이 밀려들었다.
'전화받자마자 난 줄 어떻게 알았지? 임선배와는 또 어떻게 아는 거지?'
현우가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멀찌감치 누군가와 열심히 통화를 하던 고대표가 다가와 일행들에게 말했다.
"경찰에서 연락이 왔는데 컴퓨터 기록에서 뭔가를 찾았나 봐. 내가 가서 알아보고 연락 줄 테니까 다들 그만 들어가 봐 수고 많았어"
"그럼 저도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우진이 이때다 싶어 고대표와 함께 시야에서 사라지고 잠시 후 은영이 퉁퉁 부은 눈으로 면회를 마치고 나왔다.
미연이 다가가 은영을 안아주다가 두 눈이 빨개지며 함께 울기시작했다.
현우는 민수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울먹이던 은영이 현우에게 말했다.
"몇 달 전 친한 친구가 죽었다고 많이 힘들어했었어요. 그때 오래 다닌 신문사 나오고 그래도 지금 동료분들 만나면서 많이 밝아져서 먹던 약도 끊었는데..."
"먹던 약이라뇨?"
"우울증 진단을 받았었어요. 신문사 다니면서 마음의 병이 왔었는지...... 그런데 최근엔 잠을 잘 못 자고 악몽을 꾸는 것 같았어요... 우울증이 재발해서 그런 시도를 한 걸까요?"
"아직 속단하기 이릅니다. 혹시 처방전이나 약들 볼 수 있습니까?"
"네 아마 집에 있을 거예요"
"맞다! 저번에 회식 때 약을 먹고 있다고 하셨었는데 그건 무슨 약인지 혹시 아세요?"
미연이 생각난 듯 현우와 은영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아마 영양제 같은데 친구한테 선물 받았다고 했어요"
"그 친구분 누군지 아시나요?"
"죽었다던 친한 친구가 그 사람이에요. 그래서 무슨 약인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약국에 가서 물어봤더니 국내에는 없는 약이라고 했대요"
현우는 그제야 미연의 부탁으로 민수에게 약에 대해 물어봤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 후로는 별다른 얘기를 듣지 못했는데 그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 없는 약이라면 구하지 못했다는 거구나......"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인생을 들여다봐요 그게 쌓여서 나중엔 내 것이 될 거예요]
민수의 목소리가 귓가에 또렷하게 들리는 듯했다.
현우는 자살한 여배우의 사건 취재를 다시 하면서 눈여겨보았던 내용들을 떠올렸다.
[오선화 사망 전 중증우울증 혼합형 불안장애 알코올중독 진단 및 다수 약물 복용]
[한강에서 40대 A 씨의 시신 발견. 경찰조사결과 A 씨는 한 달 전 실종되었던 미혼 여의사로 외상의 흔적이 없으며 부검결과 다수 마약류 검출]
알려진 정보로만 본다면 자살을 예상할 수 있는 흔한 사건이었지만 현우가 눈여겨본 것은 댓글이었다.
[오선화 단골 피부과 의사래요. 그 병원 직원이 지인입니다. 벌써 몇 명이나 죽었대요. 청담동 A피부과]
[사건과 관련해 취재 중입니다.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글에 메일주소까지 남기고 기다렸지만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 심지어 며칠 후에는 댓글까지 삭제된 상태였다.
민수가 복용하던 영양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그 약이라는 것에 대해 제대로 조사해 볼 생각이었다.
다음날 아침 은영에게서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말씀하신 약통을 찾았는데 한알이 남아있었네요. 일단 사진을 찍어 보냅니다. 복용했었던 우울증 약이랑 처방전도 함께 첨부합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사진 속의 약통은 흔히 볼 수 있는 하얀색의 평범한 약통이었다. 약은 조금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정제된 모양이 아닌 하얀 캡슐이었다.
곧바로 약이름을 찾는 앱을 통해 검색을 시도해 보았지만 똑같은 약을 찾기는 힘들었다.
사진을 확대하며 자세히 뜯어보고 있는데 마침 고대표에게서 전화가 왔다.
"임기자가 쓰던 컴퓨터에서 드론과 자살이 검색됐는데 짐작 가는 게 있나?"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검색되는 단어들입니다."
"그런 거지? 그렇군"
고대표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약에 대해 조사할 겁니다"
"약이라니?"
"민수선배가 복용하던 약입니다. 최근 사건들이 대부분 어떤 약들과 관련된 것들이 많아서 한번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오. 좋은 생각이네 이제 좀 기자다운 눈썰미가 느껴지는군"
고대표의 목소리에서 칭찬과 응원이 묻어났다.
"열심히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래도 모든 건 민수선배가 깨어나야 알 수 있겠지만요"
"그래, 기사 쓸 때 억측은 자제해주도록해. 나라안팎으로 민감한 시기야. 대선 앞두고 이렇게나 시끄러우니 나라가 우째될런지.... 혹시 사건자료 때문에 경찰서 갈 때는 내가 말해놓을 테니 연락 주고"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대표님"
[어떻게 그 삶을 함부로 얘기하지 않고 또 감정에 너무 치우치지 않고 국민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까]
현우는 민수가 했던 말을 반복해서 곱씹으며 이제는 내가 취재한 정보를 세상에 내보낼 때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는 생각에 묵직한 사명감을 느꼈다.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현상들이 아무리 전염병 같다지만 그 죽음들을 단순히 개인의 선택으로 치부해 버렸을 때의 문제점에 대해 누군가는 제대로 조사를 해야만 했다.
문제의 죽음들을 분석하고 원인을 찾아가다 보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무언가가.
우진의 말대로 아주 엄청난 특종일 수도 있고.
현우는 생각에 잠긴 채 사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책상서랍에 있는 스크랩북을 찾고 옥상으로 직접 올라가 사고현장을 보기 위해서였다.
회사입구에서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복도로 걸어가던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전화 안 했어????"
차분한 어조로 또박또박 말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유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