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 연대기
허먼 멜빌의 『모비딕』은 표면적으로 거대한 흰머리 향유고래(모비딕)와 포경선의 선장 에이허브, 그리고 선원들의 싸움을 그리고 있는 모험 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진정한 의미는 모험 서사 안에 담긴 방대한 양의 박물학적 지식과 시대를 아우르는 철학과 사상 등 사실상 문학이 품을 수 있는 거의 가치가 담긴 데에 있다. 파면 팔수록 그리고 씹으면 씹을수록 그 맛을 더하여 성경과 비견되기까지 하는 이 고전 소설은 또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처럼 강렬한 도입부로도 유명하다. 화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Call me Ishmael"
"나를 이스마엘이라 부르라"
화자는 사실 본명이 따로 있지만 이스마엘이라는 간략 하지만 상징적인 이름으로 대신한다. 이스마엘은 이스라엘과 아랍의 선조인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 사래의 종인 하갈과 낳은 아들인데, 후일 사라로 이름을 바꾼 사래에게서 이삭을 낳은 뒤 이스마엘은 광야로 쫓겨난다. 본처의 아들 이삭이 이스라엘 선조가 되고 추방자 이스마엘의 후손이 이슬람교의 시작이 된다.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의 고리가 바로 여기까지 올라온다.
화자가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을 차용한 이유는 그가 버림을 받았거나 서자로 태어난 출생의 비극 때문은 아니다. 마치 미국을 은유하듯 백인 우두머리와 유색인종이 뒤 섞인 '피쿼드 호'에 스스로 올라탄 이스마엘은 차라리 육지로부터 자기 자신을 스스로 쫓아낸 방랑자에 가깝다. 자신에게 새로이 부여한 이스마엘이라는 정체성은 자본주의와 물질 문명주의 속에서 끝없이 타락하는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당대 주류 사회를 이루고 있던 기독교 문명이 언제나 반성하지 못하는 문제점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한 일종의 선언이기도 하다. 그의 냉정하고 분석적인 태도와 말씨가 이스마엘이라 하는 이 이름에서 비롯하고 있는 것이다. 중심에서 벗어난 그의 시선은 민주주의와 종교, 노예 제도와 인종 차별, 노동과 경제, 둘 혹은 그 이상의 성 역할에 대한 불편한 진실들을 마주하고 수면 위로 하나 둘 건져 올린다.
허먼 멜빌이 모비딕을 집필한 그 나이에 나는 고작 이력서를 쓰고 있다. 자신의 몸값을 불리기 위해 처절하게 쌓아 올린 포트폴리오 40페이지의 장광설. 모비딕이 당시에 소설로 구분되지 못하고 수산업 코너에 꽂혀 있었던 것처럼 장르조차 불분명한 한 개인의 드라마. 이 미생의 도입부도 불편하리만큼 강렬하다.
OO대학교 3학년 중퇴.
자랑스러울 것 없고 스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 그뿐이지만 선입견을 주는 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벌써 10년이 지난 그때를 부득이하게 회고하는 지금, 대안의 삶을 찾겠노라는 선언이자 끝이 보이지 않는, 끝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불안한 여정의 신호탄에 다시 한번 귀가 먹먹하다. 당연하게도 이 배는 출항부터가 쉽지 않았다. 삐걱대는 누더기 뗏목 위에 배짱만 좋은 설익은 젊음을 아서라 말리던 주변 사람들과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며 고맙지도 않은 스포일러를 들려주던 사람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소설 모비딕은 거대한 포경선 '에식스호(Essex)'가 거대한 향유고래에 받혀 침몰한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10년 넘게 향유고래는 고사하고 아직 침몰하지 못한 채 부유 중인 이 이야기의 끝이 위대한 발견 따위가 아닐 것을 직감한 지 오래다. 어떤 순간에는 나조차도 침몰의 날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언제라도 집어삼킬 듯이 발목까지 넘실대는 시커먼 바닷물은 한순간도 따뜻했던 적이 없다. 생전에는 빛을 보지 못하고 공상의 모험을 멈추지 않았던 에드거 앨런 포, 카프카, 멜빌과 같은 작가들의 삶과 문장을 거의 주문처럼 외며 여기까지 왔다.
시대를 그리고 세상을 거스르는 이 문제적 이름, '신은 들으셨다'는 의미를 가진 이름, 이스마엘 속에도 반드시 들려줄 가치 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