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단편 1
단편은 처음입니다. 다양한 습작을 남겨볼 생각입니다. 피드백 환영입니다.
"이것도 내가 많이 양보한 거야"
겨우 손바닥 만한 액자 사진을 벽에 걸면서도, 민아는 기어코 생색을 냈다. 거실에 굳이 결혼사진을 전시해야 하느냐고 오전 내내 입이 나와있던 민아는, 결혼사진을 걸지 않으면 떡볶이를 더 이상 만들지 않겠다는 승수의 말에 금세 입장을 바꾸었다. 승수의 떡볶이는 민아가 승수와의 결혼을 결심한 데 아주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승수도 그걸 잘 알았기 때문에 종종 써먹었다.
민아와 승수의 결혼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특이했다. 물론 모든 이들의 결혼이 특별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이들의 결혼식은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민아는 결혼식장을 보러 다닐 때부터, 만나는 매니저들에게 “신부대기실은 사용하지 않을 예정이니 대기실 이용 금액을 뺄 수 있냐”라고 묻고 다녔다. 생전 처음듣는 요구를 들어줄 식장은 당연히 드물었다. 몇 군데를 돌아다녀서야 민아는 말이 통하는 웨딩홀을 찾았고, 민아는 식 당일 약속대로 신부대기실에 한 발자국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식장 입구에서 신랑과 나란히 서서 하객들에게 악수를 청하는 민아의 모습은 가히 혁신적이었다.
하객들은 입구에 서있는 민아를 보고, 민아가 얼마나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숨겨놓았길래 식 순간까지 공개하지 않는 것인지 기대했다. 마침내 “신부, 입장”소리가 들리고 민아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차라리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으면 좋았으련만, 사람들은 신부의 모습에 경악해 박수를 치는 것조차 잊고 말았다. 신부는 청록색 수트 차림이었다. 드레스도 아니고, 하얀색도 아닌 청록색 수트. 공기가 한순간에 차가워졌다.
"아니 왜, 그 걷지도 못하는 긴 드레스를 입고 인형처럼 앉아있어야 돼? 신랑은 여기저기 인사하러 다니잖아. 그리고 꼭 하얀색일 필요가 있어? 하얀색이 순결을 뜻한다고? 순결의 기준은 누가 정한 건데. 하얀색 안 입어도 내 마음은 세상에서 제일 순결해. 웃기고 있어 진짜"
열을 내는 민아의 옆모습을 보며 승수는 웃었다. 북카페에서 민아를 처음 만났을 때도, 민아는 이런 표정을 하며 열을 내고 있었다. 민아는 늘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책모임을 했다. 민아가 승수의 눈에 들어온 시점부터, 승수는 북카페에 출석 도장을 찍었다. 민아는 모임에서 가장 목소리가 크고 말이 많았다. 민아의 음성이 자꾸 승수에게 꽂혔다. 자신의 생각을 잘 드러내지 않는 승수에게 그런 민아의 모습은 흥미로웠다. 책모임에서 민아를 만난 건 승수는 행운으로 여겼다.
그런 민아를 좋아했기에 승수는 청록색 수트를 입겠다는 민아의 생각을 꺾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다만 왜 꼭 청록색이냐고 물어본 적은 있었다. “이 세상에 초록색 만큼 자연스러운 색은 없는 거 같아. 난 뭐든 자연스러운 게 좋더라.” 짧고 간결한 대답이 돌아왔다. 민아는 죽어서 식물이 되고 싶다고 말했었다. 햇빛을 받고 비를 마시며 땅과 새와 벗하며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민아는 자주 분노하고 열을 내는 다혈질이지만, 동시에 자연을 사랑하고 평온을 유지하는 매력적인 사람이다. 그런 민아가 결혼식 장에서 청록색 수트를 입는 건 너무나 ‘민아다운’ 선택이었다.
마침내 거실에 결혼사진까지 걸리자 완벽한 '신혼집'의 모습이 됐다. 민아는 친구들을 집에 초대했다. 식 후 민아를 처음본 친구들은, 민아의 예상대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내가 결혼식장에는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말을 못 했는데..”
-"...내가 사 오라던 그 양초 사 왔어?”
(선물 뜯는 데 여념이 없다.)
-"아니 너는 세상에 신부가 어떻게..”
"아 내가 꽃향 말고 숲향 사 오라고 했잖아, 그 시원한 향. 영수증 있어?”
이미 민아를 오래 봐온 친구들은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게 익숙한 듯 보였다. 승수는 저렇게 집단적으로 독백을 하면서도 소통하는 민아의 친구들이 늘 신기했다. 모두 다르지만 민아와 닮은 이들이었다. 아무리 생각이 비슷해도 신부인 민아가 청록색 수트를 입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모양이다. 오래된 친구들보다 민아를 더 알고 있다는 생각에 승수는 괜히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한바탕 결혼식 이야기가 오고 간 뒤, 거실에 모여 앉은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벽에 걸린 결혼사진에 머물렀다. 사진 속 청록색 수트는 원래부터 민아의 옷이었던 것처럼 아주 잘 어울렸다. 민아는 그날 입었던 청록색 수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부부가 만족하는 결혼이 우선이라고 생각한 민아는 굳이 남에게 선택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민아는 시작부터 타협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렇기에 민아와 승수에게 청록색 수트는 세상에 외치는 일종의 선포였다. 부부가 원하는 대로 삶을 꾸려가겠다는 선포.
그럼에도 민아는 거실에까지 사진을 걸자는 승수가 조금 오버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사진을 걸고 보니 오히려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쪽은 민아다. 그렇게 한참 사진을 보던 민아가 말했다.
“이 옷 입기 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