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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수상록2 14화


英雄論

『스토너』와『진격의 거인』으로 살펴보는 영웅에 대한 탐구

by 조융한삶





영웅이란 무엇인가



영웅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진실에 충실하며 일상의 무게를 묵묵히 감당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세계의 질서를 뒤흔들고 변화시키는 거대한 행위자인가?


존 윌리엄스의『스토너』와 이사야마 하지메의『진격의 거인』, 하나는 20세기 초 미국 대학 교수의 고요한 삶을 정밀하게 다룬 인생소설이고, 다른 하나는 거대한 벽과 괴물들이 지배하는 세계의 파국을 격렬하게 그린 디스토피아 판타지다. 두 텍스트는 매체적 간극, 형식적 대립, 목표 청중의 차이를 비롯해, 표면적으로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서로를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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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척점에 놓인 두 작품 사이 이음매는 의외로 견고하다.


표면의 이질성을 뚫고 들어가면, 두 작품은 모두 '인간이 세계 속에서 자기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다. 그것은 '실존'이라는 근원적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혹은 그 수수께끼의 정체를 정직하게 확인하는 영웅적 여정의 기록이다.


이 글에서 나는 두 작품을 병치해, 두 인물이 겪는 '자아 → 세계 → 자아와 세계의 관계'라는 실존적 궤적을 헤겔의 변증법적 구조인 '정(正, thesis)→반(反, antithesis)→합(合, synthesis)'의 렌즈를 통해 읽어내려 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제시한 '낙타-사자-아이'의 변형 단계와, 영웅의 윤리적 위계에 관한 새로운 틀을 통합하여, 두 작품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형상화하는 '영웅적 실존'의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다.






정(正) – 자아 : 고요하거나, 불타오르거나



영웅의 출발점은 무엇인가? 자아의 각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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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가 대학에서 처음 문학을 만났을 때, 단지 새로운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자기 내면 풍경을 처음으로 마주한다. 아처 슬론 교수의 셰익스피어 수업에서 "73번 소네트"를 접했을 때 장면은 한 영웅적 자아가 깨어나는 순간의 정밀한 해부도다.


"책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는 자신이 홀로 강의실에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입은 말랐고 눈은 충혈되었다. 그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도 알지 못했던 어떤 것을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윌리엄스, 2014, p.19)


이 장면에서 우리는 이해와 불가해 사이의 모순적 긴장, 그 곁에서 태어나는 새로운 주체성의 탄생을 목격한다. 농장의 무심한 흙먼지 속에서 자라온 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무게를 비로소 감지한다. 스토너의 영웅적 자아는 불꽃처럼 화르륵 타오르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미지근한 물처럼 고요히, 그러나 또박또박 바위를 뚫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 내면에는 소박한 진실을 향한 끈질긴, 아니 집요한 욕망이 흐른다.


진리란 객관적 명제 체계가 아니라, 주체가 살아내는 존재 방식이다. 이 지점에서 스토너의 삶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주체성은 진리다(Subjectivity is truth)'라는 명제와 공명한다. 스토너에게 중요한 것은 눈부신 외적 성공이나 얄팍한 인정 욕구가 아니다. 내면이 속삭이는 진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살과 피로 살아내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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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렌은 이와 정반대 방향에서 출발한다. 갑작스런 거인의 습격으로 그는 어머니를 잃고, 자아는 외부 세계에 의해 철저하게 깨진다. 이런 외상은 존재론적 기반 자체를 뒤흔든다. 첫 번째 거대한 정신적 분기점이 되는 대목에서 에렌은 이렇게 고백한다.


"그때부터다... 그 날 이후로... 내 안에서 뭔가가 이상하게 되었어. 내가 미친 건지도 모르겠어. 그저 이 세상의 거인을... 하나 남김없이 내 손으로 쓰러뜨리고 싶어서..." (이사야마, 진격의 거인 2권, p.28)


『진격의 거인』의 더 후반부에서 에렌의 내적 독백은 심화된다.


"세계는 잔혹하다... 하지만 아름답다." (진격의 거인 13권, p.42)


이러한 구절은 에렌의 핵심적이고 실존적 문제, '자유에 대한 갈망과 그것을 제한하는 세계에 대한 증오'를 보여준다. 상처에서 "이 벽 너머로 나아가야 한다"는 영웅적 열망이 솟아오른다. 에렌의 자아는 고요하지 않다. 그는 자신의 세계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묻고, 그것을 바꾸기 위한 힘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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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첫 단계에서 두 인물은 니체가 말한 '정신의 세 변형' 중 첫 번째 단계인 '낙타'의 모습을 보인다. 니체에게 낙타란 짊어지는 존재로, 문화와 전통, 세계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지며 견디는 단계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 주어진 상황과 의무를 성실히 감당하는 단계다.


스토너는 학문의 무게를, 에렌은 가족의 죽음과 벽으로 둘러싸인 세계의 무게를 짊어진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선한' 존재다. 그들은 세계의 무게를 견디며 자신의 본질적 소명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그 성격과 에너지의 결은 다르지만, 두 인물 모두 공통적으로 자기 내부의 목소리에 충실한 영웅적 자질을 보인다. 자기 세계 중심에서 출발해, 그 세계와 갈등을 피하지 않으려는 내면의 진정성. 이것이 이들 '정(正)'의 영웅적 차원이다.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이들은 모두 '현존재(Dasein)'로서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향해 '기투(projection)'하는 영웅적 존재들이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강조했듯, 현존재는 항상 이미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로서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향해 나아간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란 쉽게 말해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인간을 가리킨다. 인간은 단순히 세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관계 맺으며 자신의 존재 의미를 묻고 프로젝트로서 자신의 삶을 구성해나간다.






반(反) – 세계 : 질서라는 이름의 타자



영웅은 결코 진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세계와의 충돌을 통해 그 존재 의미를 획득한다. 세계는 자아를 형성하고, 제약하고, 때로는 억압한다. 여기서 두 인물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와 충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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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는 자신의 진실을 지키기 위해 부조리한 세계와 마주한다. 대학의 정치적 역학 속에서 그는 홀든 교수와 치열한 대립을 경험한다. 이 갈등은 단순한 개인적 반목을 넘어선다.


"스토너는 천천히 일어섰다. '나는,' 그가 말했다, '대학이 무엇이며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 나름의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대학에서 하고 있는 일은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모독입니다. 당신이 이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윌리엄스, 2014, p.224)


투쟁은 계속된다. 학생 워커에 대한 평가 문제로 홀든과 대립할 때에도, 그는 타협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정한 평가였습니다," 스토너가 말했다. "내가 부당하게 그를 대했다고 여기신다면, 공식적인 항의를 제기하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내 판단을 존중해 주셨으면 합니다." (윌리엄스, 2014, p.220)


아내 이디스와의 관계 역시 스토너에게는 세계와의 투쟁을 의미한다. 이디스는 그의 학문적 열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의 딸 그레이스를 무기로 삼아 스토너를 심리적으로 고립시킨다. 결국 그에게 세계는 끊임없이 자기를 침범하고, 자아를 고립시켜 시험에 들게 하는 적대적인 무대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는 카뮈가 말한 '부조리한 영웅'처럼, 세계의 부조리함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다.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강조했듯, 부조리의 인식은 절망이 아닌 투쟁의 시작점이 된다. 부조리란 쉽게 말해 '인간이 세계에 의미를 요구하는데, 세계는 그에 답하지 않는 상황'을 의미한다. 스토너 역시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창출하고자 하는 부조리의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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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렌에게 세계는 말 그대로 물리적 억압 그 자체이다. 인류를 보호하는 줄로만 여겨졌던 거대한 벽은, 사실 인류를 가두는 감옥이었음이 밝혀진다. 『진격의 거인』에서 에렌은 역사의 진실을 깨닫는다. 이 장면은 영웅적 자각의 가장 충격적인 정신적 전환점이 된다.


"우리가 벽 안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이 섬 안에 숨겨진 거야... 벽의 왕은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했다..." (진격의 거인 22권, p.36)


그리고 더 근본적인 진실을 직면한다.


"마레, 엘디아... 태어난 곳이 달라도 모두 같아... 벽 안이든 밖이든 사람은 사람일 뿐이야." (진격의 거인 23권, p.25)


에렌에게는 또 하나의 결정적 실존적 깨달음이 있다. 그가 바다에 도달했을 때의 실망감,


"이 바다 너머에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다 건너에도 적이 있다. 우리가 저들을 모두 죽이면, 그때서야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는 건가?" (진격의 거인 22권, p.90)


이 순간 에렌은 외부 세계가 해방의 공간이 아니라 또 다른 감옥임을 깨닫는다. 자유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조건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외부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짓말, 기억을 조작하는 왕가의 능력, 엘디아인과 마레인 사이의 역사적 억압의 고리. 에렌은 점차 자신이 살던 세계가 철저한 거짓과 억압, 증오의 연쇄 위에 세워졌음을 깨닫는다. 에렌이 "진격의 거인" 힘을 얻고 진실을 알게 되면서, 그는 더 이상 단순한 복수가 아닌 세계 전체의 구조적 모순과 대면하게 된다. 그는 세계 전체를 향한 폭력과 파괴적 연대를 선택한다. 이윽고 그는 결정적인 선언을 한다.


"나는 적을 쓰러뜨릴 때까지... 계속 전진할 것이다." (진격의 거인 27권,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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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계에서 두 인물은 니체의 두 번째 변형 단계인 '사자'의 모습을 띤다. 니체에게 사자란 반항하는 존재로, 기존 가치와 세계의 압력에 맞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단계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 기존의 권위와 전통에 저항하고 자신만의 가치를 주장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가진 단계다.


스토너는 대학의 부패한 정치와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에렌은 벽 안에 갇힌 세계와 역사의 악순환에 도전한다. 이들은 이제 단순히 '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선한 자'가 아니라, '악할 수 있기 때문에 악한 자'의 단계로 나아간다. 특히 에렌의 경우 자신의 파괴적 힘을 통해 세계의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두 인물은 모두 세계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영웅적 대결 구도를 보여준다. 스토너는 소극적 저항을 통해, 에렌은 적극적 폭력을 통해 자기 존재를 지키려 한다. 이 '반(反)'의 국면에서, 세계는 자아를 잠식하거나 변화시키려는 압력의 장이 된다. 그리고 이 긴장의 총합이 결국 '자아와 세계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게 된다.


이 장면에서 사르트르의 '타자는 지옥이다(L'enfer, c'est les autres)'라는 명제가 정확히 적용된다. 사르트르에게 있어 이 말은 타인의 시선이 나를 객체화하고 자유를 제한한다는 의미다. 세계와 타자는 자아의 자유를 제약하지만, 동시에 그 자유가 실현되는 곳이기도 하다. 사르트르의『존재와 무』에서 강조되듯, '타자의 시선은 나를 대상화하지만, 바로 그 시선을 통해 내가 자유로운 주체임을' 인식하게 된다.






합(合) – 자아와 세계의 관계 : 아우프헤벤



스토너와 에렌은 세계와의 갈등을 통해 각자 다른 '합(合)'의 상태에 도달한다. 그들의 최종적인 선택과 결말은 영웅적 윤리의 서로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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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는 세속적으로 보자면 '실패한 영웅'의 삶을 산다. 그는 학계에서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가족에게도 외면받으며, 끝내 병들어 죽는다. 그러나 소설 마지막 장면은 그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 손에 들린 책이 다시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그는 책을 집으려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눈을 돌려 바라보았다. 한순간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것이 세상에 남아 있으며, 여전히 변함없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윌리엄스, 2014, p.367)


소설 말미에서 스토너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장면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그는 자신의 삶이 실패였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는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 외에 더 바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리고 언제나 한 가지 선택만 있었고, 그것이 전부였다." (윌리엄스, 2014, p.364)


스토너는 삶 전체를 통과하며 자기 진실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영웅적 존재'의 본질임을 보여준다. 그는 세계와 타협하지 않았고,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작고 고요하지만 가장 강인한 저항이었다. 카뮈의 관점에서 보면, 스토너는 세계의 부조리를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창조한 영웅이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책을 바라보는 장면은 시지프스가 바위를 밀어 올리며 느끼는 조용한 승리와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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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렌은 더 복잡하고 파괴적인 영웅적 궤적을 그린다.


『진격의 거인』 클라이맥스인 "땅울림(The Rumbling)"에서 에렌은 추악한 폭력의 화신이 된다. 그는 냉정하게 선언한다.


"자유를 얻기 위해... 나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진격의 거인 30권, p.68)


그러나 마지막에서 밝혀지듯, 에렌의 행동은 단순한 파괴가 아닌 복잡한 윤리적 계산의 결과였다.


"너희가... 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랐어..." (진격의 거인 34권, p.175)


에렌은 자신이 인류 공공의 적이 됨으로써 남은 인류를 하나로 결집시키고, 거인의 힘을 영원히 세상에서 제거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는 아르민에게 고백한다.


"나는... 그저 앞으로 나아갔을 뿐이다." (진격의 거인 34권, p.170)


에렌의 극단적 선택, 즉 "땅울림(Rumbling)"을 통한 대량 학살은 단순한 복수나 분노의 표출이 아니다. 그것은 사르트르가 말한 '극단적 상황(extreme situation)'에서의 실존적 선택이다. 그는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악마가 되는 길을 택했다. 이는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신앙의 도약(leap of faith)'과 유사한 실존적 결단으로, 합리성을 넘어선 영역에서의 선택이다.


"나는... 그저 앞으로 나아갔을 뿐이다." (진격의 거인 34권, p.170)


이 단순한 문장에는 에렌의 실존적 윤리가 함축되어 있다. 그는 모든 가능한 미래를 보았으면서도, 결국 자신의 의지로 하나의 길을 선택한다. 이것은 운명에 대한 수동적 수용이 아니라, 적극적인 실존적 선택이다. 그는 자신의 자유를 완전히 행사하여 세계를 변화시키는 동시에, 그 선택의 모든 무게와 책임을 감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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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지막 단계에서 두 인물은 니체의 세 번째 변형 단계인 '아이'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니체에게 아이란 창조하는 존재로,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생성할 수 있는 단계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 허물어진 가치의 폐허 위에 자신만의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단계다.


스토너와 에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 단계에 도달한다. 스토너는 일상 속 진리에 충실한 삶을 통해, 에렌은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희생을 통해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영웅의 윤리적 위계에 관한 중요한 통찰을 얻게 된다. 가장 약한 단계의 영웅은 '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선한 자'로, 선택의 여지없이 도덕적 규범을 따르는 사람이다. 그 다음 단계는 '악할 수 있기 때문에 악한 자'로, 부정의 힘으로 세계와 직접 대결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가장 높은 단계의 영웅은 '악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선을 택하는 자'이다. 이는 온전한 자유와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의식적으로 윤리적 선택을 하는 경우로, 진정한 의미의 도덕적 힘을 보여준다.


스토너는 학문적 타협이라는 '악'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끝까지 진리에 충실한 삶을 택했다. 에렌의 경우는 더 복잡하다. 그는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고 표면적으로는 악의 길을 택했지만, 그 이면에는 더 큰 선을 위한 의식적인 자기희생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악인이 됨으로써 세계를 구원하려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악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선을 택하는' 영웅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분명히 비극적이고, 도덕적으로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 선택은 철저하게 "모두가 자유로워지기 위한 것"이었다. 니체의 관점에서 보면, 에렌은 '선과 악의 저편에' 선 영웅적 초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적이 되어 세계를 바꾼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설명했듯이, 진정한 초인은 기존의 도덕적 판단을 넘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다.






현대 사회 생존법



디지털 기술과 알고리즘이 촘촘히 엮인 현대 사회에서는 이 영웅적 실존의 문제가 더욱 긴급하다.


초연결성은 역설적으로 심리적 고립을 심화시키고, 정교하게 설계된 알고리즘은 우리의 선택을 은밀하게 조종한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네트워크 속에서 주체는 분산되고 파편화된다. 자본의 효율성으로 재편된 디지털 주체는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어야 할 '프로젝트 자아'로 전락한다. SNS는 계속해서 연출된 일상을 부추긴다. 행복은 편집되고 끊임없이 전시된다. 자본주의 속 선택의 자유는 고작 쇼핑과 소비 행위로 환원된다. 심지어 이마저도 시장 논리와 문화 산업에 의해 기만적으로 제한된다. 이처럼 현대인의 실질적 자율성은 점점 축소된다. 우리는 자유롭다고 느끼지만, 선택지들은 이미 구조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알게 모르게 존재는 자꾸만 소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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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 정보 과잉 시대에 '진정한 자아'와 '진실된 관계'에 대한 갈망은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찰스 테일러가 『불안한 현대사회』에서 지적했듯이, 현대인에게 '진정성(authenticity)'의 추구는 중요한 윤리적 이상이 되었다. 스토너와 에렌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진정성을 지키기 위해 투쟁한다. 그들의 여정은 '진정한 자아'와 '진실된 관계'를 향한 현대인의 갈망을 반영한다.


『스토너』와 『진격의 거인』이 현대 독자들에게 강렬한 반향을 일으킨 이유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두 텍스트가 현대인의 실존적 딜레마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인물이 보여주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진행은 현대인의 실존적 고민을 투영한다. 자아가 세계와 충돌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관계성을 모색해 나가는 과정은 결국 우리 모두의 삶의 이야기다.






그리하여, 영웅이란 무엇인가?



리케르(Paul Ricoeur)가 『시간과 이야기』에서 강조했듯,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스토너와 에렌의 이야기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영웅적 서사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어쩌면 진정한 영웅은 거대한 세계를 바꾸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작은 세계를 정직하게 살아가는 자일지도 모른다. 또는 그 반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 세계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자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을 스스로 내리고, 그 결과를 온전히 감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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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영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삶의 진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 혹은 자기 삶을 희생해 세계의 변화를 이끄는 자. 어느 쪽이든, 자신의 삶에 책임지고 의미를 부여하는 자, 바로 그것이 영웅이다.


우리는 모두 스토너이면서 동시에 에렌이다. 세계 속에서 자기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바로 그 '불가능성을 향한 가능성'이 영웅적 실존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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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도,

계속해서, 나아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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