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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림 Jun 25. 2020

배추전 중독, 그 밍밍하고 고소한 매력

배추전과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상관관계(?)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새 야심한 시각, 초저녁에 급하게 때운 컵라면이 억울해 뭔가 맛있는 걸 먹고 싶은데 냉장고엔 먹을 게 없다. 남편이 씩 웃으며 말한다.

우리 배추전 먹을래?

야밤에 먹는 치킨처럼 기름지고 맛있으면서도 다이어트 죄책감은 덜어주는 힐링푸드, 바로 배추전이다.



배추전을 모르는 분들도 있을 것 같은데 말 그대로 배추에 밀가루 반죽을 묻혀 기름에 구워 먹는 전이다. 배추에 아무런 양념도 하지 않고 오로지 배추 특유의 밍밍한 향과 촉촉함, 그리고 기름에 튀겨진 밀가루 맛으로 먹는 음식이다. 어릴 때 제사가 많았던 우리 집에서 배추전은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음식이었다. 어린 나는 그 밍밍하고 아무 맛 안나는 것 같은 배추전에 한 번도 흥미를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나서부터 종종 배추전의 맛이 떠오르는 날이 있었다. 그 후 남편과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다가 운명처럼 다시 배추전을 마주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수많은 음식들이 나를 군침 흐르게 했지만 그중 가장 먹어보고 싶던 건 단연 배추전이었다. 어릴 적엔 이게 뭐야, 하고 느꼈던 밍밍한 그 맛이 갑자기 미치게 그리웠다.


남편은 배추전이라는 걸 처음 보았다고 했다. 그 맛이 상상도 되지 않는다며 궁금해했다. 그 길로 우리는 슈퍼에서 작은 배추 한 포기를 사서 직접 해 먹어 보기로 했다. 배추 한 포기와 밀가루, 튀김가루(조금 섞으면 바삭바삭해진다)만 있으면 되니 이보다 간편할 수 없다.


배추를 씻어 한 장 한 장 뜯어낸 다음, 밀가루와 튀김가루를 3대 1 정도로 섞은 가루에 물을 섞어 걸쭉하게 만들고 배추에 밀가루 반죽을 묻혀, 달군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노릇노릇하게 구우면 끝이다.

어릴 때 이후 처음으로 다시 맛본 배추전은 어릴 때 먹어본 맛과 동일했지만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바삭바삭하고 촉촉하게 구워진 배추를 주욱 찢어 간장을 찍어 입에 넣으면 수분을 머금은 배추가 내뿜는 촉촉함과 밀가루의 고소함이 어우러져 간장의 짭짤한 맛과 함께 황홀한 느낌이다. 이런 식이면 끝없이 먹겠는데? 그날 우리는 기름 때문에 속이 니글거릴 때까지 배추 한 통을 거의 다 구워 먹었다.


밍밍함, 그것이 배추전의 매력이다. 달고 짠, 맛있고 자극적인 음식이 넘치는 시대에 밍밍함이 매력이라니.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수분 가득한 이파리를 끝도 없이 구워 먹으며 우린 힐링했다. 너무 정직한 배추 맛이라서, 근데 그게 미친 듯이 맛있어서 감탄하며 먹고 또 먹었다.




난 왜 뒤늦게 배추전 맛에 빠진 걸까. 

배추전에 대해 고찰하다 보니 생뚱맞게도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떠오른다. 이 드라마가 딱 내가 생각하는 배추전 맛이다. 자극적인 긴장관계나 스토리의 긴박감 따위 없는데도 보다 보면 멈출 수가 없다. 좋은 사람들끼리 만들어내는 따뜻한 기운을 난로처럼 계속 쬐고 싶어 진다. 나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진다. 

처음에는 현실성 없어 보일 정도로 돈 욕심 없고 좋은 사람들만 나오는 이 드라마가 황당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세상에 저런 사람들이 어디 있어, 저런 담백하고도 친근한 남녀 간의 우정이 실제로 가능해?

다양한 인간과 관계에 대한 완벽한 판타지를 제공하는데 스토리 자체는 단순하고 소소하다. 그들이 주고받는 배려와 따뜻함, 오래된 관계에서 나오는 편안함과 아옹다옹 귀여운 우정이 주요 포인 트니까.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 드라마를 보고 나면 잠시나마 세상이 밝고 따뜻해 보인다. 중독증상처럼 자꾸 그 따뜻한 세계로 들어가고 싶다. 실제로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도 배우들이 한결같이 현장 분위기가 너무 좋아 이 드라마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걸 보니 그들에게도 그 현장이 판타지 세계처럼 따뜻했나 보다.  


서로 챙겨주고 배려해주는 것이 기본 베이스로 깔려있는 인간관계, 그게 당연한 건데도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런 관계를 온전히 기대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 지나가다 어깨만 부딪혀도 보상을 요구하는 상황을 몇 번 경험하면서 타인에 대한 불신이 커지다 보니 세상이 나를 향해 호시탐탐 칼을 겨누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종종 들만큼 나라는 사람도 참 많이 날카로워졌다. 


그렇게, 조금은 싱겁고 밍밍하지만, 촉촉하고 따뜻한 무언가를 찾게 되었다. 내 삶의 방향성도 멀리서 가만히 보니 점점 소소하고 단순하게 변해가는 듯하다. 화려한 일상을 사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정적이고 심심하지만 결코 지루하지는 않은 조용한 일상의 맛. 


그래, 이제 알겠다. 지금 내 삶이 딱 배추전 맛이구나. 

문득 깨달음이 오는 지금, 또 배추전이 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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