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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림 Jun 10. 2019

브레이크가 고장난 부부의 가드닝

프롤로그

또 밤을 새 버렸다. 


모처럼 공기 좋은 저녁시간, 손잡고 공원 산책을 하고 돌아와서 우리는 바로 작업에 돌입했다. 오늘의 미션은 젖은 휴지에 발아해놓은 바질 씨를 화분에 하나하나 옮겨심기다. 발화율이 60% 이상이라고 적혀있어서 씨앗을 넉넉히 뿌려뒀는데 뿌려놓은 바질씨앗 거의 대부분 이틀 만에 콩나물 같은 뿌리가 났다. 40개 가까이 뿌려놨는데 이를 어쩐담. 일단 팔을 거 둬 붙이고 집에 있는 포트 화분 10개를 모아놓고 흙을 채운 뒤 핀셋으로 퉁퉁 불어 올챙이처럼 된 씨앗을 하나하나 집어 흙 위에 올려준다.  이 아이들이 또 다 새싹을 내버리면 그 뒷일은 어떻게 감당하지? 또 한 놈씩 분리해서 따로 심어줘야 제대로 자랄 수 있을 텐데. 일단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우선은 한 포트당 씨앗 4개씩(혹은 그 이상) 떨어뜨리고 살짝 흙을 덮어 촉촉하게 분무해준다. 


내가 열심히 올챙이 같은 씨앗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고라니 군은  상토, 코코 칩, 펄라이트, 분갈이흙 등을 골고루 섞은 먹음직한 비빔 흙(?)을 만들고 흐뭇하게 못다 한 분갈이를 시작한다. 분갈이할 식물을 고르고 어울리는 토분을 골라서 능숙하게 자리를 잡아주고 흙을 올려준다. 각자 열심히 자기 일에 몰두하다 문득 눈이 마주쳤는데 둘이서 흙장난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웃음이 난다. 분갈이가 언제부터 우리만의 놀이이자 힐링이 되었을까. 베란다가 따로 없어 거실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하다 보면 온 집이 흙 범벅이 되지만 하루 걸러 한 번씩 할 만큼 분갈이할게 많고, 또 사실 재밌기까지 하다. 


분갈이를 다하고 청소를 하고 나니 벌써 새벽 4시다. 잘 때도 되었건만 이제 목마르다고 아우성치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필레아 페페랑 수박 페페에 물을 주고 나면, 마란타가 목말라 보이고, 또 오르비 폴리아는 며칠 전에 물을 줬는데 그새 말랐네 하며 물을 주는 식이다. 화분이 몇 개 없을 땐 물을 주고 싶어도 마르는 타이밍이 자주 오지 않았는데, 지금은 화분이 많아짐과 동시에 식물들이 폭풍 성장하는 봄이므로 매일 누군가에게 물을 주는데도 항상 목말라하는 아이들이 생긴다. 식물 물시중 집사 노릇 하기 어렵다 투덜대면서도 내심 물 흠뻑 먹고 물방울 샤워 후 파릇파릇해지는 식물을 보면 기분이 좋아져 귀찮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또 식물의 보송해진 흙 위로 물을 부어주면 흙이 천천히 부풀었다가 스며드는데 꼭 커피 내리는 걸 보는 기분이라 재밌다. 


식물이 내 손에 죽지 않고 잘 자라주는 것도 모자라 반짝이는 새잎을 뿜 뿜 뿜어내고, 번식까지 해내는 걸 보고 있노라면 마치 그동안 몰랐던 다른 세상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살아있는 동물을 키우는 것과는 또 다른 신비로운 기분, 마치 자연을 내 손으로 직접 움직이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식물 키우기는 그래서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가 없나 보다. 기다림이 지루하지 않은 느린 시간들, 우리 부부는 가드닝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완전히 푹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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