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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아 Aug 09. 2022

찰나의 시샘

오늘의 단편 2

맑은 계곡, 여자 셋의 웃음소리, 혼자 동 떨어져 있는 아현을 생각하며.



“웅, 보여? 계곡에서 놀다가. 피는 좀 났는데 엄청 아프진 않아.”     


계곡에서 정신없이 놀다 문득 통화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무릎 상처를 들여다보며 통화하고 있는 윤진의 얼굴이 보였다. 약간 섞인 콧소리, 마치 함께 있는 듯 모든 걸 보고하는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저 대화 주제, 이제 곧 백일이라던, 그 남자 친구가 분명했다.


벌러덩 누워있던 아현은 돗자리 가장자리를 손으로 쓸며 괜스레 울적한 기분에 잠겼다. 하, 연애하고 싶다. 저게 바로 연애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나만의 티엠아이를 대방출할 수 있는 상대가 있는 것. 몇 시에 일어났는지, 잠은 제대로 잤는지, 어디 아픈덴 없는지 끊임없이 알고 싶어 하는 관계가 있다는 것.


사실 아현은 그런 일거수일투족을 애인에게 모두 고하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었다. 뭐랄까, 굵직굵직한 이슈만 간단히 통화로 공유하는 스타일이랄까. 하지만 나이가 들며 이제 그런 사건들마저 나눌 대상이 없어졌다는 게, 아현을 속상하게 만들었다. 물론 오늘 같이 계곡에 놀러 온 윤진, 민희, 고은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그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 아무거나 말할 수 있는 관계를 말하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오래된 친구들에게 하지 못하는 말이 더 많은 법이다.


여하튼 무릎에 피가난 걸 카메라로 찍어 남자 친구를 보여줘 가며 통화하는 윤진을 보니, 아현은 며칠 전 혼자 새벽에 응급실에 다녀온 자신이 괜히 기특하고 장하게 느껴졌다. 반복되는 야근에다 스트레스성 폭식으로 위경련이 제대로 왔던 날. 누군가에게 같이 가달라고 할 정신도 없었다. 굳이 사람들과 공유할 만한 것도 아니라 그냥 혼자만 알고 지나갔는데. 쟤는 저렇게 무릎에 피난 것까지 다 일러바치네.


고등학생 때부터 한 달 걸러 한 번씩 학교 남자애들에게 고백을 받던, 뽀얀 피부에 긴 생머리를 가진 윤진이 괜히 미워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현은 주로 길고 긴 짝사랑만 했었고, 두 어번 사귄 남자들도 다 아현이 먼저 고백한 경우였다. 친구들은 ‘그래, 사랑은 여자가 쟁취하는 거지’하며 아현을 치켜세웠지만, 사실 아현은 한 번쯤 고백을 받아보고 싶었고, 드라마에서 나오는, 너 없으면 안 되겠다고 말하는, 그런 뜨거움에 한번쯤 리드당해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런 연애 상대는커녕, 마음에 드는 사람조차 나타나지 않아 무료한 일상을 보내니, 이런 바람조차 사치처럼 느껴질 뿐이다. 오늘 계곡에 놀러 온 저 셋은 모두 연애 중. 그 자체만으로도 재수가 없다. 더 재수 없는 건 이제 아무도 아현에게 '연애 안 하냐'라고 묻질 않는다는 거다. 7년 사귄 남자 친구와 헤어지던 날, 친구들은 아현에게 그까짓 남자, 널리고 널렸다며 소개를 해주겠다고 열을 올렸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부담 주지 않으려고 연애 얘기를 먼저 꺼내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만, 아현은 자기 앞에서 연애 얘기를 꺼내지 않는 친구들이 되려 서운했다. 사실 그냥 다 아니꼬운 걸지도 모른다.


사실 아현은 7년간 별 탈 없이 연애하던 그때의 스스로를 꽤나 자랑스러워했다. 은근히 으스댔던 것도 같다. 기념일에 한 번씩 올리는 인스타그램 사진 한 장에 남몰래 그런 메시지를 담았다. 나의 연애는 별 탈 없이 순항 중이야, 정말 아름다운 한쌍이지 않니? 말로 하면 노골적인데 모르는 척 올리면 좀 멋져 보이는 그런 느낌의 사진들 말이다.


그래서 지금, 코맹맹이 소리로 남자 친구와 통화하는 윤진과 연애 중인 다른 친구들이 그때의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연애를 할까 봐 짜증나는 걸지도 모르겠다. 사랑에 빠져 세상이 온통 핑크빛이라 남들 눈은 신경 쓰지 않던 그 시절의 아현처럼, 저들도 그렇게 이기적으로 사랑하고 있을까 봐. 자기들의 사랑이 꽤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봐. 그런게 거슬린다는 건 분명 아현의 문제일 것.


아현은 놀러 와서도 이런 외로운 생각에 잠기는 자신이 너무 못나 보인다고 여기고 말았다. 새로운 사랑이 필요한 걸까. 혼자여도 샘나지 않으려면 훈련이 더 필요한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아현은 발바닥에 붙은 흙을 탈탈 털어내고, 다시 계곡에 발을 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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