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哲 ‘철학’의 ‘철’은 ‘밝다’ 라는 의미다.
이 글자를 잘게 톺아보면, 도끼로 나무를 하나하나 쪼개 입으로 이치에 맞게 설명한다는 뜻이다. 오랫동안 혼자 끙끙대며 고민해왔던 문제들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정교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사유되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혼자 더듬거리며 찾던 출구가 이미 환하게 불이 켜진 채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철학을 일종의 밀키트라고 생각한다. 바쁜 현대인들이 집에서 간편하게 요리를 해먹을 수 있도록 재료와 레시피가 하나의 패키지로 구성된 상품처럼, 철학 역시 수천 년간 축적된 사유의 재료들이 각각의 철학자라는 요리사에 의해 하나의 체계로 패키징되어 우리에게 제공된다. 우리는 그 사유의 밀키트를 구입하여 각자의 삶이라는 주방에서 조리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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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키트가 작동하는 방식은 현대 자본주의의 시간 구조와 긴밀히 연동되어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직접 농사를 짓지 않는다. 대신 쌀을 사고, 그 쌀에는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수확하고 유통하는 모든 과정의 시간이 압축되어 있다. 우리가 지불하는 것은 단순히 쌀이 아니라 그 모든 시간이다. 이처럼 자본주의란 시간을 화폐로 변환하는 거대한 연금술이다.
철학의 밀키트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더 이상 소크라테스처럼 아고라에서 직접 철학하지 않는다. 대신 이미 완성된 철학적 체계를 구매하여 우리의 삶에 적용한다. 하이데거의 실존철학, 사르트르의 자유론, 칸트의 윤리학 같은 것들을. 이는 현대인의 삶이 고도로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사유할 시간과 여유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상실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요즘 SNS에 과몰입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2초마다 바뀌는 이미지와 텍스트에 익숙해진 뇌는 더 이상 한 권의 책을 끝까지 읽어내는 것조차 버겁다. 사유가 파편화되고, 주의력이 분산되고, 생각의 깊이가 얕아진다. 이런 상황에서 철학의 밀키트는 과연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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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죽음은 삶의 양면이고, 당연한 귀결이며, 결코 끝이 아니므로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마지막 숨결을 목격하는 순간, 모든 개념과 이론은 무력해졌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철학의 밀키트로는 결코 요리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어떤 경험들은 직접 겪어야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고, 어떤 사유들은 스스로 길어올려야만 진정한 무게를 갖는다는 것을.
그날 이후로 나는 조용히 '나만의 철학'을 시작했다. 어떤 책에서도 배운 적 없는, 오직 나의 경험에서만 길어올린 사유였다. 그것은 투박하고 정제되지 않았지만, 그 어떤 철학자의 말보다도 내게는 절실하고 생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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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은 '아우라'의 소멸에 대해 말했다. 기술복제시대에는 예술작품이 갖고 있던 고유한 아우라가 사라진다. 철학의 밀키트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철학자 개인의 삶과 경험이 응축된 고유한 사유가 표준화된 상품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그 사유가 갖고 있던 아우라는 필연적으로 소멸할 수밖에 없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을 때,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 신념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절대적 가치와 진리에 대한 믿음 자체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신을 죽인 그 자리에 다시 철학이라는 새로운 신을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철학은 신이 될 수 없다. 철학은 더 정확한 질문을 할 수 있게 돕는 나침반일 뿐이다.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 그것이 철학의 본래 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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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철학서를 읽는다. 하지만 이제 그것을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대신 그것을 하나의 악기로 사용한다. 스피노자의 현으로 세상을 연주하기도 하고, 아도르노의 건반으로 문화를 해석하기도 한다. 때로는 여러 악기를 합주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침묵 속에서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어떤 악기를 사용하든 그것이 나의 청각을 예민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 예민해진 감각 속에서 나는 나만의 고유한 선율을 발견해간다. 철학자들이 미리 작곡해놓은 곡이 아니라, 내가 직접 채보한 멜로디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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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철학이란 존재의 해상도를 높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을 보는 눈을 갖고 있지만, 그 해상도는 매우 낮다. 삶은 그 해상도를 점차 높여가는 과정이다. 경험과 철학을 통해 세상의 복잡하고 미묘한 부분들이 점점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해상도가 높아진다고 해서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이 보이면서 세상은 더욱 복잡하고 신비로워진다. 철학의 역설이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진다. 이해하면 할수록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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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는 작은 철학을 한다. 커피 한 잔의 온도를 느끼며, 창밖 나무 그림자의 변화를 관찰하며, 잠들기 전 하루의 궤적을 되짚어보며. 이것은 아마도 가장 소박하면서도 가장 근본적인 철학일 것이다. 거대한 체계도, 정교한 논리도 없는, 그저 삶과 함께 호흡하는 사유.
어쩌면 진정한 철학은 밀키트가 아니라 텃밭에서 자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햇볕을 기다리는 긴 시간들. 때로는 가뭄에 시들기도 하고, 때로는 폭우에 뿌리째 뽑히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 손으로 직접 기른 것들이 주는 맛과 향이 있다. 그 맛은 세상에 하나뿐이고, 그 향은 오직 나만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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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밀키트는 여전히 유용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텃밭이 필요하다. 그 텃밭에서 자라는 사유들이야말로 우리를 진정으로 살게 한다.
물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이 불확실성 자체가 철학을 계속하게 하는 동력이며, 그리고 그 동력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더 깊이, 더 섬세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철학자는 답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