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민망하게도 요새
‘대단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사람들이 자주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사냐고.
어떻게 매일 일하면서
주짓수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술도 별로 안 먹고, 매일 독서하고 명상하고 글을 쓰냐고.
이런 질문을 받으면
꽤 난처하다.
나는 그 무엇도
딱히 ‘열심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열심(熱心)은 원래 불교 용어로,
보통 하기 싫은 일을 ‘강한 마음’을 내어 ‘의지적’으로 행함을 말한다.
하지만 나는 결코 ‘의지적’이지 않다.
오히려 누구보다 ‘욕구에 충실한’ 인간이다.
늦잠 자고 싶은 욕구를 참는 게 아니라,
운동하며 땀 흘리고 개운함과 뿌듯함을 느끼고 싶은 욕구를 해소한다.
술 마시고 취하고 싶은 욕구를 참는 게 아니라,
무기력에서 벗어나 활력과 유의미한 정보를 얻고 싶은 욕구를 해소한다.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쉬고 싶은 욕구를 참는 게 아니라,
두 다리로 달리며 건강해지고, 사람들과 유대감을 쌓고 싶은 욕구를 해소한다.
유튜브·쇼츠·릴스를 소비하고 싶은 욕구를 참는 게 아니라,
창작물을 축적하고, 매일 더 나은 사람으로 발전하고 성장하고 싶은 욕구를 해소한다.
이렇게 내 하루는
내가 하고 싶은 일들로만 가득 채워져 있다.
흥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일을
억지로 참으면서 절대 꾸준히 하지 못한다.
내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유’, ‘건강’, ‘성장’이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실존이 본질에 앞서고,
선험적 ‘의미’, 내재된 ‘쓸모’, 본래적 ‘목적’ 없이 우연히 기투된 존재다.
칸트가 전 생애를 바쳐 정리한
순수이성비판 (진위-진리-眞),
실천이상비판 (선악-윤리-善),
판단력비판 (미추-아름다움-美) 조차도
한낱 인간이 주조한 밀알에 불과하기에
절대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않다.
세상엔 오직 호와 불호,
즉, 취향만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가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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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란 신념의 위계다.
사랑, 자유, 희망, 건강처럼 직관적으로 선으로 여겨지는 가치조차도
개인마다 우선순위는 상대적이다.
따라서 각각의 개인은
각각의 가치관을 스스로 정립해야만 한다.
가치관 (value system) 이란,
개인적 중요성을 판단하는 심리적 구조물이자
삶의 우선 순위와 옳고 그름의 선택을 돕는 척도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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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각자 나름의 기준으로
나와 타인, 세상과 세계, 행동과 인격의 급과 위계를 나눈다.
따라서 가치는 평등하지 않고
차이를 기본으로 한다.
이를테면 같은 액수의 돈도
‘어떻게 버느냐’에 따라 가치는 달라진다.
혼을 담아 얻은 돈과
몸을 팔아 번 돈의 가치가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은 돈이 최고인 세상이다.
초면에도 거리낌없이 돈 얘기를 하고,
돈이 많은 자가 높은 인격으로 대접받는다.
돈만 된다면,
도덕·윤리도 상관없다는 태도가 만연하다.
개인 가치관과 직업 윤리는 희미하다.
그야말로 ‘상실의 시대’다.
돈이 최우선 순위로 취급되는 세상에서는
개인적 옳고 그름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때문에 사람들은 외부 환경에 쉽게 휩쓸리고 항상 불안해 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남들이 정한 기준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확고한 신념·주관·중심은 없고,
그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취향은 없고 유행만 있으며,
개성은 없고 세뇌만 있다.
아무리 소유하고 획득해도
불안과 우울만 남는다.
기호 자본주의 시대의 성배는 ’좋아요’ 버튼이다.
이 게시물이 ‘마음’에 들었나요? 혹은
이 게시물이 ‘느낌’이 좋았나요?
좋아요 버튼은 대체로
‘감정적인’ 부분을 충족했는지를 묻는다.
‘옳다·그르다, 질적으로 뛰어난가’가 아니라,
‘좋다·싫다, 재미있나·지루한가’를 묻는다.
가치관은 기본적으로
질적 수준에 대한 성숙한 서열 시스템이다.
그러나 ‘좋아요’가 지배적인 의견을 대변하는 지점에서 문제는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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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됐든
재미만 있으면 장땡인 시대에,
좋은 콘텐츠의 기준은
‘그저 지금 이 순간, 기분을 당장 만족시키는가’로 평가된다.
재밌으면 선이고,
노잼이면 악이다.
‘좋아·싫어·재밌어·지루해’
이런 표현들은 미취학 아동과 수준이 비슷하다.
전혀 성숙하지 않고 유치하다.
어떤 콘텐츠가 대중의 기분을 좋게 한다면
선이 되고, 돈으로 이어지고, 가치가 실현된다.
그러나 정상적인 프로세스라면
가치 있는 콘텐츠가 선이 되고, 곧 돈으로 이어져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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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가 등장하면서 기존의 프로세스는 전복됐다.
비정상이 어느새 정상이 되었고,
불건전이 어느덧 건전이 되었다.
‘가치’의 의미는 어느새
자극적, 중독적, 많은 돈, 좋은 느낌 정도로 축소되고 편협해졌다.
이런 흐름을 따라
쾌락 자본주의는 점차 거대해졌다.
흡연 산업, 음주 산업, 설탕 산업, 마약 산업, 유사 성산업을 비롯한
도파민 비즈니스는 결과적으로 개인을 병들게 한다.
수요가 있기에 공급이 있다는 논리는
전제부터 어긋나 있다.
쾌락에는 언제나
무한한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쾌락에 대한 수요는 본능이기에 막을 수가 없지만,
공급은 환경이기에 통제할 수 있다.
수요가 아니라
언제나 공급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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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치 중에도
특히나 고귀하고 소중한 것들이 있다.
매춘부가 대우받는다면 도대체 누가 도덕을, 윤리를, 명예를 선택할까.
돈이 없음으로 천대받고 고통받는다면,
명예가 없음으로도 멸시받고 고통받아야 마땅하다.
돈은 단지 수단에 불과하므로,
올바른 목적을 위한 가치 위계를 세워야만 한다.
삶이 혼란할수록 질서가 필요하다.
인간에겐 의미 있는 규칙, 체계, 법칙이 필요하다.
진정한 다양성은 무절제한 방목, 방조, 방관이 아니라,
올바르고 건전한 규율, 규범, 틀 안에서 형성된다.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계속해서 가치관을 재정립해야 한다.
단단한 신념과 고정불변은 동의어가 아니다.
결이 비슷한 신념 위에서
경험을 통해 가치 위계를 재조정해야 한다.
태도와 인격의 성숙, 발전 여지가 없는 삶은
이미 죽은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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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재미란,
사실 ‘가치’의 산물이다.
인간은 어떤 행위를
‘재미’가 없어서 그만두는 게 아니라,
‘가치’가 없다고 느낄 때 그만둔다.
가십, 뒷담화, 만취, 피상적 대화에서
나는 더 이상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권태와 무의미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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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가치 있게 여기기를 그만두면
더는 재미나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오히려 ‘그때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그 가치 없는 행위에 시간을 쏟고 전념했을까’를 후회하고 자조한다.
물론 이런 종류의 자책은 매우 건설적이다.
가치 위계가 재배열되며 얻는 고통은
부러진 뼈를 다시 맞출 때의 고통과 흡사하다.
그건 바로 성장을 의미하므로.
고통은 가치관의 화폐다.
시련을 겪고, 좌절하고, 감내하고, 극복해야만,
유의미한 가치를 추출할 수 있다.
고통 끝에 얻은 토큰으로
성숙한 가치와 교환할 수 있다.
의미 있는 고통은
성숙한 가치관의 정립을 돕는다.
의미 있는 고통을 직면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가치관도 얻을 수 없다.
올바르게 고통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
내가 달리기를 말할 때 하고 싶은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