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잡이, 파수꾼, 프로메테우스,
자기 전,
티비로 틀어둔 노래를 끄려다가,
오래 전,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갈 때 듣던 노래임을 깨달았다.
나는 금방,
그때의 기억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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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둘, 스물 셋 사이 겨울,
새벽 3시, 4시 퇴근길,
차갑게 어두운 거리, 비틀대는 취객들.
숨쉴 때마다 하얗게 뿜어 나오던 입김들.
그 입김들과 섞여 흔들리던 노래들.
그때 내 삶은
마름모 같았다.
뾰족하고, 비쭉대고, 반듯하지 않고,
날카롭고, 어딘가 비뚤어진,
아주 길고 가는 마름모.
3평 짜리 방,
겨울마다 보일러가 얼고,
벽에 등을 기대면 정수리까지 시렵던 방,
결로 현상으로 성에꽃과 곰팡이 꽃이 피던 방,
실내 텐트와 전기 매트, 온풍기와 라디에이터로 몸을 녹이던 방,
카페트 위에서도 발이 얼얼하고,
방 안에서도 입김이 풀풀 날리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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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내 방엔 그 텐트와 전기 매트가 내 몸을 감싸고 있다.
그때 그 소년은
십 년 후에
이런 모양, 이런 모습으로 살게 될 줄
예상이나 했을까?
미래에서 온 누군가가 그때의 나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말해줬다면
나는 아마 조금도 믿지 않았겠지.
이상을 잃어버린 추악함을 경멸하고,
물질을 숭배하는 속물들을 혐오하고,
순수악보다 위선을 더 증오하고,
평생 가난을 감수하며 시인이 되고 싶던,
순진하고 무지하고 정신적 결벽을 추구하던 소년은,
이제 적당히 때가 묻은 어른이 되었다.
적당히 타락하고,
적당히 속물이고,
적당히 위선자가 되었다.
(여전히 진심으로 존중은 못하겠지만)
적당히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졌다.
어떤 불가해한 사건도,
꽤나 불합리한 사건도,
그저 그러려니 넘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깨달았다.
이것이 타락이 아니라 성숙이라는 것을.
서서히 점차
모든 일에 무뎌지며
이렇게 결국
무감각한 냉혈인이 돼버리는 걸까 두려웠지만,
오히려
생은 훨씬 풍부해졌다.
아는 만큼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진실은,
보고자 하는 만큼 알게 되기도 한다.
홀든 콜필드는 왜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었을까.
절벽에서 떨어질 뻔한 아이들을
마지막 순간에 붙잡는 것.
그것은 단순한 구원이 아니었다.
한 번도 떨어져본 적 없는 자의 오만도 아니었다.
홀든 자신이 이미 여러 번 떨어져본 자이기 때문이었다.
절벽 아래 바닥이 얼마나 차갑고 단단한지 알기 때문이었다.
상처 입은 치료자만이
진정한 치유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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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는 통과의례(rite of passage)가 사라진 시대다.
소년이 남자가 되는 순간,
소녀가 여자가 되는 순간,
개인이 어른이 되는 순간을,
더 이상 아무도 축복하지 않는다.
더 이상 아무도 증명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이가 부유한다.
정체성의 망망대해에서.
가치관이라는 나침반 없이,
좌표라는 지도 없이.
리미넬리티(liminality)의 상태에 영원히 머물러 있는
현대인들의 불안은 여기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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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작은 사명이 생겼다.
섬과 섬을 잇고,
입자와 파동을 연결하고,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다리를 놓는,
코치, 서포터, 가이드.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한 안내가 아니라,
변환의 주재였다.
허위, 불신, 기만, 병폐, 오류, 호도, 위선, 방종, 모순,
착취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절벽에 매달린 이들의 손을 기꺼이 잡고,
가치를 발견하고, 길어 올려,
안전 지대로 안내하는 것을 넘어서
그들 스스로 날개를 펄칠 수 있도록 돕는 것.
완벽한 안온과 안락,
최고의 물질적 쾌락 제공자가 아니라,
온전한 성장과 자립,
최선의 정신적 풍요로 이끄는 인도자.
범인(凡人)을 영웅으로 각성하도록 돕는,
통과의례를 주관하는 연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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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은 말했다.
"신경증은 궁극적으로 영적 문제의 고통이다."
내 앞에 앉은 학생들의 불안과 우울, 무기력과 방황은
단순히 개인적 트라우마나 사회적 압박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의미 상실의 병, 빅터 프랑클이 명명한 "실존적 공허"가
이 시대 청춘들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나 기술이 아니라
존재의 이유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서사적 정체성의 회복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었듯,
나는 내 학생들에게 의미의 불을 건네고 싶다.
하지만 이 불은 거저 건네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피워야 하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들 안에 이미 있는 불씨를 발견하고,
그것이 꺼지지 않도록 바람막이를 치는 것뿐.
그 불이 그들의 내면에서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기를.
그 등불이 그들 각자의 어둠을 밝히고,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도 빛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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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나는 생각한다.
내가 정말 그들을 구원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나를 구원하고 있는 것일까.
스승과 제자,
인도자와 피인도자,
구원자와 피구원자의 경계는
생각보다 모호하다.
아니, 어쩌면 그 경계 자체가
착각인지도 모른다.
헤르만 헤세가 『싯다르타』에서 그렸듯,
진정한 깨달음은 가르쳐질 수 없다.
오직 각자의 체험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나는 단지 동반자일 뿐이다.
그들의 여정에 잠시 함께하는.
우리는 모두 서로를 구원하며,
서로에게 구원받으며,
함께 성장해가는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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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르케는 젊은 시인에게 편지를 쓰며 말했다.
"당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십시오."
내가 학생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도 이것이다.
외부의 소음에 휘둘리지 말고,
타인의 기대에 매몰되지 말고,
사회의 획일적 잣대에 굴복하지 말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으라고.
그 목소리가 아무리 작고 떨린다 할지라도,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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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날카로운 마름모가
조금씩 둥글어지되,
날카로움을 잃지는 않기를.
그들의 차가운 방에도
따뜻한 봄이 찾아오되,
추위에 대한 기억을 잃지는 않기를.
그들이 스스로의 호밀밭에서
누군가의 파수꾼이 되되,
절벽의 의미를 잊지는 않기를.
모든 이가 스스로의 날개로
자유롭게 비상하는 그날까지.
앞으로 나와 조우하게 될
모든 홀든과 피비를 기대하며,
나는 오늘도 호밀밭으로 간다.
연금술사의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