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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eiricbobo Nov 30. 2016

연애의 끝

"그래서 둘은 어떻게 만났는데?"
수십번은 대답해 본 낯익은 질문이지만 대답하는 것이 전혀 수고스럽지 않다.

"우리? 정말이지 운명 같았지."

언제 해도 참 즐거운 얘기고 언제 들어도 참 뻔한 얘기다. 그들이라고 만남이 꼭 운명적이고 낭만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뻔하디뻔한 클리셰랄까. 하긴 그 클리셰가 세상에 둘도 없는 로맨스로 탈바꿈하는 순간이 그게 내 일이 되는 순간인 법이니.


처음 만났을 때 남자의 장래는 유망했고 여자는 훌륭한 재원이었다. 물론 그 조건은 여전히 유효하다. 당시 둘은 젊고 무모했지만 동시에 서툴렀고 또 겁쟁이였다. 감정을 절제할 줄 몰랐고 진심을 쏟아부으면 그대로 받아들여질 거라고 여겼다. 언제나 마음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전력을 다해 사랑해도 평생 지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세련되지 않은 형태의 진심은 세련된 거짓말만큼도 전달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땐 왜인지 깨닫지 못했다. 그땐 젊고 무모했고 그래서 서툴고 겁쟁이였다.


"결혼? 얘기했다시피..."

"우리 이제 5년 만났어. 내년이면 나는 서른이고. 이제는 결정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하지 않아?"

'또 이 얘기인가.' 남자는 반복되는 이 상황이 지겹지만 동시에 여자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이해한다. 그럼에도 실용적이고 현실적이며 이기적인 그의 자아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것이 그들을 좁힐 수 없는 간극 속에 몰아넣었다.


쉽게 읽히는 글은 어렵게 쓰여졌을 것이라 했던가. 그러면 어쩌면 우리는 너무 쉽게 이어져서 어렵게 풀리는 실타래 같은 사이일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첫눈에 반하는 기적이 이뤄졌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는데 이제는 그 어느 것도 상관없는 것이 없다.


"이제는 날 놓아줬으면 좋겠어."

뜨끔했지만 사실 남자가 내심 바랐던 말이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짐이 되는 현실이 견딜 수 없을 만치 부담된다. 어서 그 짐을 던져버리고 자유를 누리고 싶은 욕망이 그녀를 사랑하는 진심보다 더 큰 것일까. 모르겠다. 고민한다고 답이 나올 문제도 아니지만, 끊임없이 진전 없는 고민만 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사랑이라고 여긴 모든 게 허상이었던 것일까. 생소함에 이끌렸고 익숙함에 편안했지만, 평생의 반려자로 삼는 것은 다른 차원의 사랑인 것일까. 다가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래 때문에 그리고 그 미래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사랑이라는 미명 하 서로의 현재를 옭아맨 것일까. 아니다. 어쩌면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의 속박적 속성 때문인지 모른다. 타임세일마냥 '유효기간' 내에 거래를 성사시켜야만 성공한 거래가 되고 그렇지 못한 자는 낙오자가 되는 시스템이 그 어떤 선택도 현명할 수 없게 만든다.


"그래. 하자 결혼."

남자는 고심 끝에 결심한다. 비록 지금은 두렵지만, 그 두려움으로 인해 그녀를 잃는 것은 그가 감수할 수 없는 선택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언젠가 할 결혼이라면 지금 하면 어떠리. 오히려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해주는 그녀와 평생을 약속하는 것에 행복해해야지.


진정 사랑하는 연인의 예정된 결말일까. 다행히 결심과 함께 모든 의구심은 사라졌다. 동시에 그간 누려온 안정감도 되찾았다. 5년간의 연애의 끝. 둘은 더 이상 젊지도 무모하지도 않다. 그러나 여전히 서툴렀고 지독히도 겁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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