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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수상록2 21화

여행의 역설

여행의 이유

by 조융한삶




여행은 늘 우리를 배반한다. 실제 경험과 미화된 기억 사이의 잔혹한 간극. 완벽한 계획표와 현실 사이에서 벌어지는 예상치 못한 균열들.


고대 프랑스 'travail' 이란 단어에는 노동, 수고, 고통, 험난함이란 뜻이 담겨있다. 우리가 여행을 낭만으로 포장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SNS에 올릴 완벽한 한 컷을 위해 수십 장을 찍고, 고생스러웠던 순간들은 편집으로 지워버리는 시대. 여행은 고역이 아니라 성취가 되어야 하고, 과정이 아니라 결과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시대.


현대의 여행 산업은 완벽한 무마찰 시스템을 구축했다. 호텔의 일정한 온도, 뷔페의 예측 가능한 메뉴, 가이드의 정해진 루트. 모든 저항이 제거된 매끄러운 표면 위에서 우리는 미끄러져 간다. 마치 얼음판 위의 컬링 스톤처럼, 아무런 마찰 없이 목표 지점으로 향한다. 하지만 마찰이 없으면 제대로 멈출 수도, 방향을 바꿀 수도 없다.


이런 여행에서 우리는 관광객이 될 뿐이다. 풍경을 바라보는 존재, 경험을 소비하는 존재. 마치 거대한 테마파크를 관람하듯 세상을 바라본다. 진짜 삶은 유리창 너머로 밀려나고, 우리는 안전한 관람석에 앉아 박수만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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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점점 다른 종류의 여행을 갈망하게 된다. 무엇을 먹고 어디서 자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여행.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여행. 소비가 아니라 창조를 위한 여행.


현대인은 일종의 무중력 상태에서 살아간다. 모든 마찰이 제거되고, 모든 저항이 사라진 세상. 매끄럽고 부드러운 표면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정작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 수 없다. 마치 국제우주정거장의 우주비행사처럼, 모든 것이 자유롭게 부유하지만 방향감각을 잃은 채로.


물리학에서 마찰력은 운동을 방해하는 힘이지만, 동시에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마찰이 없다면 자동차 바퀴는 헛돌기만 할 뿐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가 걸을 수 있는 것도 신발과 땅 사이의 마찰 덕분이다. 저항 없는 세상에서는 진짜 운동도, 진짜 경험도 일어나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저항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편안함 속에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모든 것이 원활하게 돌아갈 때 우리는 존재의 감각을 잃는다. 압력이 있어야 다이아몬드가 만들어지고, 중력이 있어야 근육이 발달한다. 인간 존재도 마찬가지다.


진짜 여행은 자신의 한계와 만나는 일이다. 몸의 한계, 의지의 한계, 인내의 한계. 그 한계 지점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발견한다. 한계는 제약이 아니라 정의다. 강철의 강도는 견딜 수 있는 압력으로 측정되듯, 인간의 실체도 견딜 수 있는 한계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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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무한한 선택권을 제공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큐레이션된 옵션들만 남겨둔다. 알고리즘이 우리의 취향을 학습하고, 빅데이터가 우리의 행동을 예측한다. 우리는 자유롭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자기장 안에서 철가루처럼 정해진 패턴을 그릴 뿐이다. 진정한 자유는 그 자기장을 벗어나는 것, 예측 불가능한 경로를 선택하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목적이 있는 여행은 이 모든 예측 가능성에 저항한다. 시간의 질감을 바꾼다. 편안한 휴가의 시간은 기체처럼 빠르게 확산되어 사라지지만, 도전적인 여행의 시간은 고체처럼 단단하게 결정화된다. 강도 높은 경험은 시간을 압축하고 확장시킨다.


나는 돌아와서 "힘들었지만 좋았다"고 말하게 되는 여행을 선호한다. 이 문장 속에는 변화의 흔적이 있다. 출발 전의 나와 돌아온 후의 나 사이에 일어난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변화. "편안하고 좋았다"는 여행에는 소비의 기록만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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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자전거 여행이 그러하다. 차가운 공기가 폐포 하나하나를 깨우고, 페달을 밟는 대퇴사두근이 점화되는 순간. 처음 20킬로미터는 몸과 의지 사이의 마찰이다. 근육은 저항하고, 의식은 압력을 가한다.


하지만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공명이 일어난다. 호흡과 페달링이 하나의 주파수를 만들고, 심장박동과 바퀴의 회전이 같은 진동을 그린다. 나와 기계가 하나의 진동계가 되는 순간. 이때 나는 더 이상 관광객이 아니다. 풍경의 일부가 되고, 길의 연장이 되고, 바람과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


100킬로미터를 달린 후 먹는 식사는 분자 수준에서 몸이 요구하는 것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현대인이 잃어버린 원초적 만족감이 되살아난다. 우리는 배고픔을 잊고 살아간다. 진짜 배고픔을, 진짜 갈증을, 진짜 피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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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주짓수 시합 대회장에 들어서는 순간은 또 다른 주파수의 경험이다. 거대한 체육관에 깔린 수십 개의 매트가 만들어내는 기하학적 질서. 각국에서 온 수천 명의 선수들이 발산하는 집단적 에너지장. 서로 다른 언어가 뒤섞인 파동 속에서도 하나의 공통 진동이 흐른다.


이 공간에서 나는 문명이 덧씌운 모든 외피를 벗어던진다. 사회적 지위도, 경제적 능력도, 학력도 무의미하다. 오직 훈련된 몸과 단련된 의지만이 존재한다. 매트 위에 서면 세상의 모든 소음이 진공처럼 사라진다. 상대방과 나, 그리고 흘러가는 시간만 남는다.


경기를 기다리는 몇 분 동안 아드레날린이 혈관을 타고 흐른다. 수개월간의 준비가 단 몇 분으로 압축되는 순간. 이름이 호명되고 매트 중앙에 서면, 모든 것이 극도로 선명해진다. 상대의 호흡 주기, 자신의 맥박수, 공기의 밀도까지. 승부의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이 순간에 드러나는 진짜 자신이다.


포기하고 싶을 때 한 번 더 시도하는 의지, 극한의 순간에 발휘되는 창의성, 패배를 받아들이는 겸손함. 이런 것들은 일상의 안전한 온도에서는 결코 결정화될 수 없는 자신의 면면들이다. 마치 고압과 고온에서만 형성되는 희귀 광물처럼, 극한 상황에서만 드러나는 인간의 본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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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가 여행에서 찾는 것은 자신이다. 일상의 익숙한 역할들을 벗어던지고, 가장 날것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 그 만남은 언제나 불편하고 당황스럽다. 하지만 바로 그 마찰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한다.


이 발견은 단순한 자기계발이나 성취감과는 다르다. 더 근본적인 존재론적 공명이다. 내가 무엇을 견딜 수 있는지,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 무엇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걸 수 있는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무마찰 환경에서는 절대 찾을 수 없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약속하지만, 실제로는 안전하게 관리된 궤도만 제공한다. 진짜 선택은 그 궤도를 벗어나는 것, 중력에 저항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여행은 그 저항을 실천하는 가장 구체적인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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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평형 상태를 거부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완벽한 안전, 완벽한 편안함 속에서는 에너지가 정체된다. 우리는 불균형이라는 조건 속에서만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존재다.



"여행자의 일상은 아주 잠깐씩 반짝이고 대체로 고단하다. 수시로 결정을 내려야 하고, 크고 작은 불편을 감수하는 일은 힘에 부칠 때가 많다. 낯선 도시에 도착해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숙소를 찾아 헤맬 때마다 편한 집 놔두고 이게 뭔 고생인가 싶고, 갓 구운 빵도 한두 번이지 국밥에 깍두기를 얹어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러다가도 이런 행복, 여행자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우연한 행복 앞에선 무장해제가 되어버린다. 삶이라는 것은 용기를 내어 여정을 떠나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이고, 저울추처럼 행복과 불행 사이를 오가는 일이라는 사실을 긍정하게 된다." 「안희연, 줍는 순간」



여행자는 결국 자신을 찾아 떠나는 존재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완성된 자아인가, 아니면 끝없이 변화하는 과정 자체인가. 진짜 여행의 목적지는 어쩌면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떠나기 전의 나와 돌아온 후의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그 미묘한 진동, 그것이 우리가 찾는 모든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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