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eongseop Jan 05. 2021

카페에 관하여(2)

제 3의 공간

자주 가던 단골 카페가 문을 닫았다. 아무런 안내 없이 며칠간 굳게 닫혀있던 문 위에 마침내 그동안 고마웠다는 인사말이 적힌 종이가 붙었다. '서울 변두리 영세업 치고는 작지 않은 규모다' 처음 방문했을 때도,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도 같은 말을 되뇌었다. 카페는 두 개의 층으로 완전히 구분되어 있다. 매대와 제조공간 있는 1층으로 들어와 음료를 주문하고 콩알만 한 자갈밭 형상의 우레탄 바닥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소음 없이 완전히 독립된 손님들만의 공간이다. 얇게 켜낸 목재 블라인드가 넓은 통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회색 빛 배경을 촘촘히 잘라 외부와 내부를 완전히 분리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얇은 종이 막을 붙인 조명과 군데군데 매립된 은은한 조명은 "전기의 가혹함이 종이의 마법을 통해 우리의 기원인 태양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이사무 노구치의 말을 단숨에 상기시켜주고는 했다.(이 곳의 조명이 실제 그가 디자인 한 '아카리(Akari) 라이트'인지는 확인해보지 않았다). 탁자와 의자는 일찍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있었다. 심심하리만큼 단순하지만 무척 편안했던 디자이너 가구들은 자주 찾고 오래 머물수록 진가를 발휘했다. 


일단 주문한 커피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와 자리 잡고 나면 방해받을 일은 전혀 없다. 드문드문 각자 일로 바쁜 사람들이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고 넓은 공간이 적막으로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사적이지도 공적이지도 않은 약한 연결 속에서 서로가 구경꾼이 되어 알게 모르게 의지하며 스쳐 지나갔다. 아마도 이것이 살아 숨 쉬는 나무 한 그루 없이도 상업지구 한복판이 공원처럼 느껴지게 되는 원리일 것이다. 지인이 찾아올 때면 이곳을 내 집처럼 소개했고 그 지인이 이곳의 단골이 되어 다시 자신의 손님을 초대하길 여러 번 반복했다. 그렇게 제법 눈에 익은 손님이 많아지는 걸 보면서 잘 되겠구나 했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다. 아무래도 본래 카페 업이란 게 한 명에게 100잔의 커피를 파는 것보다 100명에게 한 잔의 커피를 파는 게 중요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닫힌 문 너머로 보이는 각종 스테인리스 장비로 막 설비를 마친 베이커리실이 유난히 쌀쌀하다.



24일 0시, '거리 두기'는 다시 2단계가 되었다. 정부가 매장 이용이 금지돼야 할 '카페'를 정의하는 통일된 기준을 마련하지 못한 탓에 잠시 소란스러운 듯하다. 정 많고 이해심 많은 성정의 한국 사람들은 아쉽고 답답함을 속으로 삭일 따름이다. 큰 목소리 낼 수 없는 작디작은 개인 사업장의 신문고는 더 이상 울리지 않는다. 가까이 자영업자가 없다면 코로나 '3차 대유행' 조짐이 그들에게 내린 존폐 여부와 생사 여부에 대한 선고를 깊이 공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번에 특별히 '지목된' 카페는 어떤 이유 때문인지 볼멘소리와 앓는 소리가 산업 밖 일상에서, 관계자 아닌 주변에서까지 터져 나온다.  


'커피와 디저트가 주메뉴인 경우는 카페로 분류한다'는 것이 정부의 기본 입장이다. 커피와 디저트는 생필품이 아닌 기호 상품의 영역으로 구분되고, 이 시국에 그것을 소비하고 향유하는 시간은 사치스럽다는 결론이다. 중대본의 이 같은 조치에 비난 섞인 여론은 단순히 팬더믹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거나, 코로나 취약 계층에 대한 공감 결여 때문은 아니다. 매장 이용이 가능한 샌드위치 가게나, 브런치 카페에 대한 느슨한 규제, 그리고 30만 원을 호가하는 코스 요릿집은 특별한 제재 없이 운영되니, 끼니를 다르게 세는 사람들이 가타부타하며 저마다의 기준으로 다투는 중이다. 


카페를 정의하는 일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카페(Café)라고 부르는 용어는 원래 프랑스에서 커피를 뜻하는 말로, '커피를 마시는 장소'의 의미가 맞지만, 유럽의 카페는 정치, 산업, 문화를 교류시키는 사교의 장이었을 뿐 아니라 예술, 철학, 사상의 담론을 생산하는 매우 가치 있는 공간으로 개념이 빠르게 확장됐다. 1800년대 후반 한국에서 호텔 산업과 나란히 소개된 커피 문화는 1900년대 초반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빠르게 확산되었고, 당시 대중에게 커피를 팔던 다방(茶房)은 청소년들의 문화 공간으로서, 1930년에 이미 여러 다방을 전전하는 '다점 순례'는 이들의 새로운 취미생활이 되었다. 50-60년대 사회 경제적 암흑기를 지나 70년대에 등장한 믹스커피는 카페인에 대한 한국인의 열정을 재차 확인시켜주었다. 이후, 꾸준히 다방 수가 증가하여 1978년에 이미 그 수가 1만 개가 넘었다. 1997년 신촌 스타벅스 1호점을 기점으로 보다 전문화된 카페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며 소위 커피 전문점 춘추전국시대로 진입했다. 개인 카페 창업이 보편화된 오늘날 원두커피 시장이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룬 것이 맞지만, 꼭 '더 나은 커피 맛'에 대한 수요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현대사회에서 카페의 '존재의 이유(Raison d'être)'는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Ray Oldenburg)가 그의 저서『The Great Good Place』의 '제3의 공간'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다. 제1의 공간은 집이고, 제2의 공간은 일터인데, 제3의 공간은 앞 선 두 곳에 해당하지 않으면서도 휴식과 충전을 보장하고 친교와 토론을 통해 구성원에게 행복을 선사하는 곳으로, 사회적 자본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장소로 해석된다. 저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전역에서 무분별하게 행해진 '교외 주택단지 건설 프로젝트'로 인해 마을의 '공공장소'가 사라지고 '미국식 개인주의'가 더욱 짙어감에 따라, 타인과의 교류가 점점 없어지는 위기를 지적하면서 이러한 '비공식적 공공장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개념이 훗날 스타벅스의 하워드 슐츠(Howard Schultz)와 심리학자 크리스티안 미쿤다(Christian Mikunda)에 의해 상업 공간을 대중에게 확산시키는 마케팅 수단으로 적용되었다. 영국의 펍이나 프랑스의 비스트로 같은 공간이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기도 하지만 범세계적으로 카페가 그 역할을 도맡는 추세다. 한국에선 인터넷 포털 사이트들의 대표적인 '커뮤니티 서비스' 이름에 '카페'를 차용하고 있을 정도로 카페는 이제 그 본래의 의미를 넘어선 일상어가 되었다.


카페가 제3의 공간의 대명사가 되기까지는 이용자의 목적에 따라 공간의 의미를 달리하는 카페만의 매력이 크게 작용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는 카페는 여전히 세대와 계층을 아우르는 최고의 사교의 장이며, 앞서 말한 대로 콘크리트 빼곡한 도회지에서 카페는 공원이 되고, 양질의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카페는 도서관 같은 공공재가 된다. 가벼운 미팅과 회의가 이루어지는 업무공간이자 프리랜서들이 출퇴근하는 직장으로, 나아가 카페를 '겸'하는 여러 종류의 비즈니스 공간과 함께 공존하면서 제2의 기능인 일터의 역할도 수행하더니, 1인 가구와 밀레니얼 세대들의 새로운 공유 주거 방식에서는 거실이자 응접실로 사용되면서 제1의 기능인 집의 역할까지 자처한다. 이제는 카페가 활용될 수 없는 역할이 무엇인지 되물어야 할 참이다. 이 때문에 정부로부터 카페 이용이 강제되었을 때 꼭 집 안에 바리케이드가 쳐진 것처럼 답답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정부의 주메뉴 만으로 그 공간의 성격을 규정하려는 방식에 찬동하기가 어렵다.


레스토랑과 카페를 구분하는 방식은『Table comes first』의 저자 애덤 고프닉의 말이 차라리 명료하다. "레스토랑의 주인은 요리사다. 반면 카페는 손님이 주인이고, 커피 한 잔 값이면 즐거움을 빌릴 수 있다" 우리가 누리는 현대적인 레스토랑과 카페는 프랑스혁명이 주도한 결과물과도 같다. 특권에 의해 규정되고 판매되던 식품과 귀족들이 독점적으로 누리던 이익이 보편화되고, 여러 종류의 음식과 와인, 커피가 한 장소에서 소비될 수 있게 변화하면서 현대적인 식사의 개념도 생겨났다. 제과점과 제빵점, 유흥업소와 같은 전문점을 제외하고 통상 식사하는 업소를 카페(Café), 브라세리(Brasserie), 비스트로(Bistro), 레스토랑(Restaurant) 네 가지로 구분한다. 간단한 단품요리 위주로 메뉴를 구성한 카페와 브라세리는 곁들이는 음료가 커피냐 주류냐 정도의 뉘앙스 차이가 있지만, 사람들은 브라세리에서 에스프레소를 찾기도 하고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기도 한다. 비스트로와 레스토랑은 좀 더 정갈한 음식과 정성스러운 (혹은 의도된 가벼운)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비스트로가 대개 고만한 정도의 가격대와 분위기가 있는 반면, 레스토랑의 정찬은 접대의 의미를 내포하며 가격차이가 많게는 10배 이상 나기도 한다. 


19세기 이후 주말이 되면 노동자들은 자신의 허름하고 비좁은 집에 남거나 교회에 가는 대신 카페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카페가 노동 계급이 향유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근대적 여가였던 것이다. 당시 사회에는 노동자들의 적은 수입을 카페에 모두 낭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시선도 존재했다. 그러나 이는 그들에게 사치이기보단 부르주아들의 '행복한 집'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었다. 주인과 이웃 주민, 단골손님들이 새롭게 형성한 노동자 계급 문화로서의 카페는 중심에서 벗어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피난처가 되어 수많은 작품을 탄생시키고 후일 모든 대중에게 사랑받는 일상이 되었다. 오늘날 젠트리피케이션의 주 요인중 하나로 지목되는 카페는 여전히 과거의 DNA가 남아있다.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Jules Michelet)는 커피의 등장을 '새로운 관습을 창조하고 더 나아가 인간의 기질을 바꾼 위대한 사건'으로 묘사하고 '혁명'이라 말했다. 아마도 카페의 토론 문화가 꽃피운 프랑스혁명을 염두하고 한 이야기 일 것이다. 커피를 단순히 기호식품으로 분류하거나 카페 문화를 때에 따라 사치 행위로 단순히 구분하지 않고 특정 국가나 시대를 넘어선 하나의 거대한 문화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무서운 기세로 들이닥친 2차 웨이브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다시 락다운(lockdown)에 돌입한 유럽 사회는 지금, 문화생활과 외식 활동을 지키기 위한 시민들의 저항이 거세다(12월 8일 기준 확진자는 688명으로 급증하면서 다시 대유행이 예고됐다). 생필품 이외에 품목을 파는 상점의 운영을 제안하면서 '필수품'에 대한 정의를 놓고 많은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프랑스의 필수품 품목에는 '술'도 포함되어 있다). 독서가 인체의 필수 영양소라고 생각하는 프랑스 서점 주인들은 채소나 생필품을 책과 함께 진열해 파는가 하면, 카페테라스나 식당 좌석에 사람이 밀집되는 것을 금하니, 모두가 거리로 나와 시위행진을 하기도 한다.  


"삶을 보호한다는 것은, 삶이 가지는 다양한 측면, 사회적, 문화적, 정신적,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보건위생인 면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어야 한다. 정부의 봉쇄령 결정은 시민들의 삶을 생물학적 삶 한 가지로 축소해 버리고 있다" 11월 4일, 언론(Le Journal du Dimanche)을 통해 봉쇄령 철회 요구 성명을 발표한 200명 법률가들의 주장은 프랑스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난의 목소리를 잘 요약한다. 


위의 '보건 독재'를 구호 삼아 시위 중인 160만의 프랑스인들의 소식을 전한 목수정 작가가 한국으로 돌아와 격리 중에 남긴 포스팅이 기억에 남는다. 국가가 국민의 건강을 생각한다면, 컵라면과 햇반 대신 건강한 채소와 과일을, 그리고 면역력 증진을 위해 햇볕을 동반한 산책을 권유해야 한다는 비판이다. 물론 황황한 전시 상황에 보급된 전투 식량을 반찬 투정하며 먹을 수는 없지만 생존하기도 버거운 몸을 이끌고 전쟁을 이길 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 이 말이다. 한 때 방역 모범 국가의 시민으로서 경거망동한 발언은 자제하고 공중보건의 질서를 함께 수호해야겠으나 문자 그대로 '행복한 삶'을 위해 결정되고 제공되어야 할 국가의 복지 정책들이 정말 우리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지 따져보아야 함에는 이견이 없다. 이유 있는 반항이 될지, 반항에 구구절절 이유를 붙인 꼴이 될지는 모르지만, 정부가 카페를 정의하는 노고에 첨언을 하게 된 계기가 이것이다. 


마스크 쓰기, 손 씻기, 사회적 거리두기와 같은 개인의 책임 의식이 감염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이제 자명하다. 때문에 끈질기게 요구되고 있고, 개인과 사회 모두의 건강에 이로우니 그래야 마땅하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의 신체적 영향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나머지 심리적 위험에 대해서는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우울에서 분노로 분노에서 절망으로, '코로나 블루'는 이제 적색경보를 울리고 '코로나 블랙'을 예고했다. 개인의 불안이 타인에 대한 혐오로 번지고 소통의 길은 점점 더 단절된다. 이탈리아의 건축가 지오 폰티는 건축을 "매혹, 쓸모없는 것, 하지만 빵처럼 불가결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공간'은 패션, 요리, 혹은 사랑처럼 존재에 필수적인 무언가다. 커피를 영양학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면역력 증진에 도움이 되는 아연이나 비타민 따위는 전혀 들어 있지 않지만, 카페라는 공간과 커피 마시는 행위에는 우리의 일상을 건강하게 또 이롭게 하는 중요한 교훈이 있을지 모른다. 생명을 보호하는 면역력에 관해서는 정원의 은유가 알맞다. 금지하고 제한하기보다 공유하고 함께 가꾸는 것이 좋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