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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핑 포인트로 유명한 양양 죽도해변.
이곳에 가기 전 나는 막연히 파도를 타는 서퍼들의 모습만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해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푹 젖은 물안경을 쓰고 수영복을 입은 아이와 물에 들어갈 생각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평상복 차림의 부모들, 서핑수트를 입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젊은 남녀, 슬리퍼를 끌며 천천히 걷던 동네 주민처럼 보이는 나이 든 어르신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담기 위해 해변으로 달려간 나 같은 이까지.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지만 우리에겐 하나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모두 파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해변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바다를 향해 서있었다. 벤치나 모래사장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곳에서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건 물결이다. 바람을 타고 밀려오는 파도이다. 하염없이 지평선과 파도를 바라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파도는 자연의 섭리를 따라 밀려온 뒤 머릿속 어지러운 상념을 거두어갔다. 이런 점 때문에 때때로 파도의 모양이 갈퀴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와 마음속이 텅 비어 고요해지면 無가 그 자리를 채운다. 무아지경인가? 진득하게 몰두해있지 않더라도 우리는 잠시라도 그걸 경험할 수 있다.
얼마 전 읽은 김영하 작가의 책 <여행의 이유>에 나오는 챕터 제목들이 스멀스멀 떠오른다.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그리고 '오직 현재'. 여행지엔 내게 상처를 가져다주었던 것들이 소거되어있다. 그런 물건이나 사건이나 사람들이 시시각각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여행은 오직 현재만을 감각하게 하고 그 순간 나는 복잡한 문제들로부터 잠시 해방된다. 특히 해변에서는 파도가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다양한 모양을 한 채 끊임없이, 쉴 틈 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멍'한 상태가 된다. 그때 나는 오로지 현재에만 충실한다. 누군가 내게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표현을 하나의 단어로 바꾸어보라고 한다면 나는 '해방감'이라고 대답할 테다. 현재에만 머물러 있기에 그 순간 나는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떨어져나와 철저하게 혼자가 된다. 그 시간 속에서 바다처럼 무한하게 확장될 수 있는 해방감을 느끼곤 한다.
서퍼들은 바다에서 자신이 몸을 맡기기에 좋은 파도를 기다린다. 나 또한 파도를 타는 서퍼들의 모습이 보고 싶었기에 같은 것을 기다렸다. 찰나의 시간에 몸을 맡기기 위해 서퍼들은 하염없이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강해지거나 때때로 작은 배들이 파도 위를 스르륵 훑고 지나가면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파도의 크기가 커진다. 그러나 모두가 파도타기를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막 서핑을 시작한 서퍼들은 "up!"을 기다린다. 초보 서퍼들은 강사가 내지르는 커다란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가 찰나의 리듬에 맞춰 재빨리 보드 위에 올라타야 한다. push up! 그리고 보드 위에서 용감하게 몸을 일으켜야 한다. stand up! up! up!
'up!'은 지금이 바로 파도와 하나가 될 최적의 타이밍임을 알리는 시그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순간을 놓치고 몇몇 사람들만이 반짝-하는 찰나를 캐치해 파도에 올라탄다. 타이밍을 놓친 이들은 짙고 푸른 바닷물에 다시금 잠겨 다음을 기다려야 한다. 능숙한 서퍼는 파도와 하나가 되어 날렵하면서도 부드러운 몸짓으로 보드 위에 올라 파도를 탄다. 아주 자연스럽게 바람과 파도에 몸을 맡긴다. 어떤 이는 파도와 함께 모래사장 쪽으로 밀려오고 어떤 이는 파도의 선을 따라 바다를 길게 가로지른다. 찰나의 순간을 위해 긴 시간 바다에 잠겨있는 사람들. 적절한 파도가 언제쯤 다가올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바다에 몸을 맡긴 채 떠있는 사람들. 바다를 사랑하고 함께하는 사람들. 그들이 그곳에 둥둥 떠있는 이유는 파도를 탔던 그 짧은 시간 각인된 몸의 감각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또는 그 감각을 한 번이라도 느껴보고 싶어서일 테다. 한 번이라도 그 맛을 본 사람 중 몇몇은 전율이 흐르던 짜릿한 몸의 감각에 취해, 중독되어 파도와 영영 헤어지지 못한 채 해변 근처를 배회하거나 언제든 다시금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양양 바다가 좋아서 그 풍경을 카메라에 꽤 담아왔어요.
앞으로 얼마간은 양양 바다에 대한 글이 이어질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