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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수상록2 19화

사유의 경계

괴물, 모순

by 조융한삶




어제 또 새벽에 눈을 떴다. 새삼스럽게 비가 내려서. 4시 17분. 이 시간 나는 아무도 아니다. 누군가의 아들도, 연인도, 직장인도 아니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존재한다는 것이 이렇게 서늘한 일인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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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헤니안들에게는 '시프그레소'라는 시간이 있다. 성적 충동이 사라진, 그 어떤 성별에도 속하지 않는 중성의 시간. 르 귄은 이 개념을 통해 질문한다. 우리는 언제 가장 순수한 자기 자신인가?


우리는 더 이상 순수한 시프그레소를 견디지 못한다. 곧장 휴대폰을 집어들고 알림을 확인한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다시 나를 조립한다. 관계 없는 자아는 너무 공허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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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괴물 사냥터다. 완벽하게 큐레이션된 피드 속에서 서로를 재단한다. 저 사람은 어떻게 매일 비싼 걸 먹지,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행복해 보이지,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여행을 다니지.


하지만 고레에다의『괴물』처럼, 진짜 괴물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완벽함을 강요하는 시선들과 그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괴물로 만드는 내면의 목소리만 있을 뿐이다.


가장 행복해 보이는 사진들을 떠올린다. 실제로 그 순간은 행복했겠지. 하지만 그 사진 바로 전과 후의 모습은 어땠을까? 카메라에 담기지 않은 침묵들, 어색함들, 작은 다툼들.


행복은 늘 편집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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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함은 안전하다. 구독을 '취소'하고, '싫어요'를 누르고,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언팔' 한다. 하지만 이 안전함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절망이다. 가능성을 포기한 절망.


엄마와 통화하면 나는 자주 불편하다. 엄마는 항상 확신에 차 있다.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이건 옳지 않아", "저건 틀렸어".


부러우면서도 슬프다.


그 확신이 주는 평안을 나는 더 이상 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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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는 최근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세상의 모든 부조리에 분노했고, 모든 불의에 상처받았으며, 모든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여겼다. 선량한 사람이었다. 너무 선량해서 부서져버린.


적절한 가벼움이 필요하다. 가벼움은 무책임이 아니다. 모든 것을 다 짊어지려다가 망가지면 안된다. 감당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지혜.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나서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회복력. 여기서 오히려 진정한 책임감이 나온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언제 웃고 언제 울지를 아는 것. 존 키이츠의 '부정적 능력'. 불확실함과 의심과 모호함 속에서도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고 머무르는 것. 한 번 더 생각하는 것. 섣부름을 유예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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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프그레소는 단순히 성별이 없는 시간이 아니라, 모든 페르소나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이다. 알고리즘으로부터도, 타인의 시선으로부터도, 과거의 자신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시간.


우리는 사냥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다. 대신 괴물과 함께 춤을 출 수 있다. 존재의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수 있다.


고레에다의 카메라는 여전히 유효하다.


모순 속에서, 경계에서, 웃으면서.






[기억하고 싶은 문장]



1.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이십대란 무언가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시간대다. 사랑이든, 일이든 하나씩은 필히 사로잡힐 수 있어야 인생의 부피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이다.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21p



2.

모든 일이 다 우연이었다.


심심하다는 것은 모든 일에 예외가 없어서 언제라도 예측이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3.

운명이 어떻게 개입하는지 두고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치명적인 결함은 없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돈보다 더 아껴야 할 것은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이었다.



4.

해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5.

홀로 숨어서 이렇게 아름답게 살아도 되는가


앞으로 아주 오랫동안 조용히 이 이름을 부르겠구나



6.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127p


철이 든다는 것은 말하자면 내가 지닌 가능성과 타인이 가진 가능성을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142p



7.

불행의 과장법.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 152p


장난으로 시작했던 일이 장난으로 끝나지 않으면 얼마나 무렴한가. 154p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솔직함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157p


결심은 언제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8.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 173p


세상은 네가 해석하는 것처럼 옳거나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냐. 옳으면서도 나쁘고, 나쁘면서도 옳은 것이 더 많은 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야. 176p


내가 살아보는 삶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어.


삶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9.

나는 결단코 ‘나’를 장악하며 한 생애를 살아야 할 사람이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말이 아니었다. 상처는 상처로 위로해야 가장 효험이 있는 법이었다.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188p


이루어질 일은 다 이루어지며, 이루어지지 않을 일은 어떻게든 이루어지지 않는다. 191p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 이름을 자꾸 불러줘야 해. 이름도 불러주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냐. 193p



11.

모든 인간이 똑같이 살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똑같이 살지 않기 위해 억지로 발버둥 칠 필요도 없는 것이다. 217p



12.

세상의 숨겨진 비밀들을 배울 기회가 전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몹시 불행한 일이다. 222p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다. 229p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랑을 시작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미워하게 된다는, 인간이란 존재의 한없는 모순… 232p


헤어진 다음날, 그 기분이 어떨까? 시간이 내 앞에서 어떻게 흘러갈까? 239p



13.

하나의 거짓말을 수도 없이 되풀이하다 보면 나중에는 어떤 것이 진실인지 모를 때가 있다. 247p


꼼꼼한 인생계획표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것이었다.

좋은밤을 보내려면 확실한 예약 없이는 곤란해요, 라는 그 말, 혹시 내가 놓치고 있는 인생의 진리가 아니었을까… 251p



14.

인생은 짧다. 그러나 삶 속의 온갖 괴로움이 인생을 길게 만든다. 268p



15.

너무 특별한 사랑은 위험한 법이다. 사랑조차도 넘쳐버리면 차라리 모자란 것보다 못한 일이다. 272p



16.

죽는 일보다 사는 일이 훨씬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284p



17.

살아봐야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직 나는 그 모순을 이해할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다. 삶과 죽음은 결국 한통속이다. 속지 말아야 한다. 291p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늘 같은 분량의 행복과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95p


남은 것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결정하는 문제뿐이었다. 296p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296p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296p






[작가노트]



‘진실’은 좀 식혀서 마셔야 하는 뜨거운 국물과 같다.


나는 톡톡히 값을 치렀다.


거저 얻은 것에는 애착이 덜한 법이다.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정신과 육체, 풍요와 빈곤.


그 편린들은 내 마음의 무늬일 터였다.


하나의 개념어에 필연적으로 잇따르는 반대어, 거기엔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었다.


우리들 모두, 인간이란 이름의 일란성 쌍생아들이 아니었던가.


한 번만 뒤집으면, 얼마든지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일 수 있는 우리.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넙히기 위해서는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있다. 303p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모순투성이였다. 이론상의 진실과 마음속 진실은 언제나 한 방향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일들이란 모순으로 짜여있으며 그 모순을 이해할 때 조금 더 삶의 본질 가까이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306p






[한줄평]



Everyone is evil

Everyone is good

Everywhere is hell

Everywhere is heaven

Everything is painful

Everything is beautiful

Everything is meaningless

Everything is meaning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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