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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수상록2 16화

그림자의 현상학

Joker : Folie a Deux

by 조융한삶







역린, 혹은 무의식이 발동하는 순간



'역린(逆鱗)'이라는 말이 있다. 현대적 표현으로는 '발작 버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리 온화한 사람이라도, 심지어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초월적 인물조차 예외 없이 가지고 있는 특정 지점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과잉 반응의 촉발점은 대개 운동, 운전, 게임처럼 사소해 보이는 일상의 영역에서 나타난다.


나 역시 평상시에는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적절한 가면'을 착용하고 살아가지만, 분명한 격발점들을 가지고 있다. 주로 몰상식함과 '못 배운' 행태 앞에서 내재된 분노가 표출된다. 초면부터 무례를 떠는 사람, 비오는 날 난폭운전을 하는 사람, 공공장소에서 흡연을 하는 사람들. 또한 사회적 지능이 결여된 채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며 허세를 부리는 과장된 존재들. 나는 이들에게서 형언할 수 없는 '천박함'을 감지하며 강렬한 혐오를 느낀다.






거지, 혹은 존재의 극한에서 마주한 것



우리 아파트에는 한 사내가 산다. 편의상 '거지'라고 부르지만, 그가 정말 경제적 궁핍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쩌면 그는 경제적 자유를 이룬 후 의도적으로 조르바나 디오게네스의 삶을 선택한 현대적 현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몇 가지 외적 징후들이 나의 판단을 뒷받침한다. 대낮부터 슈퍼 앞에서 소주를 마시는 모습, 마르고 왜소한 체구, 해진 옷차림, 떡진 머리, 불결한 외모. 무엇보다 죽어있는 표정과 생기 없는 눈동자, 전반적인 활력의 부재. 한번은 아스팔트 주차장 바닥에 누워있다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몇 년 전 비 오는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분리수거장 앞에서 그가 나와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담배 하나만 빌릴 수 있을까요? 제 손이 더럽게 느껴지면 그냥 거기서 바닥에 던져주셔도 돼요." 자조와 자학, 구걸과 몰락, 초라함과 자존심의 바닥. 그 순간 느꼈던 생생한 역겨움과 메스꺼움을 지금도 기억한다. 다자이 오사무의『인간실격』 도입부를 읽으며 나는 그를 떠올렸다.






응시와 직면, 그리고 투사의 메커니즘



나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드러내는 영화들을 좋아한다. 『똥파리』, 『도가니』, 『한공주』 같은 작품들을 직시하는 편이며, 아리 애스터의 기괴하고 괴기한 세계도 기꺼이 관찰한다. 하지만 인생은 실전이다. 스크린 속에서 객관적으로 격리된 사건과 현실에서 살갗으로 밀착되어 마주하는 감각은 전혀 다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런 존재들 앞에서 이토록 심한 울렁임을 느끼는 것일까. 답은 명확하다. 그들에게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투사(投射, projection). 모든 인간은 타인에게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목격한다. 특히 지독한 불쾌함을 느끼는 지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 심연에는 가장 마주하기 두려운 내 모습이 들어있다. 융(Jung)이 말한 '그림자(Shadow)' 원형이다.






나의 그림자, 혹은 부인된 자아의 목록



낮은 자존감, 결여된 사회성, 무능력, 관심병, 기생충적 존재, 갑분싸 메이커. 배척과 소외, 따돌림과 가난, 박탈과 빈곤, 단절과 도태, 천박함과 빈티, 눈치 없는 히키코모리. 관심받고 싶지만 희미하고, 사랑받고 싶지만 경멸받고, 존경받고 싶지만 혐오스러운 존재. 아무도 친해지고 싶어 하지 않으며, 호흡과 체취, 존재 자체가 민폐가 되는 인간. 멸시받고 무시받고 버림받고 겉돌고 떠돌며, 소속되지 못하고 격리되고 파편화된 투명인간. 라디오헤드의 「Creep」 같은 존재.


그런 존재로의 전락에 대한 소름돋는 공포가 나를 지배한다. 고3 시절 국어교육과 진학을 포기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래서 나는 강박적으로 자기계발에 몰두한다. 배척당하지 않기 위해, 공허하게 텅 빈 껍데기가 되지 않기 위해.






하강과 상승: 신화적 여정의 의미



신화 속 상징들은 현대인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신화의 영웅들이 여정의 막다른 길에서 틀림없이 저승으로 향하는 모습은 의미심장하다. 이들은 스틱스 강 건너편에서 죽음을 경험하며 역경을 극복할 열쇠를 획득해 지상으로 돌아온다.


저승의 신 하데스(Hades)의 어원은 죽음뿐 아니라 그림자, 성장하는 자, 부와 잠재력 등을 의미한다.


즉, 내가 과도하게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나에게만 분노를 유발하는 특정 상황과 장면에는 내가 가장 숨기고 싶은 수치스러운 콤플렉스가 투사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개인의 심중한 잠재력과 성장의 심오한 비밀이 숨어있다.






그림자와의 조우: 온전한 자기를 향하여



따라서 진정한 발전과 성장을 위해, 내면의 진정한 부유함과 잠재력의 실체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지하세계로 내려가 그림자 원형을 직면해야 한다. 의식의 심연으로 잠수하여 무의식의 그림자와 손을 맞잡는 순간, 우리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온전한 자기(Self)'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조커(Joker)는 바로 이러한 그림자의 현현이다. 사회가 부인하고 억압한 모든 것들의 집합체로서, 우리가 문명인이라는 가면 뒤에 숨겨둔 원시적 충동과 파괴적 에너지의 화신이다. 그를 단순히 악역으로 치부하거나 혐오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자기 내면의 그림자를 외면하는 것과 다름없다. 진정한 성숙은 그 그림자를 인정하고 통합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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