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바다고래 Sep 26. 2023

재능 있는 사람에게 감사하게 되었다

대출은 많지만 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

 재능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열등감부터 솟아오른다. 특별한 재능도 없는데 마음도 그리 곱지 못해서 질투도 많기 때문이다. 피가 나게 노력해 봐야 겨우 7,80점 정도 사람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 말을 잘 듣는 모범생이지만 가장 똑똑한 학생은 아니었다. 눈에 띄게 예쁜 구석도 없고 성격이 매력적이어서 대중을 휘어잡는 스타일도 아니다. 춤이나 노래, 그림 등 예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적도 없다. 간단히 말해서 뭐 하나 타고난 것이 없다. 늘 앞서나가야 하는 한국 사회에서 남들 뒤통수만 바라보며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쫓아가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적성을 찾아야 하는 순간에도 다들 잘하는 걸 하라는데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잘하는 게 없는 것 같은 나 같은 인간은 어쩌란 말인지 분통이 터졌다. 설상가상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도 높다 보니 혼자 기대했다가 실망했다가 지지고 볶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보니 재능 있는 사람을 보면 동경과 질투심, 열등감과 막막함이 온통 뒤섞여 그들의 빛나는 모습을 외면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던 것 같다. 끔찍한 감정의 덩어리가 행성만 한 크기가 되어 나를 덮치고 매번 멸망을 맞이하는 결말을 피하고 싶었다. 쿨하게 인정하고 싶기도 했다. 그들의 재능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조금은 부족한 듯 평범하게 살 수 있는 나의 인생에도 만족하고 싶었다. 불행히도 그런 마음은 어렸을 때 꿨던 허무맹랑한 꿈처럼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뚱맞게 치앙마이에서 재능 있는 사람에게 감사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스려보겠다고 애를 써도 불가항력인 것 마냥 안 되더니 그날은 마음이 그저 그렇게 돼버렸다. 혼자 재즈바에 가는 것에 제법 자신감이 붙은 나는 조금 더 먼 곳의 재즈바까지 섭렵해 보기로 결심했다. 외곽 지역으로 나가는 것이 걱정되어 여성 여행자 채팅방에서 동행도 구했다. 볼트에서 내리자 갑자기 서울 어딘가에 있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세련된 재즈바가 눈에 들어왔다. 들어서자마자 웨이트리스가 다가와 동행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로 안내했다. 푹신해 보이는 의자와 테이블마다 놓인 간접 조명이 낯설었다. 통창으로 지어진 공간은 무려 에어컨이 나왔다. 등을 타고 흐르는 땀을 느끼지 않고도 음악을 즐길 수 있다니 말도 안 돼. 처음 본 분들과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며 칵테일을 골랐다. 치앙마이에서의 첫 칵테일이었다. 술은 잘 모르지만 얼마 전 나는 아마레또 사워라는 근사한 칵테일을 알게 된 차였다. 메뉴에서 찾을 수 없어 혹시 만들어줄 수 있는지 물어봤다. 아마레또 사워를 만들어 주실 수 있나요? 라고 물어볼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는 으쓱한 기분을 즐기며 1부와 2부 공연을 보았다. 원래 3부까지 볼 생각은 없었으나 재즈바의 음향도 좋았고 공연 퀄리티도 훌륭해서 끝까지 보고 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나타났다. 첫 곡은 밴드에 소속되어 있었던 여성 보컬이 맡았다. 허스키하고 트렌디한 목소리였다. 치앙마이에서 들어본 여성 보컬 목소리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기타도, 키보드도, 드럼도 무난히 좋았다. 이때도 이미 3부까지 듣고 가기로 결정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가 모든 걸 바꿀 차례였다. 어떤 노래였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목소리만 들렸던 것 같다. 특색이 있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대신 그의 목소리는 우유 폼처럼 부드럽고 밤처럼 깊고 편안하고 무엇보다 탄탄했다. 그러다가는 시원하게 긁는 소리를 내며 기분 좋게 놀라게 하기도 했다. 무대 매너도 수준급이었다. 관객 어느 한 구석도 빼놓지 않고 골고루 눈을 맞추며 호응을 이끌기도 하고 노래에 맞추어 몸을 살랑살랑 움직였다. 미간을 찌푸렸다가 환하게 웃었다가 노래의 분위기에 따라 변하는 풍부한 표정과 관객석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면 여유롭게 브이를 하는 귀여움까지. 타고난 무대 체질인 것 같았다. 여태까지 봤던 공연팀들과 달리 앳돼 보였는데도 안정적이었다.


 한참을 그의 노래를 듣다가 문득 이름도 모르는 그에게 고마웠다. 이미 즐거웠던 나의 토요일 밤이 그의 재능으로 완벽해졌다. 별 다른 재능 없는 내 인생에 저런 이들의 재능이 간간히 등장해 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무료할까 싶었다. 실은 길다면 긴 인생을 사는 데 다른 이들의 재능이 얼마나 필요한지 느껴버렸달까. 그의 재능을 좀 더 보고 싶었다. 숨기는 것 하나 없이 모두 뽐내주었으면 했다. 질투 같은 못난 감정 같은 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어느새 나는 자유롭게 리듬을 타고 발을 구르고 가끔 장난기 넘치는 밴드를 보며 웃음보를 터뜨리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세상에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일을 했다. 공연이 끝나고 무대를 정리하는 밴드에 다가가서 인스타그램 계정을 물어본 것이다. 심지어 인스타그램도 안 하면서! 하지만 나의 용기가 무색하게 그는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밴드 인스타그램 계정이 없다고 했다. 다행히 공연은 매주 토요일 여기에서 똑같이 한다고 알려 주었다. 나의 용기를 부추겼던 동행분들에게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자 모두 아쉬움에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때 내가 지었을 어색한 표정과 어설픈 몸짓을 상상하면 아직도 슬며시 미소가 튀어나온다.


 그날의 마음은 치앙마이 내내 소중하게 간직했다.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는 없지만 고이 모셔 한국까지 가져왔다. 어느 날 비비언 고닉의 책을 읽다가 그날의 마음이 떠올라 괜히 눈가가 뜨거워졌다. 나도 이해할 수 없던 마음을 누군가 공감해 준 것 같았다.

사랑뿐 아니라 정치에서도, '준비된 순간'이란 여전히 삶의 가장 커다란 수수께끼 중 하나다. 내면에 변화가 일어나도록 여러 요소가 충분히 결합하는 그 순간 말이다. 그 순간에 응답하는 사람은 결코 그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비비언 고닉,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52p.

 사랑이나 정치 같은 대단한 주제는 아니지만 그가 나의 '준비된 순간'이 아니었을까 하고 같은 구절을 몇 번이나 읽었다. 그녀는 일주일 동안 취재차 각기 다른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며 강렬한 경험을 한다. 그때 맞이한 순간이 그녀 인생의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돌이켜보니 나도 그날이 치앙마이에서 갓 일주일 정도를 지냈을 때였다. 호기심과 두려움을 가지고 재즈 뮤지션들을 들으러 다니며 여운에 쉬이 잠들지 못했던 밤들을 기억한다. 낯선 도시에서 혼자 소파에 파묻혀 미뤄뒀던 책을 실컷 읽으며 웃고 울었던 시간도 생생하다. 그 시간이 아니었으면 영영 몰랐을 관계와 감정에 대해 배우고 나의 지나간 경험을 다르게 해석하는 법도 알게 되었다. 치앙마이가 나를 무장해제한 그 순간부터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재능의 빛남을 찡그림 없이 오롯이 바라보는 눈, 행복과 감사에 가득 차오르는 부푼 마음, 끝없이 탐닉하고 싶은 욕구. 이전에 모조리 튕겨냈던 재능들도 모두 돌아와 인사하는 것 같았다. 내가 가늠할 수도 없는 것들을 경험하고 알려주었던 친절한 목소리들, 나조차도 나를 사랑하고 이해할 수 없었을 때 부드럽게 안아주었던 따스한 활자들, 도저히 웃을 수 없을 것 같은 날에도 나를 바닥에서 끌어올려 미소 짓게 했던 우스꽝스러운 얼굴들, 그것들 모두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서 기다려 주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내 어깨를 톡- 하고 두드린 것이다. 모든 것이 충분히 결합되어 있는 그때, 고개를 돌려 응답할 준비가 된 그때, 그가 나를 불렀다. 그래서 나는 망설임 없이 응답했다.


 아마 앞으로도 조금 질투하고 간혹 열등감에 시달리고 또 좌절할 것이다. 어떤 날에는 나의 애매한 재주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좀 더 나답게 잘 살 수 있을지 끙끙대고 늪지대 같은 무력감에 허우적거릴 테지. 특별하지 못한 인생을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여전히 꽤나 무거울 것이다. 별안간 재능을 발견한 것도 아니니 달라진 것은 딱히 없다. 그래도 어쩐지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다. 나를 짓누르던 열등감과 질투의 무게만큼. 오늘은 그걸로 충분하다.


 


 

작가의 이전글 치앙마이에서 인생 첫 글쓰기 모임을 가보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