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과 무의식의 작동
대학생 딸아이와 대화 도중에 “아빠는 멀티가 안돼. 그러니 하나씩 해” 대화의 앞뒤 맥락은 기억되지 않지만 ‘멀티가 안돼’ 이 말은 나의 뇌리에 꽂혀 남아있다. 무심코 흘러나온 물기 없는 말이 꽤나 나를 옹색하게 만들었다. 그 이후에 ‘멀티’라는 낱말을 또 만났다. 어떤 독서가가 책을 읽을 때 멀티로 읽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두 종류 이상 책을 선정하여 이 책을 읽었다가 저 책을 읽었다가 하면서 효율성을 높인다는 것이다. 어! 멀티가 되네. 그럼 나만 안된다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멀티가 안된다. 우선 이 이야기에 정합성을 띠기 위해서 의식과 무의식 개념을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
인간은 뇌는 안쪽에 위치한 변연계와 외부에 위치한 대뇌피질로 나눈다. 대체로 안쪽 변연계는 무의식을 담당하고 바깥쪽 대뇌피질은 이성 영역인 의식을 담당한다. 뇌는 각 부위마다 그 기능이 제각각 다르고 의식 영역과 무의식 영역을 정확히 나눌 수 없지만 편의상 구분한 것이다.
실제 생활에서 의식과 무의식 작용을 인지하기란 쉬운 일도 아니며 딱히 구분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사례를 들어 이야기하면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 역시도 이러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 사례는 독일 심리치료사 롤프 메르클레, 도리스 볼프 『감정사용 설명서』 책에 나온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다.
처음 자동차를 운전할 때 기억해 보자. 먼저 클러치를 밝고, 기어를 넣고, 깜빡이를 켜고, 사이드 미러를 보고, 액셀러레이터를 아주 천천히 밟는다. 누구나 운전을 이렇게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실전 경험을 통해서 서서히 운전을 익힌다. 여기까지 누구나 운전을 할 때 신경을 곤두 세워 의식을 집중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고가 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많은 실전 경험을 하면 그야말로 운전은 식은 죽 먹듯이 아무 생각 없이 저절로 된다. 이른바 경지에 도달했다. 이 단계는 운전하다가 회사일, 집안일 등 잡다한 딴생각을 한다. 이젠 내 몸은 운전을 하지만 생각은 다른 곳에서 작동한다. 의식 단계에서 무의식 단계로 이동한 것이다. 이는 스스로에게 더 이상 뇌에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저절로 굴러간다는 말이다. 어떤 주의 사항 명령도 없이 자동적으로 무의식으로 이루어진다. 의식 관여가 없는 무의식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좀 더 나아가 보자. 운전 도중에 저 앞에서 보행자가 무단 횡단을 하는 게 보인다. 위험한 상황에서 자동적으로 브레이크를 작동시킨다. 운전자는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고 동시에 인지하여 순간적으로 행동한다. 인간 뇌는 생각과 인지와 행동이 순간적으로 일어나지만, 그 순서는 생각, 인지, 행동 차례로 작동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도 무의식 영역에서 일어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분으로 딱 나누어서 의식과 무의식 영역이 구분되지 않는다. 절대적인 영역이 없다는 것이다. 무의식 영역에 가까운 셈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분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을 일상생활에 투영해 보자. 화가 순간적으로 치솟고, 순간적으로 침울해지고, 우울해지기도 한다. 무의식이 자동으로 작동한다. 타인 행동을 보고 생각하고 인지하고 행동하는 셈이다. 여기서 생각은 타인 행동이 나에게 해를 가하는지 아닌지를 나의 도덕적 잣대에 들이대 순간적 판단을 하고 인지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감정이 동시에 변화하여 행동하는 셈이다.
그러면 의식적인 행동은 어떤 것일까? 이를테면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어 비행기를 예약해 뒀다. 웬걸 일찍 출발했는데도 불구하고, 고속도로에 차가 꽉 막혀 있다. 평소와 달리 전혀 예상 못했던 사항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 난감한 상황이다. 그래서 의식을 집중하여 냉철한 이성적인 결정을 내렸다. 욕을 들어먹고 교통위반 딱지가 떼이더라도 갓길로 가야겠다. 그렇게 판단하고 깜빡이를 넣고 갓길로 달렸다. 모든 의식을 집중해서 운전했다. 이성 영역 의식이 극도로 작동했다. 어떤 일을 할 때 집중하여 생각하고 학습하고 행동하는 따위를 말한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늘 연결되어 있기에 누구나 잘 안다. 의식과 무의식 영역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았다. 참고적으로 의식 영역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뇌는 하이퍼(hyper) 상태가 된다. 뇌는 이러한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러면 종국엔 뇌는 병이 들어 빨간 불이 들어올 것이다.
이젠 처음 문제 제기한 ‘멀티’ 낱말로 돌아가 보자. 독서는 멀티가 된다. 이 말은 나의 이성이 이쪽저쪽으로 옮겨 다닌다는 말이지, 동시에 작동된다는 말이 아니다. 인간은 국어와 산수를 동시에 공부해서 인지하지 못한다. 국어와 산수를 공부하는 것은 시간차를 두고 이성이 옮겨 다닐 뿐이다. 딸아기가 말한 아빠는 “멀티가 안돼”라는 말은 맞다. 한마디 하고 싶다. 나만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멀티가 안된다. 핀잔 투로 말하면 이것 했다가 저것 했다가 순간 이성을 이동하면 “정신 사납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