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각자에게 맞는 고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장의 사진을 놓고도 모두가 다르게 느끼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사진의 시장성은 경제 논리에 의해 가치가 맺어지고 깊이의 강요를 요구하죠. 가치의 문제는 시장성이 아님에도 예술 범주로 들어가면서 가치를 부여받습니다. 물론 이 가치는 오로지 시장의 가치입니다. 가치의 척도는 자본이죠. 오히려 이런 점은 사진 감상의 고유성을 떨어뜨립니다. 시장의 객관 가치로만 작품을 감상할 수 없죠. 외부의 가치부여를 뚫고 나의 관계로 들어가야 하고 나의 주관으로 사진을 보아야 합니다.
사진은 유화 같은 그림의 입체감이 없습니다. 물론 프린팅 정도에 따라 정밀성은 차이가 있겠지만 입체가 아닌 평면을 통해 사진을 감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 휴대폰이나 모니터를 통해 사진을 감상해도 작가의 표현을 느낄 수 있죠. 넘쳐나는 사진의 세계 속에서 나만의 사진을 찾아야 합니다. 그 사진만이 나를 표현하고 치유하고 위로받기 때문이죠. 사진이 나의 감정을 만지는 것. 이것이 사진 예술의 기능이자 체험함이죠. 무심결에 넘기고 있는 사진 중 갑자기 나타나는 사진은 나의 마음을 뚫고 상처를 어루만집니다. 먹먹함. 위로함. 공감함. 복합적으로 느끼게 하는 사진은 감정을 극대시키며 나를 발견하게 합니다. 내가 이런 감정을 가졌구나. 자신이 확대됨을 느낍니다.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 중 구절입니다.
세계의 모든 사진들은 하나의 고유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었다. 나는 이 미로 한가운데에서 니체의 다음과 같은 말을 실현시키는 이 유일한 사진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로적 인간은 결코 진실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오직 자신의 아리아드네만을 추구한다.” p94
사진은 감정의 실타래를 풀고 그 속에서 나를 발견합니다. 잃었던 감정을 다시 찾게 됩니다. 사진의 가능성은 무궁합니다.