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길이 되려면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는 아름다운 환상 속에서 죽어간다. 하지만 그 환상의 이면에는 '백린'이라는 독성 화학물질이 있었다. 런던의 성냥 공장에서 일하던 어린 여공들은 백린에 노출되어 턱뼈가 변형되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업은 그들을 해고했고, 변형된 얼굴로는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었다. 동화는 이 모든 현실을 지워버리고 오직 죽음의 순간만을 낭만화했다.
벤야민이 말했듯, '모든 문명의 기록은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다. 성냥팔이 소녀의 아름다운 죽음 뒤에는 수많은 아이들의 추악한 삶이 있었다. 안데르센은 구조를 지우고 개인의 비극만을 그렸다.
마치 우리 시대의 '자기계발서'들이 시스템의 문제를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치환하는 것처럼.
2페니 행오버. 산업혁명 시대 런던 빈민가의 숙박시설이다. 로프에 몸을 기댄 채 잠을 자던 사람들의 사진이 남아있다. 1페니를 더 내면 바닥에 누울 수 있었고, 4페니면 관 모양의 나무 상자에서 잘 수 있었다. 인간의 잠조차 상품이 되는 순간, 존재는 소비로 환원된다.
이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80년대 우리나라 공장에서는 화장실 가는 시간을 아끼려 급식에서 국을 뺐다. 몸의 생리적 욕구조차 생산성의 논리에 복속되었다.
인간이 기계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휴식이다.
2012년 스물 둘의 겨울, 나는 복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경기도 안산의 삼립 식품 공장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자본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의 민낯이었다.
4인실 기숙사의 건조한 라디에이터, 수십 명이 나누어 쓰는 좁은 샤워실, 의자 두 개뿐인 휴게실. 공간 자체가 인간의 존재를 최소화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한 시간 반마다 주어지는 15분의 휴식 시간은 왕복 10분의 복도를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5분에 불과했다. 믹스 커피 한 잔과 화장실, 그것이 허용된 인간성의 전부였다.
최저시급 4,800원으로 온갖 초과근무를 통해 400만 원을 벌어들이며 기뻐하던 공장 노동자들의 얼굴을 기억한다. 수백 도의 열기가 가득한 공간에서도 사람들 사이에는 차가운 긴장이 흘렀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케이크 라인에서 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버벅댔고, 숙련공들의 시선은 날카로웠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여기서 나는 인간이 아니라 생산 단위일 뿐이라는 것을.
양팔에 화상을 입었을 때의 일은 더욱 선명하다. 지글거리며 타들어가는 살점의 감각, 회색으로 죽어버린 표피 아래 드러나는 선홍빛 속살. 산재 처리는커녕 오히려 50만 원의 치료비가 청구되었다. 다친 몸을 치료하는 비용조차 노동자 개인의 몫이었다. 그때 어머니가 대신 지불해준 그 돈의 무게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소외'라는 말을 생각한다. 마르크스가 말한 소외된 노동이란,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 과정과 결과로부터 분리되는 상태를 뜻한다. 하지만 현대의 소외는 더욱 정교해졌다. 우리는 노동으로부터 소외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된다.
한병철은 현대 사회를 '피로사회'라고 명명했다. 외부의 강제가 아닌 내재된 강박에 의해 스스로를 착취하는 사회.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의 폭력이 '해야 한다'는 의무보다 더 잔혹하다는 것이다. 공장에서 초과근무를 자청하던 노동자들의 얼굴에서, 나는 이 시대의 자기착취의 표정을 읽었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는 벌레가 된 후에도 회사 출근을 걱정한다. 몸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노동에 대한 강박이다. 우리 시대의 그레고르들은 더 이상 벌레로 변신하지 않는다. 대신 스스로를 기계로 만들어간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관계를 시장의 논리로 재편한다. 인간관계마저 투자와 수익의 관점에서 계산된다.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능력주의는 실패를 개인의 무능으로, 성공을 개인의 덕목으로 포장한다. 시스템의 문제는 은폐되고,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전가된다.
바우만이 말한 '액체 근대성'의 시대에, 견고했던 모든 것들이 녹아내린다. 평생직장, 안정된 관계, 확실한 미래에 대한 믿음까지. 남는 것은 끝없는 경쟁과 불안뿐이다. 우리는 모두 임시직이 되었고, 언제든 교체 가능한 부품이 되었다.
지구온난화, 환경파괴, 양극화, 혐오와 차별.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다. 이윤 추구를 최고 가치로 삼는 시스템, 인간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논리. 성냥팔이 소녀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절망적 현실 앞에서도 말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첫 번째 저항이다.
그리고 정확한 사랑이 필요하다. 막연한 연민이 아니라, 정확한 인식에 바탕한 사랑. 시스템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지도, 개인의 고통을 시스템의 문제로만 환원하지도 않는 균형감.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질문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성냥팔이 소녀의 환상 뒤에 숨겨진 진실을 보는 것, 공장의 열기 속에서도 인간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소외의 시대에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
답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질문하는 한, 우리는 아직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